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김 박사(美 쉐퍼드대학교).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한복음 19:27)

“무엇인가 매우 상징적인 중요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 말은 위대한 주석가가 자신이 도저히 이해하지 않는 구절에 대하여 쓴 말이다.

레이몬드 브라운 (Raymond E. Brown), 그는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성경 신학부 명예 교수였으며, 전세계 개신교와 가톨릭 계열 대학에서 30여개의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다. 두 명의 교황으로 부터 교황 성경 위원회(Pontifical Biblical Commission)의 회원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또한 성경 문학 협회(SIBL, the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와 가톨릭 성서 협회(Catholic Biblical Association), 그리고 신약 성경 연구 협회 (the Society of New Testament Studies)의 회장직을 거친 거장 중의 거장이다.

그의 이러한 경력을 강조하는 것은 그의 말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가 1966년에 한때 최고의 주석으로 정평이 나있던 앵커 바이블의 요한복음 주석을 썼다. 그의 연구는 참으로 깊고 정밀하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십자가 7언 중 이 구절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를 어떻게 해석하였을까?

놀랍게도 그의 주석은 우리에게 해답보다는 수수께끼를 더 전해준다. 그는 주석에서 이 여자라는 부분에 대한 해석을 껄끄러워하였다. 그는 이 여자에 대한 해석을 함에 있어서 이 말이 캅틱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고만 간단히 설명한다. 그리고 요한복음 2장 4절을 참조하라고 하였다. 2장 4절은 혼인 잔치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른 것이다. 2장 4절의 해석에서 그는 “‘여자여’라고 부른 것에는 무엇인가 매우 상징적인 중요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고만 썼다. 무엇인가 중요한 의미가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의 의미는 그 동안 감추어져 있었다. 브라운 박사가 풀지 못한 “무엇인가 매우 상징적인 중요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Raymond E. Brown. The Anchor Bible: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vol. 28-29, Doubleday: New York, 1966. pp. 99, 906 참조)

세번째 말씀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이다. 전통적으로 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이 구절에 대한 주요 관심사는 ‘아들입니다’, ‘어머니이다’라고 말씀하신 쪽이었다. 이것에 대하여는 어머니에 대한 아들로서의 책임감과 새로운 가족 관계의 형성차원에서 이해되었다. 그리고 “여자여” 라고 부른 부분에 대하여는 혼돈스러워했다. 이유는 그럴듯한 설명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어머니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른 것은 참으로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르셨을까? 여기에서 발견되는 비밀 암호는 무엇일까?

암호 해독 포인트

이 말씀의 암호 해독 포인트는 여자에 대한 오해를 푸는 것에서 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이것은 창세기 3:15의 암호 해독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 암호 해독은 또한 가나 혼인 잔치에서 언급된 중요한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그 뜻이 보강되고 확실하게 이해가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언급됨으로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까지 펼쳐지는 암호의 연속성과 일관성을 살피게 될 것이다. 세번째 말씀이 내포하고 있는 암호들은 복합적이다. 특별히 육적 가족과 영적 가족관에 대한 비밀면에서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이 모두에 대한 암호 해독을 시도할 것이다.

여자에 대한 오해

이 세번째 말씀 속에는 그 동안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너무나 깊은 비밀이 있다. 전통적으로 어떤 이들은 이 “여자여(그리스어로 구나이)” 라는 말은 프랑스어의 “마담”과도 같이 여성의 존칭형으로 쓰여진 것이라고 해석했다. 혹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고로 구원자 입장에서 인간 마리아를 어머니보다는 인간으로, 구원받아야 할 한 여자로 불렀다고도 해석한다. 후자의 해석은 상당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이 다는 아니다.

“구나이”로 적힌 “여자여”라는 말의 그리스어 원형 구네는 미혼이든 기혼이든 일반 여자와 아내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 “여자여”라고 구나이를 쓰신 다른 예를 살펴 보면 그 의미를 더 잘 알 수가 있다. 예수님께서 “구나이”라고 부르신 경우는 18년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허리를 펴지 못하던 여인을 고치시며(누가복음 13:12),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 나누실 때(요한복음 4:21),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부를 때(요한복음 8:10),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를 부르실 때 (요한복음 20: 15)였다. 모두 “여자여”라고 부르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르기 전에 천사가 무덤에 찾아온 막달라 마리아를 동일하게 부른다 (요한복음 20:13). 이 말은 또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정황에서 한 하녀가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였을 때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누가복음 22:56-57)라고 답하였을 때 썼던 말이었다. 이 상황에서는 베드로가 여자를 책망하면서, 꾸짖으면서 부른 말이다. 예수님과 천사의 경우에는 여자에 대한 중립적 경칭으로, 베드로는 꾸짖는 말로 여자, 구나이를 사용하시었다. 그러므로 “구나이”는 당시에 여자를 부를 때 광범위하게 사용했던 일반적인 용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여전히 “구나이”라는 용어가 어머니를 부를 때 사용하였는지이고, 그것이 마담과 같은 존칭으로 쓰였는가인데 이것에 대한 용례는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없다. “구나이”가 여자를 광의적으로 부를 때 사용하였지만 어머니를 부를 때 사용하는 것은 여전히 어색함이 엿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여자라고 지칭한 것은 “마담” 차원의 존칭으로 썼다기보다는 여자란 말 그 자체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강조점은 여자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강조하여 불렀을까?

사실 여자를 강조하는 데는 너무나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이 여자의 중요성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골고다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과연 여자의 암호성과 골고다의 암호성에는 어떤 연결성이 있는 것일까? (다음주 계속)

*이 글은 크로스 코드의 출판사 비전북하우스 제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