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김 박사(美 쉐퍼드대학교).
2002년에 개봉되었던 헐리우드 영화 중에 ‘Windtalkers’라는 것이 있다. 직역하자면 ‘바람 이야기꾼’쯤 되는 것이지만 ‘첩보 요원’, ‘나바호 인디안 암호병’이라는 뜻이다. 한국인과 결혼하여 우리에게도 친숙한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Nicholas Cage)가 주인공인 조 엔더스 (Joe Enders) 미 해병대 하사역으로 출연했다. 이 영화는 1944년 사이판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미국군과 나바호 인디안 암호병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정보가 생명인 전쟁터에서 미군은 영어와 인디안어가 가능한 벤 야지(Ben Yazzie)와 화이트호스(Whitehorse)라는 두 나바호 인디안들을 암호병으로 사용한다. 일본군에게 나바호 인디안어는 그 자체가 암호가 되기 때문이었다.

엔더스 하사의 임무는 일본군과 싸우다가 암호병 야지가 생포될 위험에 처하면 그를 죽임으로 암호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격렬한 전투에서 엔더스 하사가 매우 잔인하게 일본군들을 죽이는 것을 본 인디언 암호병들은 앤더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투가 격렬해지며 둘 사이에는 인간애가 나뉜다. 그러다가 일본군의 공격으로 전투가 불리해지게 되면서 엔더스 하사는 암호병 화이트 호스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화이트 호스는 일본군에 의하여 생포될 위험에 있었고, 절박한 화이트호스가 잡혀가면서 자신을 죽이라고 신호를 한 것이었다. 그런 친구의 죽음을 본 인디언 암호병 야지는 인사불성으로 일본군에 총질을 해대지만 사태는 더 악화되어 간다. 엔더스 하사는 필사적으로 야지를 구하려다가 오히려 자신이 총상을 입어 위태롭게 된다. 전투가 불리해지고, 또한 자신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엔더스는 야지마저 죽여야만 하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엔더스 하사가 살면 야지도 함께 살 수 있지만, 엔더스 하사가 죽으면 야지도 죽어야 하는 공동 운명이었던 것이다. 이 모두는 암호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죽어가는 엔더스 하사, 과연 엔더스는 야지를 죽였을까?

영화의 끝 장면은 야지가 훗날 나바호 인디안 춤을 추며 엔더스 하사를 추모하는 것이다. 엔더스는 야지를 죽이지 않았다. 엔더스는 야지에게 화이트호스를 죽이고 싶지 않았었노라고 말하며 죽어가고, 끝내 야지를 살려 두었던 것이다.

전쟁터에서 암호는 이와 같이 죽음을 통해서라도 지켜져야 했다. 왜냐하면 암호는 전 국가의 전 전선에서 승리와 패배, 전 국민의 승리와 패배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 많은 암호병은 생포되기 전에 자살을 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는다. 천국에 가기 위한 암호는 그런 면에서 적들에게는 철저히 지켜져야 했고, 아군들에게는 알려져야 했다.

예수님의 암호는 조금 다르다. 예수님의 암호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완성하신 이후, 구원을 위한 더 새롭고 구체적인 암호와 암호 해독법이 성경에 기록되었다. 그리고 그 암호는 오늘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곳 저곳에서 해독되고, 완성되고 있다.

이제 이 책을 통하여 가장 깊은 암호들이 일차적으로 해독되어 여러분 코 앞에, 아니 뇌 속에 이 암호들이 침투해 있다. 암호가 뇌에 명령을 내릴 것이다. 진리의 암호를 알고 진리 가운데 자유하라고……. 더 이상 죄와 결핍의 소용돌이 속에 허우적이지 말고 구원의 반석으로 나아오라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위대한 비전에 사로잡히고 인생을 완성하라고…….

다시 살피는 스님의 질문

우리는 한 대학교의 교수님이시며 스님이신 분께서 느끼셨다는 예수님에 대한 당황스러움으로 이 글을 시작하였다. 이제 우리는 글을 정돈할 때가 되었다. 그전에 서언에서 살핀 스님의 당황함에 대하여 살펴 보자. 스님에게 예수님은 당황스런 존재이고, 그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기독교인들은 황당한 존재였다. 스님은 성경의 정황을 들어 예수님의 언행을 비 영웅적이라고 비판 한다. 그의 논조 대로 하자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버림 받았다고 신세 한탄을 하고, 목마르다고 투정부리는 한심하고 유치한 사람이다.

스님이 언급하신 그런 해석은 십자가의7언을 암호로 생각하지 않고 일반적 언어로 이해할 때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예수님은 고민하고 슬퍼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하나님께 왜 자신을 버리셨나이까 말씀 하셨고 목마르다고 하셨다. 사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십자가는 당황스럽다 못해 황당하다. 그리고 십자가 전 잡히시던 겟세마네의 밤은 처절했다.

겟세마네의 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중략…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마태복음 26:36-45)

스님은 일반 사람들도 죽음 앞에서 담대한데 예수님은 부활될 것을 안다고 하면서도 왜 이런 모습을 보였을까 의아해 하신다.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고, 능력이 있다는 주장이 맞아?”라고 묻고 계신다. 스님은 어떻게 멀쩡한 사람들이 이런 유치한 예수를 신격화시키고, 구원자로 섬길 수 있는가 반문하신다.

스님의 글을 읽으면서 먼저 드는 생각은 그래도 역시 스님은 다르시구나 하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시는 분이기에 진리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이라도 갖는 것이 매우 복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직 예수님에 대하여 비판할 수 있는 어떤 이유와 근거도 없이 막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에 비하면 스님의 관심은 그래도 다른 무관심한 사람들 보다는 역시 성숙한 모습이다. 우선 모르는 바를 비판하고 질문하는 것을 통하여 진리에 더 가깝게 가실 것이기에 스님의 예수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하시는 것 자체가 귀해 보이는 것이다.

스님은 성경과 예수님의 존재를 최소한 인정하셨다. 예수님께서 고민하시는 모습을 스님은 인정하신다. 예수님의 고민하시는 현실을 인정하신다면 스님은 예수님의 그 다음 말과 행동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글의 논조로는 아직 그 전 단계에서 질문을 하신 것이지만 어쩌면 지금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셨을 수 도 있을 것이다.

스님께서 답을 얻으셨으려면 가장 중요한 핵심이 예수님의 말씀을 암호로 보고 암호자의 의도대로 암호를 해독해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7언은 특별히 암호 중에서도 암호이다. 생각하여 보라. 예수님은 태어나면서 부터 이 순간을 위하여 사셨다. 아니, 이땅에 인간으로 태어나시기 전부터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위하여 준비하셨다. 그 분이 죽으실 때 하신 말씀들이 인간들의 시장언어로 해석될 일반적인 말씀이었겠는가?

이전의 글에서 우리는 성경의 언어가 시장언어, 예술언어, 문화언어, 종교언어 그리고 로고스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살폈다. 다시 논할 필요는 없지만 로고스 언어는 빛이 있으라 하면 빛이 생기는 절대 진실, 진리의 언어이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신의 언어이다. 예수님의 말씀들은 로고스 언어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일반 사람들이 예수님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한글로 번역해 놓고 읽으면 그 문장의 1차적인 뜻을 알수는 있지만 그 속에 담긴 로고스성 암호는 여전히 숨겨진 채 있다는 것이다.

스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시장언어, 예술, 문화, 종교적인 언어 정도로 해석함으로 더 깊이 감추인 로고스 차원의 뜻의 이해는 하지 못하셨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당황스러운 존재쯤으로 생각하신다. 여러분은 어떠하신가?

이 글은 <크로스코드>의 출판사 비전북하우스 제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