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 목사(송현교회 부목사)
▲허경 목사(송현교회 부목사)
냉장고 속 음식도 부패할 수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만 있다고 모든 것이 거룩하고, 또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지 않다면, 교회도 부패하고 변질되어 더 이상 교회라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행4:32~35에서 교회가 추구해야 할 세 가지 모습을 먼저 찾아보았습니다. 첫째는 '믿는 무리'였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고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될 수 있었으며 어느 누구 하나 차별대우를 받거나 소외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모든 물건을 통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특정한 사람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으며, 모든 성도가 함께 나누고 베풀어 가난한 사람조차 존재하지 않는 축복의 장소였습니다. 셋째는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기에, 항상 그곳에는 거듭남의 기쁨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세교회는 이러한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들을 상실하게 되었고, 죽은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중세교회가 이렇게 된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 '교황수위권'때문입니다. 교황수위권은 마16:18을 통해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며 교황이 베드로의 계승자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요21:15~17을 통해 예수께서 모든 양을 베드로에게 맡겼으니 계승자인 교황의 말에 모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세교회에는 예수는 사라지고 교황만 남게 된 것이지요.

둘째는 '성직자의 부패'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사제나 수도사들에게 독신제도가 있었음에도 공공연하게 동거인을 두었고, 교황이나 추기경들은 동거인을 통해 얻게 된 사생아들을 고위직에 올려놓았습니다. 16세기 한 보고에 의하면 성직자들을 위한 전용 창녀촌이 있었다고 말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셋째로는 '성경과 성경해석의 교황 독점화' 때문입니다. 성경의 자국어 번역은 이단 활동으로 금지하였으며, 모여서 성경을 읽어서도 안 되며, 정해진 성직자만 가능하였습니다. 또한 교황이 성경에 대한 어떤 해석을 내놓아도 순종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넷째는 중세교회의 '재정적 수탈'때문입니다. 중세교회는 각종 종교세를 만들었고, 성직을 매매했으며, 무엇보다 비성경적인 연옥 교리를 교묘히 이용하여 면벌부를 판매한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면벌부를 사람들이 구입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배경이 있습니다.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 8차례나 있었던 십자군 전쟁과 1337년에서 1453년까지 116년 동안 계속됐던 영국과 프랑스간의 백년전쟁, 1315~1317년의 3년간의 기근과 1347~1349년 동안 있었던 흑사병의 출몰입니다. 이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 전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천 5백만명이 죽었다는 보고도 있으니 그 당시의 참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계속된 전쟁, 기근, 질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자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하였고 심판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급증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사람들을 돌보고 올바르게 이끌기보다 돈을 모으기 위해 연옥교리와 면벌부 판매에 더욱 집중하였으며 사람들은 면벌부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백 년간 계속됐던 교회의 타락에도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없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전에도 잘못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는 존 위클리프(1320~1384)가 있습니다. 위클리프는 영국 지주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았던 사람으로 옥스퍼드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리키게 됩니다.

그러면서 교황의 타락상을 알게 되자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 '교황의 권력에 대하여', '성찬에 대하여'라는 저서를 통해 교황을 비판하게 되었고, 라틴어성경의 영어 번역 작업에도 매진합니다. 그렇게 교회의 개혁을 외치다 1384년 사망하게 되고, 1415년에 있었던 콘스탄츠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결정되면서 위클리프의 무덤을 파헤쳐 유해를 다시 화형시키며 스위프트강에 뿌리게 됩니다.

둘째는 얀 후스입니다. 존 위클리프의 가르침과 저서를 통해 위클리프의 신앙관을 가지게 된 후스는 교황의 면벌부 판매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용서는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라 주장하지요. 그러던 중 교회는 1415년 콘스탄츠공의회에 출두한 얀 후스를 감옥에 가두고, 1415년에 끝까지 진리를 외치다 화형을 당하게 됩니다.

세 번째는 마틴 루터입니다. 마틴 루터는 생전에 "나는 얀 후스의 모든 가르침을 가르치고 고수해 왔습니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얀 후스의 신앙관을 따랐습니다. 그러면서 '95개조 반박문'을 통한 면벌부 판매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하였고, 만인제사장 교리를 강조하여 사제에 의한 고해성사 교리를 반박하였으며, '오직 믿음, 오직 말씀으로'라는 종교개혁 표지를 외치게 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종교개혁은 여러 사람의 희생과 헌신으로 얻어진 값진 결과물인 것입니다.

오늘날 개신교회들을 향한 사람들의 질타의 소리가 들립니다. 교회가 세속화 되었고, 물질을 밝히며, 목회자들 역시 성결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소리들에 귀만 막고 듣지 않을 것이 아니라 중세교회의 타락성과 모습을 생각하고, 종교개혁을 통한 교회개혁의 모습을 기억하여 오늘날의 교회의 잘못된 점들을 바로잡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종교개혁은 단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어야 할 교회의 사명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허경 목사(송현교회 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