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복 총장(한일장신대학교)

인간이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은 일의 진전에 절대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일정한 일을 수년을 넘게 계속하면 스스로 진전시킬 수 있는 요령과 기술이 터득되면서 전문인의 세계에 들어선다. 그럴 때 누구의 추종도 불허하는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구축한다.


설교 사역 역시 이상과 이론을 도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어느 설교자나 자신의 강단에 설 때 자신이 넘치는 모습을 보이고 유창한 설교를 펼쳐나간다. 그 몸가짐에서, 그리고 쏟아져 나오는 달변에서 회중은 설교자의 전문성과 그 성스러운 직책에 대해 인정을 한다. 그리고 ‘아멘’을 연발하면서 그 설교에 심취되는 경우를 본다. 이런 현상 앞에서 어떤 설교자도 자신의 부족에 대한 인정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설교자 자신의 설교를 비디오에 담아 설교자 자신이 보도록 할 때마다 거의 모든 설교자가 반응하는 다음의 말은 우리가 깊이 음미해 볼 만하다.

“저게 나의 설교인가요? 저 정도의 수준에 불과하던가요? 실망인데요.”

이 반응의 응답은 바로 자신의 설교가 자신이 생각했던 수준에 미달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 필자가 20년이 넘도록 경험해 온 설교학 교실에서의 실태는 아무도 자신의 설교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우월하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환언하면, 거의 모든 설교자가 착각이 불러온 과신의 늪에 빠져서 설교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의 향상을 위한 겸허한 노력이 얼마나 시급한지를 모른 채 이어지는 설교를 메우면서 달리고 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자신감이 형성되게 되는 드높은 권위의 의자에 앉아 교주와 같은 자세를 취하게 된다는 슬픈 그림을 그린다.

이러한 과정은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성공적인 설교자라고 자부하게 되는 교만의 자리에 앉게 한다.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 은혜의 파장이 일어나는 것을 본 설교자가 그 순간 그러한 도구로 쓰임 받음에 행복감을 조심스럽게 느낄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만족이나 자만의 감정이나 자세는 금물이다. 많은 설교학자들은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에 자만심을 가질 때 사단의 손에 이끌리기 시작하고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설교자의 착각은 막을 길이 없다. 그러나 그 착각이 거듭되었을 때 설교자는 실로 엄청난 속도로 퇴화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시대의 변화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오늘 나의 설교의 형태와 전달의 기술이 탁월했더라도 어느새 구물(舊物)이 되어 버리는 시대에 오늘의 설교자는 살고 있다. 언제나 설교학의 새로운 이론들을 알아보고 변화에 적응하는 설교자만이 달리는 시대의 설교 무대에 설 수 있다.

이제 미래의 설교자들은 완벽한 설교를 추구하는 설교자는 있으나 완벽한 설교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자신이 아무리 훌륭한 설교를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절대로 완벽할 수 없다. 만에 하나 그러한 느낌을 갖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과신(過信)이 착각을 가져온 순간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내리막길을 걸어가는 실패의 발길이 자신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기미가 보이는 조짐이다.

솔직히 한국교회의 강단에는 자신의 설교가 최상의 단계에 이른 것 마냥 믿고 더 이상의 발전을 추구하지 않는 착각에 빠진 과신의 주인공들이 너무 많다. 이 때마다 한국교회 설교 사역의 미래가 염려되지 않을 수 없다. 진정 설교의 자만과 교만에 빠져 있는 설교자에게는 성령님의 도움이 떠나고 다음의 말씀만 그 귀에 들려질 뿐이다.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같이 보금자리를 높이 지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