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이시가와가 대문 안으로 쑥 들어왔다. 그는 댓돌 앞에 낮도깨비처럼 우뚝 선 채 구겨진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쓱쓱 닦는다. 왕골 돗자리를 깐 대청에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그가 딱총을 쏘듯 쇳소리로 말하였다.

“가네모도 쥰이찌(金本 純一)상, 여기다 도장 찍으시오.”
“그, 그게 무엇입니까?”

힘들게 일어나 앉으시며 아버지가 물었다.

“조헤이 영장이 나왔소.”

뒤란에서 빨래를 하던 엄마가 앞마당으로 튀어나왔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조헤이 영장이라니요?”
“시간이 별로 없소!”

그는 글씨가 인쇄된 종이 한 장을 아버지 앞으로 휙 던지었다.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가 종이를 집어서 읽는다.

“아니 사흘 뒤에……?”
“그러니까, 시간이 없다고 하지 않았소!”

화가 치밀어 오른 엄마는 말 대신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금방 새빨간 피가 분노와 증오의 표징인양 방울져 떨어진다.

“여기에 도장 찍으시오!”

아버지는 아무 말을 못하고 엄마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하지만 이시가와는 빨리 찍으라고 장부에다 아버지의 오른손을 끌어다가 엄지에 인주를 묻혀 꾹 눌렀다. 아버지는 소금기둥이 되어 말을 잃고 있었다.

“분명히 애들 아버지를 징용에서 빼주겠다고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까? 구니모도 선생이 떠날 때, 남편은 서류에 중환자로 기재돼 있다고 했는데,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인 겁니까?”

엄마의 항의 같은 건 들을 생각도 않고 이시가와는 돌멩이를 툭 던지듯 말했다.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 왔소,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오.”

그는 꽁지를 감추듯 대문께로 썩썩 걸어 나갔다. 엄마가 쫓아갔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당신의 요구를 다 들어주겠습니다. 패물이나 토지문서도 달라는 대로 다 내놓겠습니다. …… 부디 남편을 이번 징집에서 빼 주십시오. 제발, 이렇게 빕니다.”

엄마는 절을 하며 애걸복걸 애원을 하였다.

“이제 그런 건 필요 없소. 나는 바쁘단 말이오. 다른 집에도 영장을 돌리러 가야 하오.”

대문 앞에 세워둔 자전거를 집어타고 그는 언덕을 구르듯이 도망쳐 갔다. 마지막 카드를 꺼내듯 엄마는 목석이 된 아버지를 부여잡고 통곡을 한다. 아버지를 위해 신애가 할 수 있는 건 고진의 아저씨가 선물한 재스민 차를 만들어 드리는 일밖에 없다.

발등에 떨어진 현실을 인식한 엄마는 빨래하던 젖은 손을 행주치마에 닦고, 잠자리들이 낮게 선회하고 도라지꽃이 만개한 돌담길을 뛰어 할머니 댁으로 달려갔다. 손을 후들거리시며 장죽을 채우는 할머니가 노발대발 역정을 내시었다.

“그 많은 쇠푼을 갔다 바쳤는데,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이냐?”

큰아버지가 부리나케 양복으로 갈아입고 군청으로 쫓아가셨다. 어른들이 내린 결론은 아버지가 이 고장을 떠나 몸을 피신하지 않으면, 징용을 면하기 어려운 급박한 상황인 것이었다. 엄마는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으나, 아버지의 생각은 아주 달랐다.

“이렇게 기운이 없는데 어디로 간단 말이오?”

중환자 진단서도, 뇌물 작전도, 이제 아버지의 징집면제와는 아득히 멀어졌다. 엄마의 분은 극에 달하였고 사흘밖에 시간은 없다.

아버지가 몸을 피신할 힘이 있다 해도 이제는 그렇게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군청에서 대문 앞에 파수꾼을 세워놓은 것이었다. 징집대상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루 2교대로 보초병을 세워놓은 것이었다.

막다른 순간과 마주선 엄마는 큰엄마와 의논하여 센닌바리 수틀을 마련하였다. 허겁지겁 엄마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챙 넓은 밀짚모자를 씌워 신애를 데리고 사거리로 나갔다.

엄마와 신애는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공손히 고개 숙여 센닌바리를 부탁하였다.

“부탁합니다. 애들 아버지가 징용에 나갑니다.” “아주머니, 우리 아버지 센닌바리를 해 주세요.”

키가 신애보다 조금 클까 말까 한 아주머니가 정성껏 센닌바리를 떠 주고서 혀를 차며 말했다.

“참, 기특두 하구먼, 즈이 아버지를 위해 이 삼복더위에 쬐끄만 딸이 애쓰는구먼.”

엄마의 센닌바리는 武運長久(무운장구) 중에서 세 번째 글자인 장자의 오른 쪽의 끝 부분만 조금 남아 있었다. 끝의 久(구)자는 획이 간단하므로 쉽게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무더운 더위에 지나다니는 여자들이 많지 않아 시간이 더 걸리었다. 더위도 배고픈 것도 잊은 채, 신애는 드문드문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공손히 부탁하였다. 미처 엄마의 전보를 받지 못한 외할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수원에서 오셨다. 전쟁 말기인지라 전보와 같은 우편 사정은 극도로 악화돼 있었던 것이다.

현기증을 누르고 있는 신애의 귓가로 누군가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었다. 가즈오였다. 그를 보자 신애는 파르르 화가 돋았다. 옆으로 다가온 그에게 왜? 하고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물총을 쏘듯이 내뱉었다.

“일본 사람은 나빠! 이시가와는 너의 삼촌이잖아? 그 사람은 너무도 나쁜 일본인이야. 우리 아버지를 조헤이에서 빼주겠다고 우리 엄마하고 굳게 약속하고, 그 약속을 깼단 말이야!”

가즈오가 미안한 얼굴로 말하였다.

“너도 알지만, 이시가와 삼촌은 높은 사람이 아니야. 상부의 명령을 따르는 부하일 뿐이야.”

“그렇지만 중환자인 우리 아버지를 악착같이 징용에 보내려고 이시가와가 우리 집 대문에다 보초병까지 세워 놓은 걸, 가즈오,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구? 뭐라고 말할래?”

신애의 울분에 부채질이 된다는 걸 모르는지, 가즈오는 또 나직이 말한다.

“그것도 삼촌의 명령은 아닐 거야. 상부의 명령인 거지.”

“이시가와라면 우리 아버지가 중환자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중환자라고 쓴 서류를 상부에 보고만하면 면제받을 수 있다고 난 생각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신애는 마구 힐난하였다. 며칠 전에 그 먼 할미꽃 족두리의 기억을 되새기며 그를 만나러 가봐야지 하고 달콤한 생각을 했었던 걸 하얗게 잊고서.

가즈오는 “내가 사과할게. 미안해.” 하고 말하며 센닌바리 수틀을 들고 있는 신애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러자 버러지라도 털어내듯이 탁 가즈오의 손을 뿌리치고 신애는 가위로 잘라내듯이 말하였다.

“너 역시, 일본 사람이야. 내가 영원히 조선 사람인 것처럼!” <계속>

김녕희 작가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국소설문학상·조연현문학상·만우문학상·PEN문학상 등 수상, 단편소설집 <고독한 축제> 등, 장편소설 <에덴의 강>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