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여왕의 박해로 옥스퍼드의 순교자들, 리들리와 라티머. 오른쪽 위는 감옥에 갇혀 있던 크랜머, 2년 후에 순교함.
▲메리 여왕의 박해로 옥스퍼드의 순교자들, 리들리와 라티머. 오른쪽 위는 감옥에 갇혀 있던 크랜머, 2년 후에 순교함.
김재성 박사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
자신이 담당한 글로스터 교구를 방문해서 현지의 형편을 파악하던 중, 후퍼는 중세 말기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이 얼마나 한심한가를 간파했다. 311명의 신부들에게 시험을 치렀는데 168명이 십계명을 외우지 못하였다. 31명은 성경 어느 부분에 나와 있는지를 말하지 못했다. 40명은 주기도문이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지도 말하지 못했다. 31명은 복음서의 저자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답변하지 못했다.

성직자 예복을 착용하는 것에 대해서 후퍼는 단호히 반대하였다. 성직자 예복이라는 것은 유대주의와 로마 가톨릭에서 시행했던 것으로, 초대교회 시대에는 착용했다는 근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크랜머와 리들리 등은 온건한 입장을 취하여 성복을 착용하였다. 더구나 버미글리와 부써도 역시 후퍼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종교개혁을 받아들였지만 많은 주교들이 여전히 세력을 갖고 있었기에 로마 가톨릭에서 오랫동안 해오던 방식에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 목사가 주어진 교구 목회자의 지위에 오르려면, 반드시 성직자 예복을 착용해야 한다는데 시행규정에 대해서 후퍼는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훗날 후퍼의 성직자 의복착용 문제는 “아디아포라”의 영역으로 간주하기로 결정되었다. “아디아포라”(adiaphora, things indifferent)는 성경에 직접적으로 명쾌하게 금지하거나 명령하는 사항들이 아니라고 하면, 굳이 어떤 원칙을 정하지 않는다는 원리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항에 대해서는 이렇게 결정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으로서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 경건한 성도로서 동물을 죽여서 만든 값비싼 가죽 옷을 입어도 되느냐는 것에 대한 결정 등이 “아디아포라”에 해당한다. 서로 비난하지 말고, 기독교인의 양심의 자유에 따라서 임의적인 선택사항으로 남겨두자는 결정이다.

초기 영국의 종교개혁에 있어서 후퍼의 영향력과 담대함은 큰 영향을 끼쳤다. 혹시라도 우리가 성복논쟁에만 집중한 나머지, 후퍼의 개혁신앙을 가볍게 취급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후퍼는 『그리스도와 그의 직분에 관한 선언』 (A Declaration of Christ and His Office, 1547), 『거룩한 십계명의 선언』 (A Declaration of Ten Holy Commandments, 1549, 1550), 『경건의 고백과 기독교인의 믿음의 항의』 A Godly Confession and Protestation of the Christian Faith, 1550) 등을 남겼다. 후퍼의 논문들에는 로마 가톨릭과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구원론이 자리하고 있다. 후퍼의 개혁사상은 멜랑톤의 『신학총론』과도 유사하다. 칭의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하며, 사람의 노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의 올바른 행동은 칭의를 가져오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종교개혁자들과 같이,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하면서도, 성도들의 윤리적 책임까지도 역시 강조했다. 1553년 메리 여왕이 취임하고 세상은 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복귀하자 체포되어서 수 년 동안 감옥에서도 타협을 거부하였다. 1559년 화체설을 부인한다는 죄목으로 화형을 당했다.

후퍼를 비롯하여 종교개혁에 가담한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무려 7천명이나 처형한 메리의 통치 5년 동안은(1553-1558)는 그야말로 끔찍했다. 개혁에 앞장을 섰던 중요한 지도자들이 순교를 하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간 세상에서 형식적으로 순응하는 척 했다. 후퍼는 1555년 2월 9일, 글라우케스터에서 이단으로 공개적으로 화형을 당했고, 존 로저스, 휴 라티머, 니콜라스 리들리, 마일스 커버데일 등이 순교했다. 여왕의 간교한 책략에 반대한 토마스 크랜머는 감옥에 있다가 1556년 화형을 당했다. 메리의 살벌한 통치 행위와 그에 맞서서 싸운 종교개혁자들의 고통은 1563년에 나온 폭스의 「순교사화」에 담겨있다. 이 책은 성경과 함께 가장 많이 읽혀진 책이 되었다. 휴 라티머, 니콜라스 리들리 등 지도자들이 순교했다. 메리는 스페인의 왕자와 결혼을 했고, 또한 스페인에서 건너온 로마 가톨릭 도미니크 수도회원들이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장악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생을 필두로 해서 천 여 명의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이 신대륙이나 유럽으로 망명을 떠나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들은 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 스트라스부르그, 스위스 제네바, 바젤 네델란드 여러 도시들에 머물렀는데, 수 년 내에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오게 되면서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청교도 운동을 일으키는 주요한 지도자들이 되었다. 존 낙스와 그의 동료들은 유럽에서 목격하고 터득한 대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철저한 종교개혁을 진행하였다. 낙스가 제네바의 칼빈에게서 전수받은 장로교회와 “당회”제도는 주교가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신약성경에 합당한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시편찬송은 유럽 모든 개혁주의 교회가 예배시간에 시행하고 있었기에, 영국으로 유입되었다. 예배시간이나 목회사역에서 그동안 습관처럼 시행되던 것들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게 되었고, 철저히 성경에 따르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메리 여왕의 완고함과 고집을 받드는 폴 추기경 휘하에서는 약 2천 여 명의 결혼한 사제들이 아내들과 헤어져야만 했고, 성상들이 다시 세워지고, 예복과 예식이 재구성되었다. 교회의 본당마다 제단이 화려하게 장식되고, 빵을 가져다가 놓은 성찬용 용기가 준비됐다. 메리가 암으로 사망하기까지 4년이 채 안 되는 통치기간에 무려 7천명을 죽인 일은 공포와 무자비한 시대를 웅변적으로 증언하여준다. 런던의 개혁주의 교회들은 비밀리에 집회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