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 선교사

"하나님 저는 지금까지 정말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누릴 것 다 누리고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못 먹고 못 입고 못 쓴다 할지라도 저는 만족합니다. 이제 저의 남은 생명은 북한의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최광 선교사. 북한 선교에 서원하며.)


열방빛교회는 지난 2003년 4월 11일 탈북자들이 주도해 세우게 됐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에서 정처를 찾지 못해 하릴없이 교회로 모여드는 여느 탈북자들과는 달랐다. 이들 하나하나가 북한 선교와 탈북자 선교에 비전을 품고 말씀으로 무장된 하나님의 강한 군대였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엔 이들과 3년 이상 동고동락하며 삶과 말씀으로 예수를 증거한 최광 선교사(49)가 있었다.

북한 선교의 시작

최 선교사는 신대원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98년 8월 8일 중국땅에 발을 내디뎌 우연히 탈북자 5명과 합숙하며 함께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서 뜻하지 않던 탈북자 선교를 시작했다. 개강 준비를 위해 한국에 돌아왔는데 몸과 마음이 그렇게 힘들더란다. 그래서 1년만 휴학하고 북한 선교를 해보라는 한 선교사의 권유로 그는 다시 중국땅을 밟게 됐다.

"그런데 중국으로 돌아가 탈북자 형제들을 만나 그 얘길 했더니 글쎄 이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는 겁니다. 알고 보니까 자기들이 제가 다시 돌아오도록 금식 기도를 했다는 거에요.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니 신뢰가 간다나요. 쫓기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동고동락 해주는 게 좋았나 봅니다"

1년으로 잡았던 선교 기간이 2년이 되고 3년이 됐다. 이 기간동안 그는 완전히 북한 사람들에게 빠져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됐다고 고백했던 바울처럼 그는 그 선교 기간동안 성격도 말투도 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제가 전도한 이들은 저를 '수령님'이라고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라고 말하며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만큼 그들에게 친근하면서도 확고한 모습으로 복음을 전해 온 것.

오직 말씀의 능력으로

최 선교사의 전도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성경을 신약은 하루에 걸쳐, 구약은 사흘에 걸쳐 일독하는 속도로 약 10개월 동안 신약 100독, 구약 20독, 성경구절 500절 암송을 하고 남는 시간 동안은 기도하는 맹훈련을 시킨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어렵고 악한 환경 가운데 살아왔기에 잔인하고 무자비하던 그들이 놀랍게 변화된다는 것.

"그들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쉬는 시간을 주면 싸우기만 해서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감당할 방법은 그것뿐이었죠. 그렇게 30~40독을 하고 나니 오히려 자유시간을 줘도 지겹다며 성경통독을 하자고 하더군요. 몇 개월만 그렇게 하면 설교도 다들 능수능란하게 잘 합니다"

98년 8월부터 그렇게 훈련받아 성경통독 등의 교육과정을 마친 사람들은 1기가 됐다. 최 선교사는 이들을 내보내 각자 탈북자들을 전도해서 2기를 양성하고, 이들이 또 3기, 4기를 양성하게 하며 사역을 확장해나갔다. 그렇게 해서 어느새 그의 장막엔 350여 명의 사람들이 1기부터 4기까지 350여 명의 사람들이 거쳐갔다. 대부분이 확고한 신앙고백을 가졌을 뿐 아니라 교육 프로그램도 수료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이 많은 이들을 다 감당하기가 힘에 부쳐 가족들도 중국으로 부르게 된다.

"인간적으로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하나님의 일이 귀하게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며 가족들도 저를 더 많이 이해해주었고 기도도 해줬습니다. 4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학교를 한창 다니고 감수성이 풍부할 때라 처음엔 힘들어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그 아이들까지 책임져주셔서 모두 잘 자라나고 있습니다"

위기와 시련, 그러나 더 큰 역사를 쓰신 하나님

그렇게 끊임없이 선교의 장막을 넓혀가던 그들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2001년 6월 11일, 한 조선족 형제의 밀고로 4기 사역 도중 그와 그리고 당시에 함께 있던 76명의 지체들이 모두 체포된 것.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그는 남들같으면 몇 년은 족히 감옥에서 있어야 할 상황인데도 며칠만에 풀려나게 됐다.

그후 그는 추방돼 눈물과 아쉬움 속에 4기 사역은 중도에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과 고별하며 했던 말을 떠올리며 "하나님, 이제 이들과 헤어지면 다시는 돌볼 수 없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들을 붙드셔서 이들이 서 있는 곳곳마다 영광을 받아주시고 이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드리며 평안을 얻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3년 간의 파란만장했던 사역 기간 동안 지쳐있던 영과 육을 회복시키며 요양하고 있던 그에게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약 1년 반 뒤에 그가 가르쳤던 탈북자 중 남한에 들어와 있던 50여 명 중 5명이 그에게 찾아왔다. 남한에 들어와서 자유와 소유를 얻은 기쁨에 교회도 떠나 흥청망청 살던 이들이 결국 삶의 공허함을 느끼고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자 그를 찾은 것이다.

"자유의 기쁨에 들떠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결국 남한에서 갈 곳도 없고 살아갈 능력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정부 지원금으로 막 살았지만 그들 안에는 여전히 말씀이 살아있으니 괴롭기도 했을 겁니다. 마침 저도 북한 선교에 대한 열정이 여전했던 터라 뜻이 맞아 열방빛교회를 세우게 됐습니다"

꺾이지 않은 북한 선교의 열정과 비전

그는 지금 성전 이전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탈북자들이 노원구와 양천구 주변에 많이 모여 있는데 현재 교회가 전철로 2시간 거리인 금천구에 소재해 있어 교회에 찾아오기도, 심방을 가기도 힘든 상황이기 때문.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탈북자들이 밀집돼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 더 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싶어하는 그의 욕심이다. 특히 이전 후에는 북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영어와 중국어도 교육할 계획이다.

"우리 교회는 '서울 안의 평양'입니다. 전도도 하지만 탈북자들의 한국 적응을 돕는 것을 병행하고 있죠. 비록 선교 일선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또다시 북한 선교를 맡겨주시니 제 열정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2기생들을 훈련시키던 중에 하나님께 5000명의 북한 출신 선교사를 양육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기도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비전은 꺾이지 않았다.

"통일이 되거나 북한이 개방을 하면 수천 개의 교회가 북한에 세워지게 될 겁니다. 그럼 그들에게 누가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미국도 한국도 아닙니다. 북한을 가장 잘 알고 그들 가슴 깊이 예수의 이름을 심을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북한 사람 자신들 뿐입니다"

역경의 삶을 살았지만 자신의 인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최광 선교사. 그런 감사함이 넘쳐서인지 어느새 쉰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아닌 기쁨의 광채가 흘러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