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3: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3: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3: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3: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장시환 새안교회
▲장시환 목사.
손이 마른 병자를 고치시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병은 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병자의 모습은 죄적 실존을 가리킵니다. 즉 단순히 육체적인 병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정황과 죄를 짓고 살아가는 일그러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 손 마른 병자의 모습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 말씀은 몇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르쳐줍니다.

첫째, 소유의 문제를 말합니다.

손이 마른, 손이 오그라들어 펴지 못하는 모습은 소유에만 집착해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병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적 실존, 본래 하나님 지으신 모습이 아닌 어그러진 추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고쳐야 할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움켜쥐려는 생각,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가지려는 생각들이 우리 안에 없습니까. 우리 안에 참으로 이기적인 소유욕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 삶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변화는 그들이 본래 손 마른 병자들 같았는데, 그들의 손을 펴게 해 주셨습니다.

하루하루 돈만 바라보고 그것만 움켜쥐고, 조금이라도 더 벌려고 하루 하루 살았던 삶이었는데, 그것을 비우고 내어주고 베풀 수 있는, 소유로부터 자유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손 마른 병자의 모습은 타락한 인간의 중요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누지 못하고, 베풀지 못하고,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내어놓지 못하는 삶. 우리 안에도 이런 모습이 얼마나 많습니까.

옛말에 쌀 99섬 가진 사람이 1섬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100섬을 만들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기적인 소유욕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런 우리 안의 소유욕이 거꾸로 발동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끝없이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베푸려는 삶이 된다면, 끝없이 주고 또 주고 계속 주려고 하는 자가 된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五餠二魚) 기적의 사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아이가 있어 그가 가진 작은 도시락 같은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5천명의 무리들을 위해 내어놓았습니다. 주님이 축사하시고 광야의 5천명의 사람들을 모두 배부르게 먹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2광주리까지 남게 되었습니다.

한 아이가 내어놓은 그것이 그러했다면, 만일 거기 있는 모두 내어놓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온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 지으신 본래 모습으로 치유될 수 있는가? 변화될 수 있는가? 끊임없이 비우고 내어줄 수 있는 삶을 사는 인생으로 바뀔 수 있는가?’ 이런 성찰이 이뤄지길 원합니다.

요한복음 19장에서 십자가 위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마지막 남은 속옷, 통으로 짠 그 속옷까지 다 내어주시고 생명까지 우리를 위해 주시고 가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온 삶이었음을, 그 장면이 다 말해주는 것 아닙니까?

그 주님께서 지금 손 마른 환자를 고치십니다. 그런데 이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깨느냐 아니냐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병자의 손을 고치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그 율법보다 우선하는 것은, 그 병자에 대한 긍휼과 인애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으로 하루 벌어 하루 겨우 살아가는 사람에게, 손 마른 병은 생계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치명적인 어려움에 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주님께는 그런 자를 고치는 일이 그 무엇보다 시급했습니다. 이를 영적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소유에 집착하는 욕심, 이기적인 모습은 무엇입니까? 안식일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시급한 것이, 우리 안에 있는 죄적인 모습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원숭이를 쉽게 잡는 방법이 있습니다. 나무에 바나나처럼 원숭이가 좋아하는 과일을 넣어두고 자루에 매달아 놓고, 입구를 손만 겨우 들어갈 수 있게 열어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숭이는 그 과일을 집으려고 손을 넣었다가, 자루에서 손을 빼지 못합니다. 그 과일을 쥔 손만 놓으면 뺄 수 있는데, 놓지 않아서 손을 빼지 못하고 결국 온 몸이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것만 놓으면 온 몸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도 조금만 놓으면, 조금만 비우면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조그만 것을 움켜쥐려고 온 삶이 매이고 갇혀서 살아가는 어리석은 모습이 많습니다. 인간은 물질의 노예, 환경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새안교회 한 성도님의 SNS 메시지 중 다음 글귀를 봤습니다. ‘환경이 사람을 바꾼다!’ 맞는 말입니다.

‘맹모삼천지교’ 를 아실 것입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교육하기 위해서 세 번 이사를 했습니다. 시장 근처에 집을 두었더니 아이가 장사 놀이를 하고, 장례식장 근처 집을 두었더니 장례 놀이를 했습니다. 글방 근처로 이사했더니 배움을 얻고 바르게 자라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환경이 중요합니다. 얼마 전 저희 교회 사무실도 페인트칠을 며칠 하고 가구도 바꿨더니, 여러분들이 놀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새로운 곳에서 일을 하면 마음가짐도 달라지고 능률도 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면을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환경이 사람을 바꾸지만, 인간은 그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환경을 다스리고 주관하는 자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지으시고 아담에게 그 모든 것을 다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물질에 매여 더 중요한 것을 못하게 되는, 그런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물질을 다스리고 그 물질이 내가 하는 일을 따라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 돈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돈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거꾸로 되면, 인간이 비인간화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이 인간 구실을 못하고 살게 됩니다. 이런 우리 안의 모습들이 오늘 본문 말씀 앞에 다 고침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새로운 인간이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에 매이지 않으셨고, 모든 것을 제압하고 다스리며 사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신 주님의 기적 이야기는 그런 깊은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그 주님을 본받아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닮아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이 사건이 가져다 주는 교훈은 ‘사명’에 관한 것입니다.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 ‘할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마른 손을 가진 사람은 무료한 일상에 빠져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놓치고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왜 일까요? 그 손으로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부패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일을 해야 할 때 하지 않고 방탕한 사회가 될 때 그러합니다. 얼마나 이 시대에 해야 할 일을 잃어버리고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에게 허락하신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잃어버리면 우리도 부패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저는 운동도 잘하고 나름대로 이것 저것 많은 일을 하고 삽니다. 그런데 제 손이 말랐다고요? 제가 왜 할일이 없겠습니까?”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군의 비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포도원은 천국 혹은 천국을 이뤄가는 그 현장을 의미합니다.

주인이 일꾼들을 불러 일을 시키고 삯을 주는데, 어떤 자들을 불렀나요? 장터에 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놀고 있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나름대로 직장 다니고 프리랜서로 일하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포도원에 관계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뜻을 이뤄가는 것과 무관한 삶을 사는 사람들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한다 해도 하나님 나라와 무관하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의 것들은 결국 다 썩어지고 사라집니다. 그것을 위해 왜 정열을 쏟아야 하겠습니까?

“너희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장)” 했습니다. 자기 삶을 점검해 보길 원합니다. 나는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고 있는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손이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수고(手苦)라는 한자를 보면, ‘손으로 하는 고생’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수고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수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면 우리 각자에게 두신 사명, 또 교회 공동체 안에 두신 사명을 늘 기억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고를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우리가 알고 그 사명을 좇아 산다면, 정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남는 일을 할 수 있음에, 그런 일을 주심에 감사해야합니다. 세상의 삶은 무료한 일들, 무의미한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 모르는, 그저 월급을 주니까 마지못해 시간 떼우기로, 킬링 타임(killing time)용으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쩌면 예수를 믿기 전, 사명을 알기 전 우리 삶도 그랬을지 모릅니다. 마치 손이 말라 아무것도 못하고 있던, 할 일 없어 놀고 있던 우리의 손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 우리의 손을 펴 주시고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동참하게 하시고, 그 영원한 것을 위해 일할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소중한 세계를 깊이 깨달으며, 감사와 열정으로 주께 헌신하는 새안교회 및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장시환 목사(서울 길음동 새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