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4년 10월 벽보 사건 (10월 17일 밤부터 18일까지)

개혁을 주장하는 루터주의자들에 의해 교황과 미사를 반대하는 글이 나붙는 벽보 사건이 일어난다. 그 내용은 “매번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을 반복시켜서는 안 되며, 우상적인 교황주의를 깨뜨리고 하나님께로 나아올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유일하신 구세주이신 우리 주님의 성찬을 반대하여 만들어진 교황주의적 미사의 소름끼치고 용납할 수 없는 남용에 대하여”라는 주제의 벽보는 파리 전역과 프로방스와 엉부와즈(Amboise), 오흘레앙, 심지어 왕의 침실 문에까지 붙게 된다. 벽보의 글은 기욤 파렐의 친구이며 스위스 뉴샤뗄(Neuchatel) 교회 프랑스인 목사 앙투완 마흐꾸흐(Antoine Marcourt)가 작성하고, 삐에흐 드 벵글(Pieere de Vingle)이 인쇄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젤에서 건너 온 성경을 통해 변화되었고, 오직 성경만을 강조했던 개혁자 파렐의 삶을 단편적으로 잘 보여주는, 성경을 들고 서 있는 파렐의 상(像).

▲뉴샤텔 교회는 1530년에 가톨릭 교회에서 개혁교회로 바뀌게 되고, 미사가 폐지되고 성상(聖像)의 우상들은 파괴된다.

당시 프랑스 왕국은 ‘하나’의 나라, ‘하나’의 왕, ‘하나’의 종교만을 허용하고 있었다. 이 개념은 절대 왕권을 유지하려는 왕과 하나의 종교를 통해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는 정치적 종교 지도자와의 절묘한 균형으로 이루어진 합작품이다. 파비아 전투 이후 왕권이 약해된 프랑수와 1세는 실추된 왕권 회복을 위해 상대적으로 강하여진 종교 지도자들의 도움이 절실했기에, 벽보 사건의 주동자는 물론 공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조차도 다 화형시켰으며 감옥은 개신교 죄수들로 다 채워졌다. 이 때 파리에서 자신의 집을 모임 장소로 제공하며, 성경 출판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를 하면서 칼뱅의 후원자였던 에티엔느(Etienne de la Forge)도 화형을 당한다.

박해의 사실이 유럽 전역에 전해지자 독일 교회는 크게 개탄하고 성토했다. 그러자 가톨릭에서는 이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 가득한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한다. 그래서 “이 야만적인 폭력은 재세례파에 의해 감행되었으며, 그 폭도들은 종교적 이유뿐 아니라 정치적 야욕을 갖고 이 일을 자행했다”고 거짓을 말한다.

이 사건은 깔뱅이 조국 프랑스를 완전히 떠나게 되는 계기가 되며, 깔뱅은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를 거쳐 스위스 바젤(Basel)로 급히 피난하게 된다. 바젤에 머물면서 1535년(서문이 8월 23일에 작성된 것으로 보아 이쯤에 탈고된 것으로 추측)에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완성하여, 1536년 3월에 출판하게 된다. 또한 1535년 6월 4일에는 올리베떵에 의해 불어 성서 번역본이 출판되어, 깔뱅이 라틴어로 된 추천 서문을 작성한다.

▲바젤은 세 나라의 국경 지역이며, 문화의 중심 도시다.

바젤에 있는 동안 깔뱅은 꼴레쥬 몽테규 출신의 동기들을 만나게 된다. 1년 전 연설 사건으로 피신왔던 니꼴라 꼽과, 제네바 사역의 동지로 일하게 되는 삐에르 비헤(Pierre Viret)와 재회한다. 또한 이 시기에 에라스무스가 1535년 6월부터 바젤에 머물기 시작했는데, 한 자료에 의하면 에라스무스는 스트라스부르와 바젤에서 깔뱅을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다(Times of hostility to the reform in France. Chapter 1). 에라스무스는 1536년 7월 12일에 사망하여 바젤 뮌스터에 안장됐다.

▲바젤 대성당.

▲바젤 성당에 안치된 에라스무스의 무덤.

바젤은 프랑스와 독일과 만나는 스위스 북부 도시로, 유럽 전지역에서 종교적 박해를 받는 자들의 피난처가 되고 있었다. 바젤은 피신자들을 위한 관용의 도시 뿐 아니라 에라스무스, 올리베떵 등이 성경을 출판할 수 있는 문화의 중심도시였다.

성경 번역이 종교 개혁에 미친 영향

구텐베르그(Johannes Gutenberg)가 활자 인쇄술을 발명하였고, 그의 신기술에 의해 150권의 라틴어 성경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결과 성경의 사본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성경을 구하여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구텐베르그의 동상. 그의 손에는 “Et la Iumiere fut”(그리고 빛이 있었다)는 글귀가 인쇄된 종이가 들려 있다.

▲계몽주의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 에라스무스, 밀턴, 모짜르트, 볼테르, 스피노자, 엉브와즈 파렐 등의 사상이 인쇄되어 계몽주의 시대를 열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당시는 4세기 제롬(Jerome)에 의한 라틴역 불가타(Vulgata) 번역만을 공인된 성경으로 사용하였기에, 성직자들과 일부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없었다.

▲제롬 라틴어 번역인 불가타 번역 성경.

그러나 문예부흥의 바람이 불고, 인쇄술이 발명됨으로 인해서, 원어 성경 인쇄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그러므로 르네상스는 성경 번역을 위하여 준비된 시대라 할 수 있다. 종교 개혁이 가능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고문서의 텍스트를 연구하는 인문주의자들이 성경을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톨릭 유명한 신학자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던 그 시대에 번역된 성경을 통해 개개인이 성경을 접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자각이 시작되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개혁교회의 외침은 성경이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무지와 인습에 사로잡혀 있던 프랑스를 바르게 인도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성경 번역이었다. 오늘날에도 성경을 부흥의 수단이나 교권에 순복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이해하기 위하여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16세기, 성경을 위한 르네상스 시대

성경 번역사에서 16세기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는 시기이다.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패망할 때, 희랍 학자들은 도주하면서도 여러 자료들의 사본을 가지고 플로렌스와 북부 이탈리아 도시로 가게 된다. 이로 인하여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고대 그리스 대작들의 수사본(手寫本)이 유럽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또 각 대학들은 고문서의 본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번역 및 편집의 새로운 방법들이 인쇄 기술을 통하여 구축된다. 고문서 본문을 연구하던 인문주의자들은 자연스럽게 성경을 접하게 되면서, 가톨릭 교회의 유명 신학자들에 의해서 독점돼 있던 성경 본문을 연구하게 된다.

성경 번역을 처음 시도한 발도(Pierre Valdo)

보름스(worms)의 개혁자 동상과 제네바 바스티옹 공원의 개혁자 석상에 동일하게 등장하는 한 사람의 이름이 있으니, 바로 삐에흐 발도이다. 그는 어떤 인물이기에 두 곳의 개혁에 관련되어 있을까?

 

▲보름스 개혁자들의 동상에 함께 있는 발도(1130년-1217년)는 아시스의 프란체스코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함.

▲제네바 개혁자 석상 앞에 발도의 이름이 기록된 석판. 뒤쪽으로 제네바 개혁자들의 동상이 보이며, 루터를 기념하는 석판에 발도와 위클리프, 쟌 후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 제2의 도시 리용. 유럽 종교 개혁의 요람이 되었던 곳.
삐에흐 발도(Pierre Valdo) 또는 발데(Valdès)라 불린 그가 살았던 곳은 리옹(Lyon)이라는 도시로, 이 도시는 2-3세기에 벌써 복음이 전파가 되어 일찍이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된 곳이기도 하다.

12세기 초 성직자들과 상인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귀족과 기사들도 읽고 쓰기를 할 수 없는 문맹들이었다. 단지 상인들은 사업을 하기 위해서 약간의 지식이 필요했다.

발도는 당시 글을 읽을 수 있는 지식인으로 경건한 삶과 선행을 행하였고, 착한 행실로 모든 이로부터 존경을 받던 인물이다. 그는 교부들의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로마 교회가 어떻게 기독교와 멀리 떨어지게 되었는지 확인하게 되고, 성경을 알고 싶어하는 큰 열망을 갖게 된다.

그의 신앙이 확연히 바뀌게 된 것은, 어느 날 저녁 같은 테이블에 같이 앉아 있던 친구 가운데 한 명이 갑자기 쓰러져 죽는 사건을 목격한 뒤부터이다. 이 사건은 그에게 “지금 죽어도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주었다.

그는 그의 구원에 대한 염려를 자신의 고해 신부과 상담했고, 그 후 한 부자 청년에게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했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전 재산에서 아내와 딸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얼마를 주고, 나머지는 이웃들에게 나눠줬다. <계속>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