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김 박사(美 쉐퍼드대학교).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이 기도의 시점

이 기도를 드리는 시점 또한 이 말씀의 암호를 해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십자가에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채 천천히 매우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게 죽어 가시고 있는 상황 속에서이다. 그리고 이 간구의 내용은 용서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용서의 간구이다. 다시 말하지만 현재형으로 죽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용서인 것이다.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용서를 한다. 일반적으로 진정한 용서는 시간이 걸린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가 아물고 아픔의 기억이 약해지면, 그리고 자신의 악함도 기억하게 되면서 용서를 생각하게 된다. 진정한 용서는 자신의 약함과 악함을 인정하고, 남들의 약함과 악함을 동시에 인정하고, 또한 성장의 과정 속에 있는 인류로서의 동류의식을 느낄 때 할 수 있다. 이것은 긴 시간을 거치면서 성숙을 경험할 때 할 수 있는 매우 고귀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는 다른 점이 있다. 지금 죽어가면서 자신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을 죽음의 현장에서 용서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죽어가는 현장에서 용서한다는 것은 기적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씨앗이 계절이 지나면서 충분한 시간과 양분을 흡수한 후에 열매를 맺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그러나 씨앗이 지금 흙에 심기는 상황에서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은 기적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용서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져 막연하게 ‘예수님께서 용서를 간구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최악의 고통 속에서, 모든 감각이 고통에 집중하여 그 가해자들에게 증오와 저주를 해도 모자랄 상황에서 용서를 한다는 것을 알아야 이 암호가 해독된다.

아무도 부탁하지 않은 용서

상담자로서 내가 자주 들었던 질문 중에 하나는 회개하지 않은 자, 용서를 청하지 않는 자에 대한 용서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용서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논리로 보면 용서를 청하지 않는 이를 용서한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다. 쉽게 용서하면 또 그 가해자가 잘못을 행할 것이고, 그렇다면 용서가 오히려 악을 키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합리적인 생각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사실은 이 질문에 답을 주고 계신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상황이었는데 용서를 한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죽으면 그만인데’라고 생각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가해자들은 회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 예수님은 억울하게, 처참하게, 고통스럽게 죽어가면서도 그들을 용서해 줄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는 것이다. 아무도 부탁하지 않은 용서였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은 용서였다. 그러나 그는 그 죽음의 자리에서 그리하셨다. 자신을 지금 죽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용서였다. 이런 모든 정황 속에서 이제 예수님께서 왜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셨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아야 한다.

6가지 용서의 이유

첫번째,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용서를 간구하신 의미에는 이미 살핀 바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죽이는 인간들을 용서하지 않으실 때 올 엄청난 재앙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잡신을 섬기고 하나님 뜻을 어긴 것에도 큰 징벌을 받았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우주 최대의 악에 대한 징벌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 되었었을 것이기에 그러하다.

두번째, 죽어가면서 하신 용서의 이유는 단순하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 이후에 또다른 삶이 있기에, 그 삶이 또다른 차원에서 연결되기에 악의 순환을 끊기 위한 용서를 하신 것이다. 이 깨달음은 매우 중요하다.

세번째, 예수님의 용서는 율법적인 차원에서 “너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의 죄를 용서치 않으신다”는 말씀을 실천하시는 것이다(마태복음 18장).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신 것 같이”라는 (마태복음 6:11) 부분을 완성하시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스스로의 죄에 대하여 용서받으실 필요는 없으시다. 이 주기도문의 공식으로 볼 때 예수님의 간구의 순서는 이렇다. “아버지 저도 제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해 준 것과 같이 아버지께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것은 중보자의 기도였다. 그리고 우리가 실천해야 할 진리이다.

네번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목적에서 기인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용서셨다. 이 용서를 하기 위하여는 순결하여야 한다. 죄 있는 이가 남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짊어진 십자가에서 용서를 선포하시는 것은 그의 사명의 완수를 뜻하는 것이다.

다섯번째, 그의 용서는 인간이 육체 그 이상이며, 육체의 한계를 극복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주시는 것에 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육체적이 되어 고통에 신경쓰기보다는, 영혼으로 깨어 그의 사명을 감당하시는데, 이것은 인간이 육체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인간은 타락 이후에 철저하게 육체적이 되었다. 먹고, 마시고, 보다 편하게, 보다 풍요하게 살기 위하여 남의 것을 탐하는 육체와 물질 본위적인 삶을 살았다. 그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영으로 승화된 고귀함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여섯번째, 예수님의 용서는 사탄이 아담 이후 타락한 모든 인간을 붙잡고 있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비로소 아담의 타락 이후 인류가 이어온 육체의 굴레와 한계를 뛰어넘음으로 사탄을 인간이 이길 수 있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육체에 사로잡혔다면 그는 다른 죄수처럼 울부짖어야 한다. 아니 죄 없이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억울하여서라도 더 큰 소리로 부당함을 외쳤어야 한다. 그리고 무고한 자를 죽이는 악에 대하여 응당한 증오와 저주를 외쳤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육체의 논리와 세상적 논리를 거절하셨다. 그 이유는 그 육체의 논리와 인간의 논리 배후에 있는 사탄의 논리를 아시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십자가에서 악을 악으로, 저주를 저주로 갚음으로써 사탄의 전략인 악의 순환에 휘말려드는 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거부하셨다. 대신 사탄이 주장하고 있는 그 악의 순환에 대한 음모를 파괴하기 위하여 자신에게 죄 지은 자를 먼저 용서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순수와 순결로 아버지께 모든 이들의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을 간구하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예수님께서 육체를 등한시하시거나 육체적인 고통을 느끼지 않으셨다는 것은 아니다. 육체의 모든 고통을 당하였으되 그 육체의 감각적인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육체의 고통보다는 사명의 완수로 자신의 고통을 승화시키신다. 그리고 스스럼 없이 자신을 지금 죽이고 있는 이들을 용서하신다.

전 인류와 내가 포함된 용서

이 용서가 죄가 어떤 열매를 거둘지를 모른 채 함부로 죄와 악을 지으며 살아가는 모든 인류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이 암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인류 속에 구체적으로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이 암호를 해독하지 못한 것이다. 내게 남들이 지은 죄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이 암호 해독을 하지 못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하지 못함으로 더 깊은 영적이고 육체적인 수렁에 빠진다. 그들은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심각한 질병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용서치 못한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울화 때문에, 그리고 입으로 하는 저주로 인하여 심장병, 관절, 위장, 두통 등의 문제로 지속적인 고통 속에 살아간다.

반면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 이후에 첫 순교자 스데반이 그러한 것과 같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인하여 원수를 용서하며 뒤에 있는 상처를 잊고 미래를 개척한다. 그들은 과거의 상처들 속에서 교훈을 찾으며 자신과 세상의 악함과 약함을 보며 기도한다. 그리고 자신과 세상의 악을 인내로 이기며 차츰 더 강건하고 경건한 사람들로 성숙한다. 이것이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한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암호 해독법에 의거해 암호를 풀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