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흔 목사(엘림코뮤니오).
히브리어로 ‘여호와는 강하게 하심’이라는 신학적 의미의 이름을 가진 남유다의 제13대 왕 히스기야는 29년 동안 대체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바르게 국가를 통치했다(주전 715년-687년까지 통치). 남유다 왕국을 다스린 20명의 왕들 중 가장 탁월하고 위대한 왕으로 성경과 문헌에 기록됐다. 남유다 왕국이 낳은 최고의 왕이라는 시대적 명성은 종교와 정치 및 군사에 걸친 그의 역동적 활동에서 기인됐다.

구약성경 중 세 권의 책이 히스기야 왕의 열정적 활동을 매우 중시하면서, 비교적 자상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왕하 18-20장, 사 36-39장, 대하 29-32장). 특히, 역대기 저자는 남유다 히스기야 왕에 의해 이뤄진 종교 개혁에 대해 세부적으로 크게 보도한다.

히스기야의 부친 아하스가 수리아와 에브라임에 대항하기 위해 이방 앗수르 제국과 동맹을 맺으므로 남 왕조에 이교적 색채가 짙어졌다(왕하 16:7-18, 대하 28:16-26). 선지자 이사야는 시대의 이교적 풍습을 신랄하게 공격했다(사 2:6, 8:16). 히스기야는 아버지를 이어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종교와 성전 개혁에 착수했다(대하 26:2). 아하스에 의해 닫혀 있던 성전의 문을 활짝 열고, 정결하게 수리했다. 레위인에게 명하여 성전을 정결하게 하도록 했으며, 그곳에서 올바른 예배가 드려지도록 적극 배려했다.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유월절을 부활시켜, 주전 930년 남북으로 갈라진 이래 최대 규모로 제사를 드렸다(대하 30:26). 유월절 제사에는 정통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으로 앗수르 왕의 손에서 벗어난 자(대하 30:6)도 초청됐다(대하 30:10,11, 왕하 17:25-28). 유월절 제사를 회개와 함께 드린 후 하나님의 사람들은 유다 성읍에 세워진 주상(柱像)과 목상을 모두 부수고,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므낫세 지역에 세워진 산당과 제단을 모두 없앴다(대하 31:1, 왕하 18:4). 히스기야는 모세 시대에 만든 놋뱀이 백성들의 우상 숭배 대상이 됐다고 판단하여 그것마저 제거했다.

히스기야 시대의 정치·군사 문제는 대(對) 앗수르 제국 정책에서 비롯됐다. 히스기야는 치세 초기부터 반(反)앗수르적 태도를 분명히 했다(왕하 18:7).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침략에 대비해 예루살렘성 수비를 공고히 하고, 물을 확보하기 위해 성내 실로암에 저수지를 만들고 기혼에서 터널을 건설해 물을 끌어왔다(대하 32:1-8,30, 왕하 20:20, 사 22:9). 앗수르라는 광포한 대국의 위협 하에서 히스기야 왕 행동이 종종 인간적이고 정치적 판단에 의해 좌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대의 설교자요 선지자인 이사야의 충고와 조언에 감화를 받고, 마음으로 회개하며 여호와께 보인 순종과 열심은 역대의 왕 중에서도 히스기야가 단연 뛰어났다.

한편 앗수르 동쪽에는 므로닥발라단 왕이 거느리는 신흥 바벨론 세력이 발흥하고 있었다. 그 왕은 앗수르와의 한판 항쟁을 위해 인근에서 동맹을 구했다. 히스기야는 반앗수르 동맹을 위해 바벨론 왕이 보낸 외교 사절을 융숭히 대접했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을 버리고 바벨론과 동맹의 힘으로 유다의 안전을 꾀하려 한 히스기야 외교 정책에 적극 반대했다. 바벨론에서 온 사절을 맞은 히스기야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없이 퍼부었다.

주전 701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세 번째 원정군을 지휘하여 팔레스틴에 나타나자, 반앗수르 동맹은 힘없이 격파됐다. 남유다는 46개의 크고 작은 성읍을 모두 빼앗겼고, 20015명의 유대인이 앗수르 제국의 포로로 사로잡혔다.

연약해진 히스기야는 바벨론에 사자를 보내 남유다의 바벨론 식민통치 예속을 통보했다. 바벨론 왕 산헤립은 남이스라엘을 즉시 식민 통치국가로 수용하고, 히스기야 정권에게 과중한 조공을 부과했다. 은 300달란트, 금 30달란트를 부과하니 히스기야 왕은 성전이나 왕궁의 곳간에 있는 것과 성전문의 금과 기둥에 입힌 금까지 다 벗겨서 바쳤다(왕하 18:14-16). 산헤립은 대군을 성도(聖都) 예루살렘으로 보내 히스기야 왕을 조롱(鳥籠) 속 새처럼 감금했다. 하나님을 버린 인간적인 생각이 낳은 비참한 결과였다.

히스기야 왕의 종교 개혁은 최소한 성전에서 출발한 예배의 순화(純化)에서 비롯됐다. 초창기 종교개혁을 주도하면서 뛰어난 종교 문학이 다수 생산됐다(대하 29:27-30, 사 38:20). 잠언 25-29장은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니라(잠 25:1)”고 기록한다. 필사(筆寫)나 편집 뿐만 아니라, 탁월한 창작도 선지자 이사야의 책을 비롯하여 매우 활발하게 진행됐다. 히스기야는 정치, 종교 및 문학에서도 탁월한 꽃과 열매를 성과로 거두게 됐다.

성경적인 종교개혁을 통해서 성전 예배가 순화되자 예술 분야의 발전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종교는 예술 분야의 발전을 꾀할 수 있는 중대한 기초 도구이기 때문이다. 바른 종교개혁은 예술의 발전을 포함한 지정의의 바른 인격을 성숙시키는 최고 원리가 된다.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들이 바른 신앙을 인격적으로 지닐 때, 정치와 문화 및 예술이 제자리를 잡게 된다. 바른 신학과 신앙 없이, 부수적 분야의 바른 성장은 이 땅에 존재할 수 없다. 오늘날 국가에서 중요한 정치와 경제 및 예술도 사람들 삶의 최종 이정표가 되는 신앙의 행태와 색깔에 따라 생존이 좌우된다. 이단들이 극성을 떨고 있는 이때 교회의 신학 교육과 설교가 바르게 선포돼야 할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