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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행전 5장 17-32절


학습된 무기력

2011년 9월, SBS에서 방영하는 ‘동물농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아주 흥미로운 사례가 소개가 되었습니다. 한 농가의 창고에서 야생 수리부엉이 한 마리가 발견되었는데, 상처를 입었는지 날아가지 못한 채 창고 구석에 숨어 있었습니다. 비록 날 수 없어 숨어 있었지만 야생성이 남아 있어, 사람이 다가가면 격렬히 공격했습니다.

집주인은 부엉이를 가엽게 여겨 꼬챙이에 고기를 끼워서 주었습니다. 원래 맹금류인 야생 수리부엉이는 사람이 주는 먹이를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부엉이는 배가 고파서 그런지 꼬챙이에 끼운 고기를 잘 받아먹었습니다.

얼마 후 야생동물 보호소 직원이 와서 부엉이를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부엉이가 완치 되자, 수의사는 하늘로 날려 보내려고 했습니다.

부엉이는 날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다시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몇 차례 더 시도하자, 부엉이는 수의사에게 난폭하게 굴면서 날지 않고 그 품 속에 남아 있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수의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덫에 걸려 입은 상처도 다 치료 되었는데, 날지 못하는 게 이상하네요.”

수리부엉이가 왜 상처가 치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날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보면서 인지과학자인 박경숙 박사는 ‘학습된 무기력’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야생 부엉이에게 덫에 걸린 일은 그의 생에서 가장 큰 재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엉이는 덫에서 힘겹게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몸과 마음에 큰 상처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깊은 트라우마가 생겼고, 날고자 하는 의지마저 상실했습니다. 이런 무기력은 사람에게도 나타납니다.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면 무기력해 진다

‘귀차니즘(Gwichanis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사가 귀찮아서 게으름 피우는 현상이 고착화된 상태를 말하는 인터넷 신조어입니다. 이 말은 우리나라 말 ‘귀찮-’이라는 어간에 ‘행위, 상태, 특징, ~주의’의 뜻을 가진 추상명사로 만들어 주는 영어 접미사인 ‘-ism’을 붙여 만든 신조어입니다.

한때 이 말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널리 퍼졌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만사를 귀찮게 여기고 게으름을 피우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무기력 때문입니다.

미국 정신과 의사인 프랭크 미너스 박사는 상담을 통해 심리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무기력증 환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무기력한 사람들은 육체적, 정서적으로 탈진한 상태다. 그들은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느끼고 지인과 사회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려고 하며, 감정적인 허탈감에서 수반되는 정신적인 고통을 느낀다.

이러한 증상이 타인을 무시하거나 부정적으로 대하게 만든다. 누군가 나서서 도와주려고 해도,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라며 고집을 부리고, 결국 혼자 고립되고 만다.”

미너스 박사는 무기력을 치료하지 않으면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무기력과 우울증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무기력하기 때문에 우울증이 나타나고, 우울하기 때문에 무기력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이 무기력해지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니까, 무기력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삶의 방향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러 방향이 있지 않습니까? 때문에 삶의 방향도 제대로 된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잘못된 삶의 방향을 잡으면 그 인생은 더 망치게 됩니다.

미쳐야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

‘팔방미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못하는 것이 없이 이것저것 모두를 잘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팔방미인의 단점은 무엇일까요? 다양하게 잘 하는 것이 많지만, 한 분야에 탁월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탁월하지 않으면 살아남기가 싶지 않은 시대입니다. 무한경쟁 시대에 남들과 똑같아서는 살아남기가 힘이 듭니다. 탁월하려고 하면, 한 방향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박제가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분야에서 독보적인 프로패셔널이 되려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 제 정신이 아니군!’이란 말을 들을 만큼 미쳐야 한다.” 미친다는 것은 열정과 신념을 가지고 어떤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살아계실 때 ‘광인론’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옥 목사님은 목사는 목회에 미쳐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미쳐야 뭔가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친다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것에 기웃거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 나갈 때, 무엇인가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향은 예수라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하는 한 방향의 삶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삶입니다. 직업이 다르고 삶의 스타일이 다르고 환경이 다를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방향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 우리의 삶의 방향이 예수 그리스도여야 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로마서 14장 8절에서 그 이유를 명확하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바울은 우리 삶의 방향이 예수님이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기에, 나의 삶의 이유도 주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사도들을 구해주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신 이후 사도들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고,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기적도 행하였습니다.

그러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시작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이 난리가 났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대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기득권이 흔들릴 수 있다는 위협을 느꼈고, 부흥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시기심이 생긴 것입니다.

이들은 사도들을 다시 잡아 옥에 가둡니다. 사도들은 얼마 전 공회 앞에 잡혀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풀려나기는 했는데, 벌써 두 번째 잡혀오니 어쩌면 그들의 마음 가운데 ‘이제 죽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지난번 종교 지도자들이 풀어줄 때 “다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 말라”고 경고를 했는데, 그 일로 다시 잡혀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사도들을 감옥에 가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상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의 사자가 밤에 감옥에서 사도들을 끌어내 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은 그냥 죽게 두셨지만, 사도들은 천사를 통해 구해주고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사명은 십자가에 죽는 것이기 때문에 구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의 사명은 예수님대신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었기에, 주의 천사를 통해 구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천사가 사도들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 성전에 서서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가서 성전에서 지금까지 하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잡혀온 제자들

대제사장은 사도들이 감옥에서 나온 사실도 모른 채, 사도들을 심문하여 죽일 궁리를 찾기 위해 공회원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들을 잡아오라고 말합니다.

경비원들이 감옥에 가 보니, 사도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감옥 문도 든든하게 잠겨 있고 감옥 문을 지키는 사람도 그대로 서 있었는데, 감옥 안에는 사도들이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제사장은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대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와서 알려주기를 감옥에 있어야 할 사도들이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경비대장은 부하들을 이끌고 가서 그들을 잡아 공회 앞에 세우게 됩니다.

사도들은 오직 예수님을 향해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천사들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빠져나오면서, 얼마나 더 큰 확신을 가졌겠습니까? 죽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천사가 구해주고 생명의 말씀을 가서 전하라고 하니 더 큰 확신이 생깁니다. 더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성도들은 예수님께 한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주님을 향해 한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면 다 주님을 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 마음의 방향은 주님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향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이 동일하다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도 주님을 향해 한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모든 성도의 삶의 방향이 예수님께 향하지 않으면, 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지도 못합니다.

힘은 하나로 모아질 때 나옵니다. 방향이 같으면 힘이 모아집니다. 어렸을 때 돋보기를 가지고 불장난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돋보기를 가지고 태양의 열을 한 곳으로 모으면 그 초점에서 불이 납니다. 한 곳으로 열을 모으니까 불이 납니다.

돋보기의 초점이 흐려지면 열을 한 곳으로 모을 수가 없기 때문에, 불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주님을 향한 한 방향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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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나침반이다

세계 최대 사하라 사막을 종단한 스티브 도나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사막을 종단하면서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습니다. 그는 이 사막 여행에서 체득한 기술을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이라는 책에 담았습니다.

도나휴가 말하는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 중 가장 중요한 첫째 방법은 ‘지도가 아닌 나침반을 따라가라’입니다. 끊임없이 상황이 변하는 모래 사막에서는, 지도가 아니라 나침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사막과 같은 곳입니다. 그 환경이 언제 바뀔지 모릅니다.

얼마 전 팔공산을 갔다 오면서 연경 지구 쪽으로 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연경 지구 쪽에 아파트가 건설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처음으로 그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지나가면서 보니 예전하고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직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지만, 저는 다른 곳인 줄 알았습니다. 수시로 변화는 환경 가운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필요한 것은 나침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침반은 늘 한 방향만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바뀌어도 나침반의 방향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나침반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방향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엉뚱한 길로 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나침반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다시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문제는 항상 주님께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변함 없이 그 자리에게 계시면서 방향을 분명히 잡아 주시는데, 우리가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미로와 미궁의 차이

미로와 미궁은 차이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미궁에 빠진다’라는 말 때문에 미로와 미궁을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미궁에 빠진다’고 할 때, 미궁은 어떤 왕궁을 의미합니다. 진짜 미궁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기력이다>는 책에서, 미로와 미궁을 확실하게 구분해 놓았습니다. 미로가 길을 잃도록 만들어졌다면, 미궁은 길을 찾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미궁은 ‘라비린스’라고 합니다. 4,000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나선형 보행코스를 말합니다. 혹시 텔레비전에서나 직접 병원에 가서 병원 광장에 그려진 미궁을 따라 환자들이 걷고 있는 모습을 보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미궁의 핵심은 반드시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미궁의 특징은 입구와 출구가 동일합니다. 미궁은 입구로 들어가 길을 따라 중심으로 이동한 뒤 중심에서 다시 되돌아 나오는 구조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들어가기만 하면 반드시 나올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미로는 입구와 출구가 다릅니다. 미로란 어지럽게 구획된 통로가 얽혀 있는 곳으로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미로는 만들 때부터 길을 잃어버리기 쉽게 제작하였습니다. 미로에 들어선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길을 찾습니다.

마귀는 우리 삶이 미로라고 속삭입니다. 길을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길을 찾을 수 없기에 되는대로 살면 된다고 합니다.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미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드시 길이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미로가운데 헤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길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방향을 잡았다면, 그 방향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우리는 예수를 향한 방향을 잡는데 그쳐선 안 됩니다. 방향만 잡았다 해서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방향을 잡았다면, 그 방향을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을 향해 걸어간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마음이 주님을 향해 있을 뿐 아니라 기꺼이 주님의 사자를 통해 말씀하신 대로 성전에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정말 한 방향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방향을 설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바로 주님을 향한 한 방향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담대한 사도들

사도들은 이렇게 한 방향의 삶을 살다가, 다시 공회 앞에 잡혀왔습니다. 공회 앞에서 서 있는 사도들에게 대제사장은 묻습니다. 공회 앞에 서 있는 사도들에게 대제사장이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어떤 질문일까요?

“감옥의 문은 그대로 잠겨 있었고 감옥을 지키는 사람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는데, 너희가 어떻게 감옥을 빠져 나갔느냐?” 이 질문을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대제사장은 이 질문을 하지 않고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어찌 너희는 지난번에 잡혀왔을 때 다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히 명령하였건만 왜 계속 가르치고 있느냐? 너희가 지금 우리를 예수를 죽인 살인자로 만들고자 함이냐?”

왜 대제사장은 감옥을 어떻게 빠졌나갔느냐에 대한 질문을 먼저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이들은 두려웠던 것입니다. 만일 정말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행하셨다고 하면,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사도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대제사장의 질문을 듣고 담대하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이 대답 속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당신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당신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신 사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당신들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하는데,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실제로 예수님을 죽인 것 맞지 않느냐 하지만, 그 예수님을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살리시고 그를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다. 바로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다.”

사도들의 이 말에 그들은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사도들이 말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가슴 뛰게 하는 사도들

지금 사도들의 입장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들은 이미 한 번 경고를 받았습니다. 천사가 감옥에서 구해 주었지만, 공회원들이 보았을 때는 탈옥한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 무척 화가 나 있습니다. 이들에게 사도들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들은 당신들이 예수님 죽인 것 맞지 않냐고 하면서,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대제사장의 말을 듣는 것이 사도들이 사는 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것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주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심장이 뛰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의 마음에 감동이 밀려오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의 말에도 잘 순종해야 합니다. 특히 부모님 말씀에 잘 순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말은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사람의 말을 따라야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야 하느냐의 문제에 있어서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때론 하나님의 말씀이 내 경험과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순종해야 합니다.

진짜 순종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하나님이 하라고 하셔서 할 때, 순종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루 한 바퀴씩 여리고 성을 돌고,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며 소리를 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리고 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대신 소리를 지르기 전까지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침묵으로 성을 돌라고 하셨습니다.

여리고 성은 이중 성벽으로 되어 있는 성이였습니다. 철옹성이라 불리는 성이었습니다. 이런 여리고 성이 그냥 돌기만 하고 소리 지른다고 무너지겠습니까?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고,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순종했을 때 여리고 성은 무너졌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감동시킵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성경을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조건 우리에게 복 주시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If’가 붙습니다. 뭐뭐 하면,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어떤 의미입니까? 불순종하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해서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복을 그냥 주십니다. 복은 사은품입니다.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시는 사은품이 복입니다.

우리는 한 방향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한 방향은 주님을 향한 방향이어야 합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세상이 미로라고 하면서 길이 없다고 방향을 잡을 수 없다고 속삭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자신이 나침반이요 길이라고 하시면서 나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잘못된 길로 갔을지라도, 주님을 다시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곧 주님의 말씀의 순종해야 합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 ⓒ크투 DB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감사인생(공저)’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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