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산상수훈은 한마디 한마디가 깊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불교신자나 진리를 찾는 불신자들도 산상수훈을 읽고 그 깊은 진리에 매료됩니다.

이방인들은 산상수훈을 읽고 그 깊은 진리를 알고 있다는 지식이 주는 즐거움에 도취되어 있을 때, 그리스도인은 산상수훈을 받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고민합니다.

왜냐하면 산상수훈의 내용은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을 '그 아버지의 자녀들' 로 명확하게 구별하여 가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들은 그 말씀을 지키는 게 당연하며 이방인은 그 말씀을 지키는 게 불가능합니다.

산상수훈의 강연 중에서 예수님은 먹고 사는 문제를 구하는 기도의 내용을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 오늘 하루 먹을 양식만 구하라는 것인가? 내일을 위해 예비하고 저장해 두어야지 지혜롭고 성실한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더구나 예수님은 쌓아두지 말라고 하십니다(마 6:19). 그것도 너희를 위하여 이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듣지고 보지도 못한 삶의 방식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들은 사는 방법이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니 눈을 밝히 떠서 그 나라를 보아야 합니다(마 6: 22~23).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과 통합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으니 오늘 하루 쓸 것만 구합니다.

그 믿음은 오늘 주시는 아버지가 내일도 한달 후도 십년 후도 동일하게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구할 것이 별것 아닌 사람은 그래도 건강한 사람입니다.

설마 오늘 하루 못 먹고 살까? 그런데 몸이 다쳐서 쓸 수 없는 사람이 하루 먹을 양식을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마음이 다친 사람이라면... 하루를 죽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 버티며 겨우 살아낸 사람에게 하루 일용할 양식은 절박할 수 있습니다.

약하고 병든 자들은 생명을 위해서 하루 일용할 양식을 구합니다. 예수님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것은 먹고 사는 문제를 믿음으로 생각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먹고 사는 문제를 내 능력과 수고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먹고사는 문제를 '믿음' 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세상은 먹고사는 문제를 위해서 고민하고 염려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아버지를 믿으니 염려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자녀가 무엇을 잘해서 주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의무로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아버지를 모르니까 염려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버지를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아버지를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은 구하는 것이 완전히 다릅니다. 아버지를 아는 그리스도인은 먼저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합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의무와 책임감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마 6:33). 이것을 믿으니 내일 일이 염려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

이영은 목사(서울 마라나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