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간 직접 답사해 이야기 수집
귀납법적 스토리텔링과 사진도

명동 지승룡 다다이스트

명동 다다이스트
지승룡 | 건양사 | 516쪽 | 25,000원

민들레영토를 이끌었던 지승룡 소장이 ‘명동과 충무로’를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살핀 <명동 다다이스트>를 출간했다.

1권 ‘명동 다다이스트’, 2권 ‘충무로 카르타’ 등 명동과 이어진 충무로까지 함께 조명한 ‘길 위의 인문학’은 그가 직접 4년간 이 지역 구석구석을 걸어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들은 생생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저자는 이를 ‘귀납법적 스토리텔링’이라고 표현한다.

명동은 지금 거대한 상권이 형성돼 외국인들이 주로 찾는 거리, 매년 발표되는 ‘땅값 순위’에서 20년째 전국 1위를 차지하는 최첨단 도시가 됐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도 이 값비싼 명동에 ‘문화인들의 아지트’가 있었다. 바로 ‘은성’이라는 주점이었다.

천상병 변영로 박인환 이중섭 나애심 현인 오상순 모윤석 김환기… 20여 평의 목조건물 ‘은성’에는 지금 ‘위인전’이나 ‘교과서’에서 만날 수 있는 이들의 젊은 시절 단골이었다. 이들이 ‘은성’을 부담없이 드나든 것은, 주머니 얇은 그들을 위한 ‘외상’이 가능했기 때문.

그러나 ‘외상 장부’에는 이들의 이름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홍길동, 사과, 홍두깨’ 같은 낯익지만 낯선 이름들뿐이다. 알고 보니 주인이 예술인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자신만 아는 예명으로 표기했던 것.

명동 지승룡
▲명동백작 속 주점 ‘은성’에서 만난 지승룡 소장은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 오랜 시간 탐구하는 것을 즐긴다”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
1973년까지 이 주점을 운영했던 이는 배우 최불암의 모친 이명숙 여사였다. 이 여사는 명동에 오는 ‘다다이스트’들을 위해 부지런히 김치를 만들었다고 한다. 가난한 청년 예술인들에게 유일한 안줏거리였기 때문으로, ‘한국인의 밥상’ 진행자였던 최불암은 막걸리에 김치 안주를 곁들이게 된 것이 이때부터였다고 소개한다.

그 시절 따뜻했던 주점 ‘은성’을 뜻밖에 2023년 오늘 명동 거리에서도 만날 수 있다. 명동 한구석에 위치한 음식점 ‘명동백작’ 안영환 대표가 지하층에 ‘은성’을 재현해 놓은 것. 최불암은 SBS ‘집사부일체’ 방송에서 출연진들을 그곳에서 만나기도 했다. 지승룡 소장은 “알고 보니 최불암 선생님은 크리스천”이라는 말도 곁들였다. 최불암은 책에 추천사도 남겼다.

‘은성’의 이명숙 여사처럼 가난한 예술인들을 위한 공간을 만든 동방살롱 김동근 사장의 이야기도 들어있다. 여기에 지승룡 소장은 오비스캐빈과 세시봉, 영화 <무진기행>과 <헤어질 결심> 등으로 이야기를 종횡무진 이어간다.

명동 지승룡
▲명동에 이런 곳이? 명동의 한 뒷골목 풍경. ⓒ이대웅 기자
이렇듯 책에는 명동 곳곳의 비사(秘史)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는 지승룡 소장이 모두 발품을 팔아 직접 보고 들은 ‘귀납법적 스토리텔링’이다. 오랜 기간 명동 일대를 집중 촬영했던 임웅식 작가의 다양한 사진들은 독자들의 추억여행에 이정표를 새겨준다.

여기에 ‘문제를 두려워하는 것은 문제에 답이 없다는 결론 때문이다’, ‘하수는 재개발하고 고수는 재발견한다’ 등 그 시절 ‘민들레영토’로 최첨단 문화를 창조했던 지승룡 소장만의 통찰력과 독특한 시각이 곳곳에 스며들어 ‘읽는 맛’이 있다. 그리고 화려한 조명 뒤, 명동의 뒷골목은 아직도 걸을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