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편지 심부름을 하고 나자 다리 힘이 빠지고 울적해져서 신애는 타달타달 산길을 내려간다. 키 큰 나무들의 녹음을 뚫고 매미, 쓰르라미 소리가 귀 따갑게 들릴 뿐, 사위는 물속처럼 침잠해 있다.

푸드덕푸드덕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가는 산 까치 한 마리 볼 수 없다. 바람처럼 풀숲을 가로지르곤 하던 하늘다람쥐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갈대 하나를 꺾어 뺨을 간질이면서 신애는 원두막으로 갔다.

원두막으로 올라가서 운동화를 벗어놓고 손 안에 쏙 들어가는 빨간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하였다. ‘머나먼 스와니 강’의 애절한 멜로디가 매미 소리에 섞여 공중으로 흩어져 갔다. 신애가 아버지가 좋아하는 ‘바위 고개’를 반쯤 불었을 때, 멀리 과수원으로 들어선 엄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수심에 젖은 엄마는 땅을 보고 걷기 때문에 신애가 홰홰 내젓는 손짓을 보지 못한다. 신애는 엄마를 향해 막 뛰어갔다. 아버지의 밥을 들고 있는 엄마의 큰 눈엔 달그림자 같은 고독이 짙게 배어 있었다. 온천 앞에서 이시가와를 만났다는 말을 들은 엄마는 구르는 공처럼 숲 속으로 사라졌다.

긴장이 풀린 신애는 까슬까슬한 멍석에 누워 슬금슬금 새 지푸라기 냄새가 코로 스며드는 걸 느끼면서 가물가물 선잠이 들었다. 이상한 느낌에 화들짝 눈을 뜬 신애는 칼날 같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도깨비 같은 이시가와가 눈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사냥꾼을 만난 꿩처럼 신애는 고개를 땅에 박고 몸을 오그라뜨려 엎드렸다. 공포와 맞서려는 본능으로 신애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가! 가! 나쁜 일본 놈아!”

욕을 알아들은 이시가와는 불처럼 화를 내며 신애의 몸을 홱 잡아채었다. 살기 띤 눈으로 그가 소리쳤다.

“너의 엄마 어디 있니? 앙?”
“몰라요. 몰라요! 내가 어떻게 알아요?”
“너, 감옥에 넣어야 되겠다. 네 엄마가 이리 들어오는 걸 똑똑히 보았는데 거짓말 할 거냐? 앙-?”

신애는 고개를 내저으며 정말 모른다고 불복하였다. 이시가와가 먼저 와서 과수원의 밭둑에 잠복했었다고는 생각지 못하는 신애는 강하게 잡아뗄 수밖에 없었다.

이시가와와 실랑이를 하는 중에, 산길에서 내려오는 엄마의 모습을 신애와 이시가와가 동시에 포착하였다. 둘은 후다닥 뛰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뒷동산 아래에서 고개 숙인 채 내려오는 엄마와 맞닥뜨렸다.

이시가와는 위협적으로 다짜고짜 엄마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엄마가 벌러덩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 통에 빈 벤또(도시락)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굴렀다. 부릅뜬 눈으로 이시가와가 냅다 천둥 같은 소리를 질렀다.

“이놈의 옥상(부인), 이게 뭐지, 앙?”

의기양양해진 그는 공을 차듯이 베보자기에 싼 벤또를 발길로 멀리 차 버렸다. 양은 벤또 속의 놋젓가락 부딪는 소리가 맑은 금속성의 음향을 내며 익기 시작한 복숭아나무 위로 메아리쳐 갔다.

“이놈의 옥상, 가네모도(金本) 있는 데를 빨리 대라. 빨리 앞장서란 말이다!”

그는 항거하는 엄마를 산 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신애가 악을 쓰며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으나 역부족이었다.

“고노 바가메로(이 나쁜 년), 어디냐? 빨리 대라. 어차피 네 남편은 붙잡힌다. 가네모도는 내가 붙잡고야 만다. 자수하지 않고 잡히는 날엔 당장 총살 감이다. 앙-.”

그는 발로 땅을 쿵쿵 짓찧으며 술래잡기를 하듯이 숲 속을 뺑뺑 휘돌아다니었다. 마침내 그가 편백나무 아래 마른 풀 더미를 헤치고 시들지 않은 아카시아 가지와 청솔가지로 덮은 굴을 찾아내고 말았다.

울부짖는 엄마를 밀어젖히고 굴속으로 들어간 그가 아버지를 끌어내었다. 철컥 수갑을 채웠다. 앙상하고 창호지처럼 바랜 아버지의 얼굴은 낭패와 공포에 질려 죽음보다 더 창백하였다.

아버지가 수갑이 채워진 손으로 신애의 눈물을 씻어 주고 한없이 슬픈 눈으로 미친 여자처럼 옷이 찢기고 까미(비녀 없이 찐 일본식 쪽)가 풀린 엄마를 처연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최후적인 절망과 불안이 사그라진 비애와 얼음 같은 고독이 깊이 배어 있었다. 기침을 심하게 하고난 아버지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신애 엄마! 빨리 가서 형님과 어머니께 간곡히 말씀드려요. 아주 급하게 되었다고요.”

이시가와는 마침내 체포하고 만 아버지를 사냥한 먹잇감을 노려보는 포식자처럼 이를 부드득 갈았다. 아버지는 하늘로 고갤 들어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한동안 까마득히 B29가 그어놓고 간 하얀 줄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의기양양한 이시가와가 아버지를 끌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절망과 분노로 일그러진, 의지 강한 엄마가 신애에게 일러주었다.

“빨리 뛰어가서 할머니와 큰아버지께 말씀드려라. 이시가와가 아버지를 체포해 갔다고. 엄마는 아버지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 쫓아가 봐야 하니까.”

신애는 왔던 길을 숨이 턱턱 막히도록 뛰고 또 뛰었다. 뛰다가 걷기도 하고 다시 뛰어가기를 죽으면 죽으리라, 로 계속하였다. 멈출 수가 없었다. 보리미숫가루 물통은 바닥이 났고 어린 신애의 목은 갈라진 논바닥인 양 말라붙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칼칼하였다.

대청에는 반드르르하게 동백기름을 발라 옥비녀로 쪽찐 머리에 치자 물들인 모시옷을 정갈하게 입으신 근엄한 할머니가 앉아 계시었다. 둥근 얼굴의 큰아버지는 곱게 짠 삼베옷 차림으로 갈잎 방석 위에 앉아 접이부채를 부치고 계셨다. 가는 대나무살에 기름 먹인 한지의 작은 부채를 들고 계신 할머니 옆엔 반들반들 옻칠한 사각 쟁반에 빈 미숫가루 사기대접이 놓여 있었다.

두 분은 신애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분개한 얼굴이셨다. 고개 숙여 조용히 듣고 있던 큰어머니는 신애가 마신 꿀물대접을 들고 황황히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가장 놀라신 분은 할머니였다. 만석꾼인 할아버지가 창씨개명創氏改名하라는 명령에 불복한 죄로 호된 감옥살이를 하고 돌아가셨던 것이다. 더구나 무골호인인 큰아들이 친일파가 된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