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투데이 결혼정보 & 웨딩 박람회] 결혼과 성(姓)

크리스찬 러브 어드바이스

헌법재판소에서 혼인빙자간음죄는 위헌이라는 판결이 났습니다. 여성계는 환영의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하지만 우려가 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사람들이 올린 인터넷 댓글을 보면 혼전관계가 이미 만연하고 있는데 늦은 결정이다라는 의견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년 대비 이혼율이 올해에 58%나 증가한 것은 물론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고 여성의 경제적인 능력 신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혼전에 미리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이혼율이 많이 늘어난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아쉽게도 많은 크리스천 연예인들이 혼전에 임신을 하고 아이를 가진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보도를 볼 때 마음이 많이 안타깝습니다. 혹여나 청소년들이 무비판적으로 그런 행태를 받아들일까 우려가 됩니다. 우리나라의 성문화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결하고 아름다운 성문화로 다시 회복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이번 판결에 대해서 저는 혼전순결은 중요한 가치관이라고 생각하기에 이전에 작성했던 글을 다시 올려 봅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의견 바랍니다.

1. 서론

  아이젠하워 전기를 담은 영화가 있다. 그 영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이젠하워 장군이 2차대전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있을 때였다. 그의 부관은 영국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젊은 여성장교였다. 내일의 운명을 알 수 없는 격전지에서 생과 사의 고락을 함께 하며, 존경받는 탁월한 장군과 유능한 미모의 부관은 어느 틈에 흠모하는 사이가 된다. 어느 칠흙같이 어두운 밤 그들이 주둔한 전선은 돌연 적기의 집중포격을 받게 되었다. 혼란 속에서 사령관은 부관과 함께 그의 전용 벙커로 급히 대피했다. 캄캄한 밤, 단 둘만의 공간, 절박한 순간이 지나고 있었다. 사령관의 두 손은 아름다운 부관의 어깨에 얹혀졌다. 비밀의 장소에서 은밀한 일이 아무도 모르게 일어날 찰나였다.

  그러나 그 순간은 잠시... 그의 손은 천천히 거두어졌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처럼 냉철한 장군으로 되돌아갔다. 2차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개선장군이 된 아이젠하워 장군은 얼마 후 미 합중국 대통령이 되었다. 백악관에서 축하 리셉션이 열리던 날, 대통령의 눈은 군중 속에서 군복을 벗어버리고 연회복으로 아름답게 단장한 한 여인을 찾아냈다. 영국에서 날아온 그의 옛 부관이었다. 곁에 섰던 매미여사는 슬쩍 그 자리를 피해 주었다. 서서히 다가선 두 사람의 시선은 잠시 불꽃이 되었다. 말없이 마주 서 있었지만 그들의 눈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도 잠시, 그들은 다시 제각각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이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 영화는 너무 고전인가? 이 영화는 순결에 대해 우리 부모 세대들이 해주고 싶은 많은 이야기를 대신 해주고 있다. 아이젠하워 장군이 그 밤에 자신을 무섭게 절제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어둠 속에서도 은밀히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한 그가 품은 미래의 지도자에 대한 꿈이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되어, 그는 후일 부끄러움 없는 존경받는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은 순결을 지킬 수 있는 힘이다. 미래에 나를 사용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분 앞에 흠 없는 자로 서리라는 꿈이 있기에 절제의 힘이 나오는 것이다. 진실한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 절제할 줄 안다. 결혼 전이나 결혼 후에도! 자신과 상대방을 귀하게 여겨 지킬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도 믿음직한 사람이 될 것이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9, 11)

2. 본론

2.1 성욕은 더러운 욕심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욕을 선물로 주셨다. 성욕이 없으면 자식도 낳지 못하고 아주 문제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성욕 때문에 강간사건이 끊이질 않고 있다. 성이란 것은 종교는 물론이요 사회와 우리 인생 전반에 아주 중요한 것이다. 성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데 우리는 그것을 잘 누려야하며 또한 절제할 줄도 알아야한다. 그런데 실제적인 상황에 닥치면 어찌할 바를 모른다. 예를들면,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되면 스킨십을 어느 단계까지 진행시킬지 망설이게 된다. 조선시대 때는 남녀칠세 부동석이란 말이 있었고 수십년 전에는 솔직히 밖에서 여자남자가 팔짱끼고 다니기 힘들었다. 그러나 점점 그 한계는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 크리스천은 어디까지 해야 좋을까? 딱히 성경에 그 기준이 나와 있지 않아 다들 혼란 속에 빠져있다. 그래도 어디까지 일까 고민하는 사람은 다행이다. 아무 생각없이 정욕대로 사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특히나 남자들이 군대를 가게 되면 주로 욕이나 성적인 농담으로 군복무기간을 허송세월하게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라는 부정확한 성적 정보가 가치관 형성기에 있는 청소년과 청년들의 가치관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기독교적 가치관이 아닌 세상적인 가치관에 물들게 하고 있다.

2.2 거룩한 성으로의 회복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태초에 계획하신 남녀간의 성의 영역은 거룩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거룩함이 빛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가 오직 예수님과 사랑을 나누듯 마찬가지로 우린 한 사람만 사랑해야한다. 그리고 그 한사람을 위해 선물로서 순결을 간직해야 한다. 그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다른 사람이 먼저 풀어 보도록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호기심이 간다고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준비한 선물에 절대 손을 대면 안된다. 그것은 정말 큰 죄이다. 다른 사람 선물을 풀어보는 사람은 정말 무례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 사람은 가슴에 숯불을 안은 것처럼 큰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를 구하면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 하지만 죄 값은 치루어야 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밧세바를 범한 다윗도 벌을 받아 그 가문에 칼이 쉬지 않았고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윗은 큰 괴로움 속에 있었으며 아끼는 갓난 아기가 병으로 죽게 되었다. 육적인 순결을 잃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적인 순결을 잃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전신갑주를 입는 것이다.

 하나님은 혼전순결을 중요시하신다. 혼전순결은 이웃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과 결혼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싸워서 헤어지는 커플도 많고 심지어 결혼식장에서도 사이가 깨져서 헤어지는 커플도 많기 때문에 결혼할 사이라고 섹스를 한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내가 지금 사귀는 여자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될 여자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혼전순결은 이웃사랑을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을 존중하고 보호하고 사랑하는 참된 법인 것이다.

2.3 스킨쉽을 하면 할 수록 더 가까운 사이가 되는가?
많은 이성교제 가운데 있는 청년들은 큰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스킨쉽을 할 수록 서로 더 친근해 지고 가까워 진다는 것이다. 보통 흑심을 품은 남자들이 여자를 유린할 때 쓰는 속임수이기도 하다. 보통 크리스천들끼리 교제를 하게 되면 처음에는 서로를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더 하나님께 가까워지게 되길 원한다고들 한다. 그리고 서로 신앙안에서 함께 말씀을 나누고 기도로 서로를 세워주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신앙적인 면은 퇴색되고 세상의 연인들과 다름 없는 정욕에 이끌린 교제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무분별한 스킨쉽을 할 수록 서로의 몸은 가까워질지 모르나 서로의 영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되고 서로의 마음은 멀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서로 멀어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한번 육체적 접촉을 하게 되면 그 이후로는 이전에 나누었던 영적인 말씀 나눔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별로 할 일이 없게 되면 육체적인 탐닉에 빠지게 되며 결국은 서로의 영혼엔 무관심하게 되며 그 결과로 서로 시험에 들고 헤어지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결혼 전에는 손도 안 잡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다.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글이 너무나 길어지기에 여기서는 생략을 하고자 한다.

  물론 결혼 이후에는 육체접촉을 통해 더 가까와지고 친근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혼전의 육체 관계은 남녀사이가 가까워지기는 커녕 헤어지는 올무로 작용하게 된다. 욕망이 가득한 남자는 욕정의 눈으로 여자를 유혹하며 어리석은 여자는 쉽게 무너지고 많다. 남자는 육체적 접촉으로 더 친근해진다고 하면서 육체적 접촉을 피하면 “내 사랑을 못 믿는구나! 결혼을 할 것인데 어때! 남들 다하는데!”라고 하면서 심지어는 헤어질 수도 있다고 협박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어리숙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대로 다 넘어가게 된다. 그러한 여성들이 많기에, 아무리 여성운동이 일어나도, 남성들은 여성들을 우습게 여기고 상품이나 소유물 이상으로는 잘 바라보지 않는 것 같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경우에 말이다. 하나님 없는 세상적 가치관이란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하나님의 가치관은 남녀 관계없이 인격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사람을 바라보는 것인데, 세상적 가치관은 그 하나님의 핵심가치관을 우습게 무너뜨리고 인간을 쾌락의 도구로 삼는 것이다.

  교회를 다닌다고 모두 하나님의 가치관을 지닌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많은 자매들이 교회 다니는 청년은 쉽게 믿어버리고 만다. 믿음이 좋아 보이는 청년들을 쉽게 믿어버리고 무방비 상태로 지내다 큰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마저 떠나버리게 되는 경우도 많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다. 우린 청지기로서 우리의 몸을 잘 보존해야 한다. 몸은 우리의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만큼이나 우리의 몸도 귀한 것이며 순결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유혹에 몸을 팔지 말아야 한다. 영혼을 팔지 말아야 한다. 혹시나 결혼을 하더라도 그 결혼은 영적으로 불행하게 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행복이 언제까지 지속 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성적 논리도 인간의 다수결로 쉽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다수결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스럽고 따분하고 외롭더라도 좁은 길로 가야하는 주님의 제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2.4 스킨쉽의 단계별 의미에 대한 연구
필자는 오래전부터 크리스천의 스킨쉽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어디까지의 스킨쉽이 적절한 수준의 스킨쉽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필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스킨쉽은 단계별로 서로에 대한 약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각 단계에 담긴 의미와 약속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1) 손을 잡는 것은 서로 돕고 좋은 것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2) 어깨동무를 하는 것은 서로 힘든 점을 감당한다는 것을 뜻한다. 어깨는 무거운짐을 지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어깨동무를 한다는 것은 서로의 짐을 기꺼이 지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3) 포옹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던져 상대방을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서로를 자신의 몸으로 감싸 안기 때문이다. 커다란 철근이 떨어지는 공사장에서 자신의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아기를 안고 철근에 맞아 사망한 어머니의 대한 실제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4) 필자는 결혼하기 전까지는 키스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키스는 서로의 입을 맞추는 것이다. 입으로는 음식을 먹고 생명을 이어간다. 키스는 자신의 입을 상대방에게 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방의 입을 책임지겠다는 약속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키스를 하는 사이라면 자신이 일을 하고 땀을 흘려 상대방을 먹여 살려야 할 것이다. 그런 관계라면 당연히 연애하는 사이가 아닌 결혼한 사이여야 성립하기 때문이다. 또한 남자들은 (폐쇄적인 공간에서) 키스를 할 때 입만 맞추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손도 함께 움직여 여자의 몸을 만지게 되는 경우가 많고 성욕에 불을 질러 주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사고를 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5) 애무(페팅)는 서로의 몸을 자신이 주관하는 것이다. 이것은 너는 내 것이요. 나는 너의 것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부부일심동체라는 말이 있듯이 부부의 관계에서만 애무는 허용되는 것이다.

6) 섹스는 두 몸이 한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온 몸을 던지겠다는 헌신의 약속을 하는 것이다. 또한 섹스는 단순히 육체의 결합이 아니다. 영의 결합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기반을 두고 서로에게 힘을 더해주는 가벼운 스킨십을 서로의 동의하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격려와 위로의 스킨십 말이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이성을 착취하고 이용해먹는 스킨십을 상처를 주게 된다. 상대방에게도 상처를 주지만 나의 영혼에 큰 상처를 주게 된다. 세상 것을 계속 찾게하며 머리속에 이후에 배우자와 성관계를 가져도 옛 애인이 생각난다.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다. 죄책감에 쌓이게 된다. 정신적인 괴로움을 겪게 된다. 남에게 상처를 주면 나도 그만한 상처를 언젠가 받게 되어있고 괴로움을 겪게 된다. 심는대로 거두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나의 가정과 나의 자녀가 잘못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음행하지 말라고 하였다. 음행은 영어로 ‘sexual immorality’이다. 성적 부도덕인 것이다. 곧 결혼 외에 섹스를 하는 것이다. 심는대로 거둔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우리는 마음대로 산다면 후에 어떤 안좋은 짝을 만나 결혼을 해도 우린 하나님께 핑계하지 못 할 것이다.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무덤을 자신이 파는 우를 범하지 말자.

  기독교는 우리를 성적으로 억압하는 종교가 아니다. 예를 들어 내일이 시험인데 난 시험에 얽매이기 싫고 "자유"하고 싶기에 시험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진정 자유하지 못할 것이다. 시험성적에 대한 불안에 또 다시 얽매여 평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라는 말씀처럼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쾌락도 아니요 세상의 어떤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인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법 안에서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법을 벗어난 자유는 방종이며 지속되지 않는다.

3.결론
우리는 지정의가 조화를 이루는 사랑을 해야 한다. 감정에 치우친 사랑은 유혹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절제하는 사랑이 아름답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사랑은 소망을 이루어내는 사랑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랑은 “상대방을 세워주며 상대방의 영혼이 가장 잘 되길 바라는 태도이며 행동”인 것이다. 상대방의 성장을 위해, 그리고 상대방의 발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기 보다는 상대방을 소유하려하며 이용하려는 사랑은 잘못된 사랑인 것이다. 주기보다는 받으려고 하는 사랑은 욕심에 불구하다. 애욕인 것이다.

윤천수 목사
chunsoo76@hanmail.net
한동대학교 국제어문학부 졸
고려신학교 신학과 졸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에서 목사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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