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글들을 쓰기 시작할 때는 한국교회에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장소와 사실들을 소개해보자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좀 더 책임 있는 글을 쓰기 위해 자료들을 찾다보니, 역사를 역추적하고 상상하는 일까지 해야 하는 전문적인 일 앞에 한계를 느끼게 된다. 프랑스어를 전공한 것도 아니며, 프랑스 개신교 역사에는 문외한으로서 남의 나라의 역사를 다시 기록함에는 많은 역부족을 느끼며, 앞으로 누군가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완성하는 일을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시작한다.

이번 연재도 그저 깔뱅(칼빈)이 다녔던 학교를 소개하는 정도로 시작하였는데, 깔뱅과 제네바에서 함께 일한 사람들을 조사하다 보니 깔뱅의 파리 초기 시절에 연관된 사람들임을 발견하고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그 내용들을 소개한다.

1523년 8월 파리에서의 첫 학교 꼴레쥬 드 라 막쉬(Collège de la March) 

▲꼴레쥬 드 라 막쉬. 현재는 프랑스 정부가 다른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깔뱅이 14세가 되던 해인 1523년 8월에, 아버지 제라흐 꼬뱅(Gérard Cauvin)은 깔뱅이 사제가 되도록 하기 위해 파리로 유학을 보낸다. 깔뱅이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삼촌인 리샤르의 집에 머무르다가 두 달 후에 꼴라쥬 드 라 막쉬(Collège de la March)에 입학한다.

깔뱅은 이 학교에서 5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을 다녔지만, 개혁 신학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는 아주 중요한 첫 만남을 갖게 된다. 깔뱅은 이 학교 교사 가운데 후엉(Rouen)이라는 도시의 사제였던 마튀랭 꼬르디에(Mathurin Cordier)를 통해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배우게 된다. 이로써 깔뱅은 두 언어를 아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고, 훗날 <기독교 강요>를 라틴어로 쓸 수 있는 기초를 쌓게 된다.

깔뱅이 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그 해는 파리에서 많은 사건이 일어났던 해이기도 하다. 그가 입학한 8월에, 프랑스 최초의 루터주의자 쟝 발리에르(Jean Vallière)가 혀를 잘리고 철줄로 사형대에 묶여 산 채로 화형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발리에르는 리브리(Livry) 지역의 어거스틴파 수도사로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존재이시나 성모 마리아는 그렇지 않기에, ‘크고 위대한 마리아’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 죄명이다. 그의 이 외침 이후에 프랑스 곳곳에서 성모 마리아 상을 깨뜨리는 사건이 벌어지며, 이 일을 저지른 이들은 모두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 죄라는 판결을 받고 화형을 당한다.

▲당시 개신교인들에 대한 화형 모습.

홀렁 그헤스레(Roland Greslet)는 크기와 규모에서도 압도하는 샤르트르 대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던 중 성모 마리아 상을 땅으로 던져버린 사건으로, 쟝 발리에르와 같은 해 샤르트르에서 화형을 당한다. 이들은 단순히 감정적, 우발적 행동이 아니라 그 동안 잘못 알고 믿었던 자신의 과거 신앙을 던져버린 것이다. 성모 마리아와 관련되어 순교한 대부분은 어거스틴파 수도사들로, 그 이유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다시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어린 소년 깔뱅이 이런 순교의 소식을 접하였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입학한 그 해, 그리고 그 8월에 죽은 쟝 발리에르를 비롯한 개혁자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훗날 깔뱅도 가게 된다. 그것은 그의 의지나 결단이 아닌 그가 파리에서 다닌 첫 학교에서의 만남 때문이다.

깔뱅이 파리에서 머무르던 당시,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동조한 또 한 사람이 앞선 연재에서 소개한 르페브르(Lefebvre d'Etaples)이다. 그는 성경에 대한 무지가 바로 미신적 신앙을 초래한다고 확신하고, 성경을 번역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느와용 깔뱅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르페브르 번역 성경.

인문주의자이며 출판자인 호베흐 에스띠엔느(Robert Estienne)는 그의 아버지와 친밀했던 르페브르의 영향을 받고, 1523년에 르페브르가 번역한 신약 성경을 1525년에 출판한다(1530년에 신구약 완간). 이 성경책은 제롬의 라틴어 성경을 번역한 최초 프랑스어 성경이다.

호베흐는 당시 최고의 인쇄 기술을 가진 최대의 출판자로 성경 외에 당대 유명한 책들을 많이 출판한다. 당연히 가톨릭 신학의 본산지인 소르본느 대학에서 그를 박해하지만, 왕의 보호를 받을 정도로 당대에 뛰어난 위그노 학자였다. 오늘날까지 호베흐라는 이름으로 사전과 책들이 출판되고 있다.

호베흐는 앙리 2세 치하인 1550년에 그의 가족과 함께 제네바로 망명하여 깔뱅과 함께 일하게 되며, 1552년에 깔뱅이 라틴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한 <기독교 강요>를 제네바에서 출판한다.

▲르페브르의 프랑스어 신약 성경을 인쇄한 호베흐 에스띠엔느의 인쇄소가 있었던 곳.
호베흐는 망명 전, 성경을 출판할 뿐 아니라 그가 깨달은 복음을 전하였는데, 깔뱅의 스승으로 깔뱅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마튀랭 꼬르디에(Mathurin Cordier) 신부가 그에게서 복음을 듣고 1528년에 회심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사제가 되기 위하여 유학 온 깔뱅에게 사제의 회심은 엄청난 사건이었을 것이다.

회심한 꼬르디에는 1534년 벽보 사건으로 박해가 일자 이를 피해 여러 곳으로 떠돌아 다니다가, 제네바에 머물고 있던 파렐과 깔뱅의 청빙으로 1536년 꼴레쥬 드 히브(collège de Rive)로 옮겨 테오도르 드 베즈(Théodore de Bèze)와 함께 목회자 양육 학교인 아카데미의 기초를 만든다. 이처럼 꼬르디에는 개혁주의 공식 교육자로 깔뱅의 사역을 돕게 된다. 파리에서의 첫 만남이 제네바까지 계속되었고, 그곳에서 함께 사역하다가 우연의 일치인지 같은 해인 1564년에 두 사람 모두 소천한다(깔뱅은 5월 27일, 꼬르디에는 9월 8일).

1550년에 깔뱅은 그의 데살로니가전서 주석을 꼬르디에에게 헌정하였는데, 그 책 서문에서 그는 “스승님께서 저에게 가르쳐 주신 교육과 연구방법은 그 이후로 제가 성장하는 데 결정적 도움과 활력소가 되었다는 것을 기꺼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회고하였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