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다윗은 구약에서 이미 가장 친근하던 자에게서 배신을 당한 적이 있으며 그 일을 가지고 시를 썼는데(시 41:9), 주님은 그것을 가지고 말씀하셨다. 그분이 당하실 일에 대하여 주님은 다윗의 일로 예표를 들어 말씀하신 것이다. 19절은 예언을 말한 것이며, 20절은 유다 같은 배신자가 있다 해서 다른 사도들의 권위가 손상되지는 않는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남은 제자들을 사도들(보내신 자)로 인정하시고, 그들을 영접하는 자들을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며 그들과 주님 자신을 일치시키셨다.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마지막 날 밤이다. 이 밤이 지나면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그날 밤, 주님은 당신이 배신을 당한다고 말씀하신다. 일어날 일을 다 알고 계시다는 말씀이다. 주님의 마음이 심히 민망하였다는 것은 괴로워하셨다는 뜻이다. 유다에 대해 6장에서 예수님은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공생애 3년 반 동안 마귀가 계속 따라다녔다는 사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주님은 12제자 중 한 사람에게 모든 살림을 맡기셨다. 가룟 유다는 ‘돈궤를 맡은 자’였다. 그에게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의 책임을 다 맡겼다. 주님이 처음에 12제자를 세우실 때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아침에 주님을 따르던 자들 중 12명을 제자로 세우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그 오랜 시간을 기도하실 때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생각하셨을 것이고, 아버지와 상의하셨을 것이고, 그 가운데 유다는 주님은 그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아셨기 때문에 그에 대해 많은 시간 기도하셨으리라 생각한다. 주님은 그가 누군지 모르고 택하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다가 예수님을 따르는 가운데 처음부터 배신할 표시를 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를 위해 충성을 보이고 열심을 보일 때는 유다도 따라서 똑같이 행했을 것이고, 누구보다 동조하는 발언도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을 때 ‘유다일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평소 예수님을 팔아넘길 특징을 지닌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은혜를 받는 것처럼 했을 것이고, 산상에서 주님의 교훈을 받을 때는 그 귀한 말씀에 같이 놀랐을 것이고, 또 주님이 많은 기적을 행하실 때는 그것을 바라보며 정말 대단하다고 경탄하며 화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 밤에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당황했을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서로 누굴까 의심했다고만 했는데, 다른 복음서에 보면 ‘내니이까?’ 하면서 혹시 자신이 아닐지 질문했다고 되어 있다. 나는 주님이 그 자리에서 고개를 흔드시거나 별다른 표시를 안 하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이 복음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은 자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쓰지 않고 ‘그의 사랑하시는 자’라고 했다. 영어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his disciple whom Jesus loved)’라고 기록했다. 무슨 말인가? 주님은 자신의 모든 제자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었던가? 1절에서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지만, 그 가운데 특히 세 사람을 데리고 다니실 때가 많았다. 특히 요한에 대해 ‘예수의 사랑하시는 자’라는 표현을 쓰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가? 그렇다.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무한하신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 가운데 특별히 사랑하시는 자가 있다.

비단 요한 뿐 아니다. 많은 사람을 사랑하셨지만, 예수님은 마리아를 사랑하셨고 베다니 집을 사랑하셨다. 베다니 집의 나사로에 대해, ‘당신의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도 ‘예수님은 저 사람들을 사랑하시는구나’ 느껴지도록 사랑하셨다. 이스라엘을 다 사랑하셨지만 유다를 사랑하셨고, 그 가운데 다윗을 사랑하셨다. “이새의 아들 가운데 내가 다윗을 보니 그는 내 마음에 합한자라”. 예수님을 낳은 성모 마리아에 대해 천사는 말했다. “너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로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우리는 두 사람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멸망의 자식이다. 그는 정말 비참하고 불쌍한 인간이다. 나지 않았더라면 나을 뻔했다. 이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사람은 그 이름이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기록되어 있는 요한이다. 제자들 중 리더였던 베드로조차 요한이 예수님과 더 친근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 자신의 어머니를 누구에게 부탁했는가? 요한이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의탁하며 맡길 때에는 그 바탕에 사랑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 가장 은총을 받는 자들은 예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다. 요한은 만찬석상에서도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앉았고 예수님의 품에 기대었다.

유다의 배신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이것은 그들이 떡 먹을 때의 습관인데,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몽골 사람들은 양을 잡아먹을 때 가장 맛있는 부위를 떼어내 그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분에게 칼과 함께 갖다 드린다. 그분이 그 고기를 썰어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나머지 부분도 먹기 시작하는 습관이 있다. 당시 유대인들도 떡을 먹을 때 가장 리더가 한 조각을 떼어 주면서 음식을 먹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는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또한 예수님의 사랑이기도 하다.

성경에 기록돼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그 조각을 유다에게 주었을 때 그도 인간인지라 잠시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과연 나를 3년 반이나 사랑하고 믿어준 이 사람을 꼭 팔아야 할까’ 하는 혼란이 약간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돈이고 또 하나는 시기이다. 아마 그는 일을 가장 많이 했을 것이다. 재물을 맡고 있었기에 모든 살림을 도맡아 꾸려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주님이 중요한 곳에 데리고 나설 때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다. 그들끼리 누가 크냐고 다툴 때 그 자리에 유다가 끼지 않았을 리가 없다. 또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는 요한이었다. 이 모든 것이 유다에게는 서운함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나는 써먹기만 하고 항상 홀대를 하는구나, 언제나 따돌림을 당하는구나’ 생각했을 수 있다.

또 그는 이재(理財)에 밝았기에 예수를 넘겨주면 자신에게 어떤 이득이 온다는 계산이 금방 나왔을 것이다. 당시 대제사장들과 유대교 세력은 예수를 잡으려 했고, 예수는 힘이 없었다. 그들 세력은 너무 컸다. 그들이 예수를 죽여버리려 하는 상황이기에, 넘겨만 주면 자기에게 돌아올 이득이 크다고 생각한 것이다. 금전에 대한 욕심의 결과로 배신을 한 것이다. 많은 배신 가운데 금전이 개입되지 않은 것이 없다.

제자들이 ‘혹시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했던 질문들, 빛 되신 주님 앞에 섰을 때 그 누구도 ‘나는 아니야, 저 사람일 거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배신 앞에서는 모두가 두렵다. 배신의 위험성은 모두의 속에 잠재돼 있다. ‘나는 아닐 거야’라고 확신하지 말라. 그런 사람이 더 위험하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들조차 자기 자신을 의심하며 물었다.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떡 조각을 받아먹은 후 곧 사단이 들어갔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일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사탄과 같은 마음을 가지면 마귀가 역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죽고 싶고 절망스런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마귀가 ‘너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어라’ 하는 것과 같다. 유다는 이미 그의 속에 배신의 마음이 들어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마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요 6:70).

떡을 주시고 나서 주님은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유다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아는 사람은 예수님 뿐이었다. 유다는 조각을 받고 곧 나가 대제사장에게 갔다. 예수를 넘겨주겠다고 하자 대제사장은 매우 기뻐했다. 성경에서는 기뻐하며 은 삼십을 달아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다는 그 돈을 받았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는 말씀은 주님이 유다의 결정을 인정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천국에서 내어쫓으시는 법이 없다. 각 사람이 자기의 길을 결정하고 나가는 것 뿐이다. 다만 주님은 사람이 자기의 길을 결정했을 때 그것을 인정하신다. ‘배신’이라는 원문에서 ‘넘겨준다’는 뜻이다.

18절에 ‘발꿈치’라는 말이 나온다. 배신과 발꿈치는 관계가 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뱀에 대한 저주이다. 배신이란 돌아서서 뒤를 무는 것이다. 정면에서 따지는 사람들은 배신하지 않는다. 배신하는 자들은 돌아서서 문다. 이는 사람으로서 가장 악한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절대로 이런 일을 하면 안 된다. 한동안 따르던 사람, 섬기던 사람, 은혜를 입은 사람에 대해서 나중에 속상하고 섭섭하다고 뒤로 돌아가서 무는 것은 안될 일이다. 우리말로 뒤통수를 친다는 표현이 있다.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자신하지 말라. 그렇게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마땅히 이를 두려워해야 한다.

이 부분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느 정도 비결을 배울 수 있다. 아무리 서운하다 해도, 아무리 저들이 잘못 되었다 느껴져도, 함께했던 사람들을 뒤에 가서 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사단적인 일이요 뱀이 하는 일이다. 인간의 미덕 중에서 가장 아름답지 않은 일이 이런 일이다. 유다를 ‘멸망의 자식’이라 불렀다. 주님은 그에게 차라리 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셨다. 그는 자기 곳으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마귀이고 뱀이었다. 예수님을 3년 반이나 따라다니면서 하시는 일을 다 보았던 자가 결국 자기의 선생, 그토록 사랑했던 분을 대적들에게 팔아버렸다. 넘겨주었다는 말은 자신이 직접 해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유다는 그렇게 주님을 배신했다.

31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주님은 이제 유다가 당신을 팔러 나갔다는 것과 그들이 곧 잡으러 올 것을 알고 계셨다. 주님은 미리 다 아시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신 것이다. 사단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여러분도 친한 친구에게 배신당했다고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 주님께서도 분노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고 하시면서 ‘영광’을 서너 번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단의 하는 일은 무엇인가? 결국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다. 그분께 영광이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배신당했다고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분노하지 말라. 결국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할 것이다. 결코 사단은 승리하지 못한다. 사단은 다만 하나님이 소극적으로 쓰시는 도구일 뿐이다. 그 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주님은 물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수치를 당하시고 어려움을 당하신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바라보지 않으시고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가 받으실 영광을 바라보신 것이다. 고난 그 너머를 바라보신 것이다. 이런 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히 12:2).

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다. 잡힐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소자들(little children)’이란 특별히 사용한 애칭이다. 주님은 떠나시기 전 사랑이 충만한 마음으로 그들을 부르시면서 ‘내가 잠시 너희들과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가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는 말씀을 이런 방식으로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