본지는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가 지난해 5월 23일 한국기독교학술원에서 발표했던 논문 '한국교회와 종교의 자유-최근 한국 기독교 관련 주요 이슈를 중심으로'를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박명수
▲박명수 교수.
문제제기

한때 한국 기독교(개신교)는 민족의 희망으로 인정되었다. 과거 유교와 불교가 이 민족의 정신적인 기초가 되었다면 개항 이후 새로 형성되는 한국사회는 기독교에 기초해야 한다고 평가되어졌다. 그래서 오랫 동안 기독교를 믿는 것이 곧 바로 이 민족이 사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졌고, 이것이 60년대와 70년대 민족 복음화 운동의 정신적인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현재 한국 기독교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위기에 처해있다. 9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기독교 신자의 감소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기독교에 대한 반 기독교적인 정서는 매우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사회는 기독교가 기여한 공헌은 무시하고 오히려 기독교의 모든 행위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려고 한다.

한국 기독교는 현재 여러 분야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 한국 근대문화를 이끌어 온 기독교는 전통문화의 파괴자로 공격받고, 열심있는 기독교의 전도활동은 종교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로 이해되고, 기독교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고, 이슬람은 오일 머니를 앞세우고 한국을 이슬람 선교를 위한 동아시아의 전진기지로 만들려고 하며, 건전한 결혼관을 지키려는 기독교의 노력은 오히려 '성적 지향'을 차별하는 행위로 폄하된다. 이같은 많은 문제들은 결국에는 종교의 자유, 혹은 선교의 자유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인권과 관련된다. 한국사회가 종교의 자유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 현재 한국교회를 둘러싼 중요 이슈를 이해하는 키워드인 것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이같은 한국교회가 직면하는 이슈를 정리하고, 이것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여기에 대한 기독교의 대안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전에 한국 근대사에서의 종교의 자유와 현 기독교의 상황을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한 주제를 깊게 천착하기 보다는 현 상황에서 기독교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이슈들을 개괄하여 앞으로 여기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전개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아울러서 필자는 역사학자이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를 둘러싼 법률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도 언급해 두고 싶다.

I. 한국의 역사에 나타난 종교의 자유과 기독교

1.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기독교와 종교의 자유

기독교는 개항과 더불어 한국사회에 등장하였다. 기독교가 한국사회에서 활동하는데 현실적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바로 국가권력이다. 국가권력이 기독교의 활동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먼저 한국 근대사에 나타난 기독교를 중심으로하는 국가의 종교정책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할 것이다.

개항 직후 조선정부는 종교문제에 대해서 '계산된 묵인' 정책을 사용하였다. 개항 직후 조선 정부는 종교문제에 대한 갈등에서 빠져 있었다. 당시 조선은 서구문명을 전하려는 세력이 한국에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국제적인 현실과 서양종교를 척사(斥邪)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국내적인 현실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조선정부는 한편으로는 조선 내부의 수구세력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문명을 받아들여서 근대화를 이룩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이 택한 정책은 종교문제에 대한 명시적인 정책을 표명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고종은 가능한 대로 종교문제에 간섭하지 않고 한국의 상황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를 원했다.

기독교는 이런 묵인정책 하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수용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은 민심이다. 민심이 기독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면 기독교는 조선 땅에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다행스럽게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큰 반감이 없이 수용되었고, 이렇게 되는 데에는 교육과 의료사업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같은 계산된 묵인정책은 조선을 다종교사회로 만들었다. 유교 지배적인 사회에 기독교가 들어오자 과거 억압받았던 천주교와 동학도 종교의 자유를 주장했다. 천주교는 조불조약으로 선교의 자유를 확보했지만 동학은 동학운동의 실패로 종교의 자유를 얻지 못했다. 갑오경장 이후 불교도 도성입성금지에서 해제되어 종교의 자유를 갖게 되었다. 과거 조선사회는 유교중심의 사회였지만 조선 말에는 유교, 기독교, 천주교, 불교가 공존하는 다종교 사회가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 동안에 총독부는 종교공인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종교공인정책이란 총독부가 일정한 기준을 갖고 종교를 공인하고, 공인된 종교에 한하여 종교활동을 인정하는 제도이다. 이 기준에 의해서 공인된 종교는 신도, 불교, 천주교, 기독교였고, 천도교와 대종교와 같은 민족종교는 공인된 종교로 인정받지 못했다. 조선 총독부는 각 종교마다 다른 각도에서 취급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종교정책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의 범주 내에서 이루어졌다.

조선총독부는 우선 일본의 국가 종교인 신도를 한국사회에 이식시키려고 했다. 신도는 한국에 와 있던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점점 한국인들에게 신도를 강요하였다. 하지만 이것을 보다 강력하게 강조한 것은 중일전쟁 이후였다. 일본은 신사참배를 통해서 내선일체를 달성하여 대동아전쟁을 치르려고 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여기에 순종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여기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세력이 바로 기독교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에 일본과 가장 협력을 했던 종교는 바로 불교였다. 한국불교는 일본불교와 함께 협력했고, 사찰은 총독부의 직할이 되었다. 총독부는 한국불교를 지원함으로써 한국불교를 지배했다. 주요 사찰을 문화재로 등록하여 보호하였고, 연등제와 같은 불교행사를 적극지원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총독부는 기독교를 견제하려고 했다. 조선총독부는 기독교를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선교사들을 통하여 국제사회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에 다른 종교가 누릴 수 없는 자유를 주면서도 동시에 철저하게 감시하였던 것이다.

한국전쟁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관. ⓒPixabay.com
미군정은 정교분리와 종교의 자유라는 근대적인 개념을 한국사회에 도입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한국에 미국식 종교정책을 시행했다. 그것은 정교분리와 종교의 자유이다. 이것은 한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에는 소위 국교와 공인종교가 있었다. 근대 이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한제국에서도 유교는 왕실에서 국교에 준하는 위치를 갖고 있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신도가 이와 유사한 위치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미군정에는 이런 국교의 위치를 가진 종교는 없었다.

아울러서 미군정은 일제 강점기의 종교공인제도를 폐하고, 모든 종교를 평등하게 취급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교육단체로 취급되었던 유교를 종교로 복원시켰고, 천도교와 대종교를 종교로 취급하였다. 미군정은 종교공인제도를 폐지하고, 국가의 종교 통제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미군정 내에 종교담당 업무를 없애려고 했지만 총독부의 사무를 인수받는 과정에서 이것을 용인하였다. 여기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미군정은 신앙의 자유를 매우 중요한 미군정책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며, 이것은 해방과 더불어서 한국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1948년 헌법은 제정되었고,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여기에서 국민의 종교의 자유와 국교불인정, 그리고 정교분리의 원칙이 천명되었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미군정의 정책을 계승한 것이다. 이런 새로운 원칙은 대한민국을 다종교 사회로 만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태극기는 유교의 음양이론에 기초를 둔 것이며, 애국가에는 기독교적인 하느님이 등장하고, 연호에는 대종교의 단군을 생각하는 단기(檀紀)가 나오고 있다. 이것은 보면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다종교사회라고 말 할 수 있다.

이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의 경쟁력이다. 여기에서 기독교는 다음 두 가지 점에서 타종교와 비교할 수 없는 경쟁력을 갖게 되었다. 첫째는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확립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해방 직후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어떤 나라를 건국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미국과 민족주의 세력은 민주주의를 선호했고 기독교는 이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세력이었다. 둘째는 기독교는 대한민국을 건국하는데 있어서 인적 자원을 갖고 있었다. 해방 후 한국 기독교는 세계와의 소통에 필요한 영어권 인재와 민주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지도자를 갖고 있었다. 이런 두 가지 차원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 한국전쟁이다. 한국전쟁은 반공과 영어의 필요성을 확인시켰고, 한국 기독교는 다른 종교가 가질 수 없는 우위를 갖게 된 것이다.

박정희정권은 종교에 대해서 두 가지 입장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반공과 근대화 정책에 있어서 기독교를 중요한 파트너로 삼았다는 것이다. 박정희 시절 한국기독교는 강력한 민족복음화운동을 벌였고, 동시에 정부는 지역교회와 협력하여 강력한 새마을 운동을 벌였다. 두 번째는 민족 주체성 교육을 통하여 전통종교, 민족종교와 강력한 연대를 하였다. 충효교육을 통하여 유교를 강조하고, 석탄일을 비롯하여 불교의 숙원사업을 해결하였다. 따라서 박정희 정부는 기독교를 통해서 반공과 근대화를 추진하였고, 전통종교를 통해서 민족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