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 대학원장)

1. 고통의 개념

2. 용서의 개념
3. 회개의 개념
4. 일반 대중에 비친 기독교 상
5. 미성숙한 기독교인, 우리의 자화상

6. 성경적 기독교의 바른 상

우리는 성경적 기독교의 바른 상을 다음 같이 피력할 수 있다. 성경이 보여 주는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초월하시는 거룩하신 분이시면서 동시에 우리의 구체적인 삶 가운데 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 우리의 고통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은 구약에서는 세키나(Schechina)의 하나님, 신약에서는 십자가의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있다.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고난 받는 그의 백성이 받고 있는 고난의 현장에 내려가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러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개 하리라”(출 3:7-10)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당한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난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이라 (…)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막 15:34-39).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아들 안에서 인류의 고난의 현장에 참여하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 구절은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2)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의 용서
성경은 기독교의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설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이 영화가 그리는 것처럼 단지 피상적으로 인간적인 견지에서 판단해서는 안된다. 은혜는 사람이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받을 자격이 안되는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은혜요, 선물이다. 그러므로 은혜와 용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다.

용서란 물론 피해를 입은 사람이 해야 성립한다. 그것은 심리적인 상대방에 대한 응어리를 푸는 것이다. 여인은 하나님이 살인범을 용서하셨다면 오히려 감사해야 했다. 이것이 기독교적 마음이요 용서이다. 그런데 피해자인 자기가 아직도 용서를 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자기는 거들어 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용서한 데 대하여 여인은 반항한다. 이것은 아직도 여인이 용서와 은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여인은 얼마나 결백한가? 신애도 자기가 돈 많은 재력가로 소문을 내었기 때문에 자기 아들을 유괴살해당하는 인간적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신애는 자기의 잘못을 참회하기보다는 유괴범이 엄청난 돈을 요구하여 오니까 비로소 자기는 실제로 돈이 없는 자라고 진실을 유괴범에게 전화로 실토한다. 그러나 그것은 통하지 않고 아들은 무참히 시신으로 변한다.

하나님이 값없이 용서를 베푸시는 것은 공연히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의 아들을 예수님을 우리 죄의 속죄 제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 같이 증언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 5:7-10).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당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이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3) 절대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기독교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무한한 용서를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원수를 미워하라’는 유대교나 ‘이교도와 원수를 칼로 응징하라’는 이슬람교와는 다른, 자기 없는 사랑, 아가페를 가르치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조건 없는 절대적 사랑의 계명이다.

따라서 가해자가 이미 피해자의 용서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말에 아연실색하여 자신이 받은 용서까지도 팽개쳐 버린 신애의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초보자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의 보다 성숙한 단계는 내가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비는 것이고 상대방이 피해자인 나에게 심리적 보상을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용서할 뿐 아니라 원수에 대한 응징을 거두어 달라는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하는 빈 마음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가르치신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사도 바울도 이 정신을 그대로 사랑의 계명으로 해석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은즉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7-21).

4) 심리상담, 심리적 상처를 싸매고 회복과정을 중요시
인간의 아픔은 단지 신체적 상처나 아픔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은 마음의 상처와 아픔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고통 받은 자들에게 내면적 치유는 중요하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 과정을 중요하게 취급한다. 단지 영적인 치유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적 치유가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 상담치유 내지 목회상담은 이러한 내적치유에 관하여 이전에 무시되었던 이 분야를 새로운 영역으로 주목하고 연구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2007년 국민소득 2만 불에 도달하면서 먹고 사는 기본 욕구가 해결된 다음에는 심리적 용서와 치유에 대한 새로운 요구가 분출되고 있다.

1974년 스위스 로잔 세계복음화 대회((Lausanne Movement for World Evangelization)에서 복음화와 인간화 내지 사회화란 분리될 수 없는 한 켤레를 형성하는 것으로 채택되었다. 이 대회는 영혼구원과 인간답게 사는 사회적 여건 형성이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복음의 두 가지 요소라고 보았다. 이것은 영혼구원에만 초점을 두었던 전통적인 복음주의 관점을 보완하는 것으로 영혼구원과 인간화 내지 사회화, 다시 말하면, 상처받은 자의 영혼 구원과 더불어 그의 사회적 삶으로 복귀를 중요시한다. 알콜 중독 환자의 영혼만을 회개시키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중독자가 중독습성에서 생리적으로 벗어나도록 하는 사회화과정을 도와 주는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물질적 배상과 처벌과 용서라는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심리적 상처의 치료와 회복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연구하고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과정이 심리치료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신애가 나가는 교회에서 신애의 상처를 단지 믿음의 차원에서만 접근하고 상처 받은 그 마음의 치유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은 오늘날 상담과 심리치료를 중요시하는 기독교의 모습과는 다른 일부 은사 중심의 기독교만을 부각하는 면이 있다.

맺으며
영화 ‘밀양’은 기독교적 소재를 다루고 한 많은 여인의 심리적 갈등을 다루고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작품성이 그만큼의 수준에 있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영화는 종교적으로 깊은 감동을 일으키리만큼 종교예술적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그냥 일상적인 속물 여인의 한 많은 인생의 단면을 그려냈다. 기독교 역사가 120년 밖에 되지 않는 우리의 한국의 실정에서 물론 이 영화를 벤허나 쿠바디스 등 해외 기독교 명작과 비교할 처지는 못된다. 앞으로 한국 영화가 기독교적 소재를 가지고서 인간의 내면과 갈등과 죄성과 구원과 화해를 보다 극적으로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깊은 작가들 그리고 감독들의 종교적 체험이 요구된다. 이미 한국사회의 중요한 종교로서 자리잡은 기독교의 부정적 모습을 파헤치는 것은 기독교의 발전을 위하여 도움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몇 가지 부정적인 요소를 소재로 이것이 기독교의 전부인양 그리는 것은 너무 피상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기독교의 깊은 모습을 제대로 소화하여 이 영화를 보는 독실한 기독교인까지도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보다 깊은 기독교 이해와 체험에 뿌리를 가져야 할 것이다. 작품을 쓰는 자는 작가이다. 작품이 위대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위대한 체험과 세계관 속에 살아야 한다. 톨스토이가 그러했고 루이스가 그러했다. 이러한 위대한 정신적 세계에 사는 작가들이 요망된다. 이러한 위대한 작가들이 나오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치는 목회자가 위대해야 하고 한국 기독교가 보다 깊은 영적이고 정신적 체험 속에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신자인 우리들에게는 부정적 기독교 상 그리고 믿는 신자인 우리들의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되돌아보게끔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신자들의 신앙을 성숙하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