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IV. 군중들의 몰(沒)이해

군중들은 처음에는 예수의 기적을 보고 열광하고 그를 영광의 메시아(왕)로 추대했으나 예수가 이들의 메시아적 기대를 저버리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성례전적 가르침(요 6:53-58)을 하신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3-55). 그러나 군중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수군거린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요 6:60b). 이에 예수는 이들에게 믿음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기인하고 있음을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요 6: 65).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많은 군중들은 떠나가고 얼마 남지 않았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니라”(요6;66). 군중들은 다음같이 이유로 예수를 떠났다.

첫째, 예수의 행태는 정치적인 해방을 해주리라고 기대했던 군중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이들은 로마로부터 유대 나라를 정치적으로 해방시키는 메시아를 원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군중들은 예수를 왕으로 추대하려고까지 했던 것이다(요 6:15). 이를 거부하는 예수에 대하여 군중들은 실망하여 떠난 것이다.

둘째, 군중들은 예수가 고난의 종이라는 사실을 알고 실망했다. 종려나무 가지가 펼쳐진 가운데 나귀를 타고 들어오는 예수의 겸허한 예루살렘 입성을 보고 군중들은 흥분했다. 그러나 군중들은 막상 예수의 입성이 왕으로서의 입성이 아니라 고난의 종이란 사실을 알고 실망하였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의하면 진정한 메시아는 고난의 종의 모습으로 와서 비천한 모습으로 구원을 가져오신다. 이것이 복음서 저자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메시아 비밀”(Messianic secret)이다.

셋째, 군중들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알지 못했다. 이들은 예수의 영적 설교에 대하여 무지(無知)하였다. 오병 이어 기적에 열광한 군중들에게 예수는 이 기적이 지닌 영적 교훈, 즉 성만찬 의미를 말씀하신다. 그러나 많은 군중들은 이 영적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이를 육신적으로 이해한 이들에게는 돌짝 밭에 떨어진 씨와 같은 경우였다. 그리하여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 복음은 이를 육신적으로 이해하는 많은 사람을 하나님 복음의 적대자로 만든다. 세상의 질서에 속한 자들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나라에 대적한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이다.

V. 심지어, 제자들의 몰이해

심지어는 제자들까지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순교적 각오로 올라가는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신앙고백을 한 수제자 베드로까지도 예수가 고난의 종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신다”(마 16:21). 이를 듣고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는 예수를 만류한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이러한 제자들의 태도를 보고 예수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하시고 베드로를 책망하신다. 이들 제자들은 예수가 나중에 잡히실 때 뿔뿔히 흩어져 도망한다. 이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자 본래 자기 옛 직업으로 되돌아 가고자 했던 자들이었다.

VI. 예루살렘의 길로 나서는 예수

예수는 점차 적대자가 많아지는 상황을 하나님이 작정하신 고난의 순간이 임박한 것으로 아신다. 복음서 저자 누가는 이 때 하신 예수의 말씀을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 마가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 하더라”(막 10:32)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는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신다(막 10:32):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막 10:33-34). 이렇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감으로써 예수는 이제 그의 선교의 종착지를 향하여 다가서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로만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거부와 박해와 고난과 헌신과 희생의 실천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VII.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중심지, 예루살렘

왜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만 했는가? 예루살렘은 여태까지 율법의 중심지요, 유대종교의 센터요, 유대 정치문화의 센터요, 하나님의 옛 언약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이제는 예루살렘은 새 언약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 율법 종교의 중심지인 그곳에서 예수는 화목제물이 되심으로써(롬 3:25) 율법의 저주를 끝내고 은혜의 시대를 시작하고자 하신다. 하나님의 은혜 시대는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제물로서 드리심으로써 실현되기 때문이다. 예수가 고난의 종으로 죽으심으로 율법의 시대가 지나고 은혜와 복음의 시대가 도래한다(롬 3:22). 예로부터 선지자들은 이 예루살렘에서 박해받고 처형되었다. 이러한 옛 선지자들이 갔던 고난과 죽음의 길을 예수께서 고난의 종으로서 마감하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시고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속 은혜(롬 5:17)를 그곳에서부터 전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달하고자 함이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예루살렘의 두 가지 모습, 율법의 도시 예루살렘과 은혜의 도시 예루살렘을 다음같이 비유한다: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4-26). 예수께서 올라가시는 곳은 시내산으로 율법의 도시 예루살렘이다. 예수는 그곳에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 시대에 종지부를 찍으신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의 대속(代贖, redemption)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새 예루살렘을 세우고자 하신 것이다. 골고다에서 자신의 생명을 드린 예수의 희생을 통하여 옛 예루살렘은 은혜의 새로운 언약의 예루살렘이 된다. 이제 신령한 예루살렘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 내린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것 처럼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영과 진리의 예배 시대가 시작된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새 예루살렘은 더 이상 지리적 혈통적 유대인의 예루살렘이 아니다. 그것은 신령한 예루살렘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종말론적으로 내려온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