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포레스트
▲‘소확행’을 보여주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
본문: 전도서 6장 1-6절


코로나 블루

코로나19 이후에 생겨난 신조어 중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있습니다. ‘코로나 블루’는 코로나19와 우울감(blue)이 합쳐진 단어인데요. 코로나19 확산으로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면서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을 뜻합니다.

코로나19 이후, 우리는 일상의 삶을 예전처럼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함께 모여 마음놓고 식사를 할 수 없습니다. 가고 싶은 곳도 마음대로 갈 수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마음 놓고 만날 수 없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마음껏 할 수가 없습니다.

만연해진 감염 위기로, 자신이나 가족이 감염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습니다. 경제 활동이 붕괴됨으로 인해 어려움이 닥치지 않을까 하는 간접적인 불안감도 있습니다. 또 감염 사태가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에서 재확산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을 까요?

환경 때문에 행복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2015년 대한민국 홍보 연합 동아리인 ‘생존경쟁’에서 20대 대학생 2,015명을 대상으로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사용한 신조어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1위는 31%를 얻은 ‘금수저’입니다. 금수저는 부유한 부모 아래 자라 경쟁 사회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사람이나 계층을 풍자하는 단어입니다. 금수저의 반대는 '흙수저'입니다.

2위는 23.8%를 얻은 ‘헬조선’입니다. 헬조선은 한국사회를 지옥처럼 혹독하다고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3위는 12.8%를 얻은 'N포세대'입니다. N포세대란 취업이나 결혼 등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세대라는 뜻입니다.

이 순위를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대학생들이 ‘희망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이런 환경 가운데 살아가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환경 자체가 어려우면 사람은 행복할 수 없는 것일까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환경 때문일까요? 만일 환경 때문이라면 우리는 그런 환경을 만든 나라와 사람들을 원망하며 불행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환경이 우리의 행복의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환경 때문에 우리의 행복이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연세대 심리학과 서은국 교수가 조사 한 바에 의하면, 한국인이 하루 동안 가장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는 행위는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첫째, 먹을 때입니다. 둘째, 대화할 때입니다.

곧 한국인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대화하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느낀다는 것입니다. 한국인만 그렇겠습니까? 이것은 코로나19 상황 가운데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행복하지 못한 이유

사람이 정말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나보다 더 많은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잘났어도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있습니다. 기는 놈 위에 뛰는 놈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습니다. 행복은 비교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둘째, 욕심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얼마의 돈이 있으면 행복하시겠습니까? 얼마나 큰 집에서 사시면 행복하시겠습니까? 얼마나 좋은 차를 타시면 행복하시겠습니까?

강경화 외교부 장관 남편이 코로나19 상황가운데 요트 구입을 위해 미국 여행을 떠난 것으로 인해 말이 많았습니다. 강경화 장관과 남편이 사는 외교부 장관 공관은 4,000평에 달하는 부지에 건물 면적만도 400평이 넘는다고 합니다.

강경화 장관 남편은 그곳이 답답하고 힘들다고 합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 욕심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욕심을 내려놓지 않으면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복은 나에게 달려 있다

내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닙니다. 그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행복은 환경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 때문도 아닙니다. 행복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행복은 셀프』라는 책을 쓴 김영묵 씨는 늦은 나이로 동부화재에 입사해 30년 동안 근무하면서 행복이라는 화두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는 매일 같이 세계적인 철학자와 경제학자, 시인, 소설가, 사상가 등의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길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스승들을 통해 행복을 갖기 위한 비밀을 알아냈습니다.

그가 알아낸 비밀은 행복이란 결코 특별하지도 않고, 특별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거대한 무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돈으로도 살 수 없고, 권력으로도 살 수 없는 행복이라는 실체는 누구나 가질 수 있고 이미 가지고 있는 평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곧 행복은 환경에 의해, 그 누구에 의해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셀프’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연세대학교 서은국 교수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은 나를 세상에 증명하는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잣대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필요도 없고, 누구와 우위를 매길 수도 없는 지극히 사적인 경험이 행복이다.

내가 에스프레소가 좋은 이유를 남에게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고, 그들의 허락이나 인정을 받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타인이 모든 판단 기준이 되면, 내 행복마저도 왠지 남들로부터 인정받아야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행복의 본질이 뒤바뀌는 것이다.”

행복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허락받을 필요도 없고 인정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나 스스로 행복하면 됩니다.

행복은 셀프다

하나님께서는 지혜의 왕 솔로몬을 통해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솔로몬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이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2절에 한 사람의 예를 먼저 듭니다. 이 사람은 부와 재산과 명예를 하나님께로부터 다 받았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그 사람으로 즐기지 못하게 하시고 엉뚱한 사람들이 즐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그 사람에게 뭔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불행입니다.

솔로몬은 3절에서 두 번째 사람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새번역성경에는 3절 말씀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자녀를 백 명이나 낳고 오랫동안 살았다고 하자. 그가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 재산으로 즐거움을 누리지도 못하고, 죽은 다음에 제대로 묻히지도 못한다면, 차라리 태어날 때에, 죽어서 나온 아이가 그 사람보다 더 낫다(전 6:3)”.

유대인들이 복으로 여기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돈 많은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오래 사는 것입니다. 셋째, 많은 자식을 거느리는 것입니다. 3절은 이 세 가지를 다 가진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이것으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죽고 난 이후에는 제대로 장사도 치러지지가 않았습니다. 결국 이 사람의 욕심이 이런 인생을 만든 것입니다. 이런 사람 보다 솔로몬은 낙태된 사람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조건만 보면 솔로몬이 예를 든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행복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죽음을 맞이했으니, 불행한 사람으로 묘사될 수가 밖에 없습니다.

삼성그룹 설립자인 이병철 회장은 작고하기 얼마 전 의료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1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1년만 더 살게 되면 그동안 내가 할 일이 있소, 나는 지금까지 돈을 모으는 데는 성공했지만, 돈을 돈답게 써보지 못하고 이 자리까지 왔소. 1년만 더 살면 멋지게 쓰다가 죽겠소.”

이병철 회장은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결국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하는 의도는 어떤 조건이 우리의 행복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셀프라는 말씀입니다.

나만의 기준을 세워라

행복이 누구에게나 셀프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 나만의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행복의 기준은 내가 세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세워 놓은 기준에 맞출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바울은 풍부함 가운데 있을 때도 궁핍함 가운데 있을 때도,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풍부함 가운데 있을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 자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궁핍함 가운데 자족하기란 어렵습니다.

바울이 궁핍한 가운데도 자족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만의 기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다른 사람 보기에 불쌍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자기만의 기준이 있기에 만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족한 삶이 곧 행복한 삶 아닙니까? 우리에게도 나만의 기준이 있다면 자족하게 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300년경, 로마 집정관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각자 행복의 대장장이다.” 대장장이는 자기 마음대로 농기구를 만들기도 하고 칼과 창을 만들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각자의 행복을 만들어가는 대장장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소확행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소확행이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의미합니다. 곧 별볼 일 없는 것 같지만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상 속에서 느껴지는 작은 행복감을 의미합니다.

한 대학생이 자신의 소확행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혼자 살기에 부모님이 차려주는 근사한 밥상을 받기는 어렵다. 편의점에 가서 도시락을 하나 사고, 국 대신 작은 컵라면을, 부족한 영양소를 보충하기 위해 편의점 샐러드와 어묵꼬치를 추가한다. 나만의 작은 트레이 위에 이 모든 것을 차려놓으면 그럴듯한 한 끼 식사가 완성된다. 이것이 나의 ‘소확행’이다.”

남들이 보면 편의점 음식으로 한 끼 식사를 하는 것이 뭐 그렇게 행복해 보이겠습니까? 하지만 이 대학생에게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인 것입니다. 소확행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가지는 행복이 아닙니다. 나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행복의 기준을 너무나 높게 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행복의 기준을 높게 잡으면 그것에 도달해야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행복을 느끼는 빈도가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은 강도보다 빈도가 중요합니다. 행복의 기준을 우리가 낮추면 낮출수록 우리는 더 많은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행복을 찾으라

둘째, 스스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옛날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가면 빠지지 않는 것이 보물찾기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늘 보물을 잘 못 찾았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은 학생들 몰래 보물을 숨겨놓습니다.

보물은 눈에 잘 띄는 곳에 숨겨두지 않습니다. 눈에 잘 띄는 데 숨겨두면 그것은 보물찾기가 아니지요. 또한 학생들 숫자만큼 보물을 다 숨겨놓지도 않습니다. 보물을 꼭꼭 숨겨놓았기 때문에, 학생들이 열심히 보물을 찾아야 찾을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다가 보물을 얻으려 한다면, 그것은 욕심에 불과합니다.

행복을 찾는 것도 보물찾기와 같습니다. 우리가 찾으려 하지 않으면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마 7: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일반 보물찾기와 행복 보물찾기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일반 보물찾기는 학생 숫자만큼 보물을 숨겨 놓지 않았지만, 행복 보물찾기는 모든 사람이 다 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무궁무진하게 숨겨 놓으셨습니다.

또한 일반 보물찾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행복 보물찾기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충분히 다 찾을 수 있습니다. 행복은 내게 없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있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작은 보물들을 우리가 찾아낼 때 감사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학창 시절 네잎 클로버를 찾으려 혈안이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네잎 클로버는 꽃말처럼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네잎 클로버를 찾다 보면, 주위에 있는 세잎 클로버를 발로 밟아 뭉개는 경우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세잎 클로버의 꽃말이 무엇입니까? 행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운을 찾기 위해, 일상의 행복을 짓밟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행운을 잡으려고 하는 것도 행복하기 위한 것인데, 이미 주어진 행복을 밟아 버리고 행운을 잡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행복한 삶은 셀프입니다’라는 글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 어떤 삶일지라도 당신의 삶을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자신을 지키는 힘이며 사랑한 만큼 배가되는 행복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의 삶에도 고난과 역경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냥 피어있는 인생이지 마십시오. 마지못해 살아가는 삶이지 마십시오. 행복은 작은 미소로부터 시작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채울 수 있는 덕목으로 살아간다면 즐거움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찾으십시오. 행복한 삶은 셀프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찾다 보면 우리는 일상 가운데 많은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건강한 몸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걸을 수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먹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가족이 옆에 있다는 자체가 행복입니다. 호흡할 수 있음이 행복입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큰 행복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33장 29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이 말씀은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광야 2세대들을 향해 선포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구원을 너희 같이 얻은 백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모세는 말씀합니다. 곧 너희는 여호와의 구원받은 백성이기에 행복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아직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한 채, 모압평지에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복할 조건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너희가 구원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 사실 하나만 날마다 되새기고 살아도, 행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행복의 파랑새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을 찾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나누라

셋째,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 가운데 사역을 하시면서 다 주고 가셨습니다.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생명마저 주고 가셨습니다.

받는 것도 기쁨이 큰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생각지 못한 깜짝 선물을 받을 때 기쁨을 넘어 감동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받는 기쁨도 크지만 주는 기쁨이 훨씬 더 큽니다.

tvN 예능 프로그램인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추석 명절 특집으로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 나왔습니다. 그녀는 서울대 법대 출신이지만, 카이스트에 무려 766억 원을 기부해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수영 회장은 어렸을 적 동네 사람들을 도와주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자신도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사회에 환원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과학 발전과 국력에 대한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서남표 카이스트 전 총장의 연설을 들었다”면서 카이스트에 거액을 기부한 의도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삼성전자가 벌어들이는 돈이 연간 국민소득의 20%입니다. 거기에 카이스트 출신 직원이 20%입니다. 카이스트 학생을 키우는 것이 곧 국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렇게 큰돈을 기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수영 회장은 나눔으로 얻게 되는 행복을 알기에 이렇게 나누는 것입니다.

여운이라는 분이 ‘최고의 선물’이라는 책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이 세상에 나누지 못할 만큼 가난은 없다. 행복을 위해 양손에 더 많은 것을 움켜쥐는 것도 좋지만, 한 손 쯤은 남을 위해 비울 줄도 알아야 한다.

나누고 난 빈손엔 더 큰 행복이 채워진다. 움켜진 손은 누군가에게 빼앗길 수도 있지만 빈손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따뜻한 손은 빈손이다.”

우리나라 옛 속담에도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나눔으로 얻게 되는 행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콩 한쪽도 나누어 먹으려고 했습니다.

많이 가졌다고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적게 가졌다고 나누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나눌 수 있습니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잠시 맡겨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나눌 수 있습니다. 나누는 빈손에 하나님께서는 더 큰 행복으로 채워주십니다.

우리는 나눈다고 생각하면 단순히 물질적 나눔만을 생각합니다. 물론 물질로도 나누어야 합니다. 이 땅에 소외되고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물질로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나누는 것은 훨씬 폭이 넓습니다. 이웃을 향해 따뜻한 말, 격려의 말, 위로의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가지고 이웃을 돕는 것도 나누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나누는 것입니다. 이웃과 슬픔을 함께 하고 기쁨을 함께 하는 것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이웃과 나누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 저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그 어떤 행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행복의 시작이요 마침표다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행복이 누구에게나 셀프라고 해도, 행복의 뿌리는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내가 행복의 기준을 세우는 것도 예수님께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행복을 찾는 것도 예수님께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나누는 것도 예수님께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 없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곧 예수님이 우리의 행복의 시작이요 마침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를 비롯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상황과 환경만을 바라보면 우리는 행복할 조건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불평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상황과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행복은 누구에게나 셀프입니다. 행복이 셀프이기에 다른 사람이 세워놓은 기준이 아니라 내가 기준을 세우고 행복하면 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행복들을 찾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것을 나누면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을 예수님께 뿌리를 둔다면,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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