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눈에는 어린이들만 보여요. 르완다 사람들만 보이구요."

1. 선교현장에 뛰어든 계기는?

저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목사가 되신 후에 이북과 남한에서 평생동안 10개의 성전을 건축하셨습니다. 맨손으로 흙을 이겨서 직접 목수가 되어 건축비도 없는 상황에서 8남매 자녀들에게 죽을 먹이며 등록금도 제때 내지도 못하면서….그래서 전 죽어도 목사는 안되겠다 생각했었습니다.(부르심은 1972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있었구요. 그때 서원도 했구요 선교사로.) 미국에 온 것은 1986년이었어요. 대학원에서 전자공학 전공하고, 고생 하다가 컴퓨터 통신분야 사업을 했어요. 실리콘밸리에서 사업이 잘 되는 게 부담스럽고 불안했어요. 하나님께 서원한 것 때문에 마음이 계속 무거웠어요. 그래서 부업(?)으로 “크리스천 라이프”라는 주간 기독교지를 창간했지요. (1992년 창간) 이민생활 하는 가정에 어려움이 많거든요. 그리고 이곳 북가주지역에 크리스천 신문도 없었어요.


그러다 1994년에 르완다 전쟁이 났어요. 후투족, 투치족 두 종족간의 싸움이었지요. 무척 많은 사람 죽어 가는 모습을 CNN과 외신으로 봤어요. 그래도 그때 전 사업과 신문발행에 무척 바빴어요. 르완다는 어딘지도 몰랐어요. 그러다 어느날 부터 부담감이 생겼어요. 성령님의 부르심이었는지, 그들의 처지를 직접 보고 선교적으로 구제활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 내가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 교회가 6.25전쟁 때 받은 신세를 르완다를 통해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하나님께서는 내게 많은 것을 포기하기를 원하셨어요. 전 컴퓨터 통신기술 엔지니어였고 사업도 성장하고 있었지만, 그런 거 포기하는 건 쉬웠는데 가정을 포기하는 게 가장 걱정이 됐어요. 특히 제 딸과 아들이 당시 여섯 살, 네 살 그랬어요. 떠나는 날 딸과 아들을 품에 안고“하나님 제가 이번 취재 길에서 돌아오지 못하더라고 하나님께서 이 아이들을 잘 키우셔서 주님의 종으로 써주십시오. 전 아버지께서 부르시는 이 길을 갑니다…”
사람들이 거기 가면 죽는다고들 해서 그땐 죽음이 각오가 되어 있었어요. 저는 저의 아이들을 포기했었지요. 지난 8년간 매년 6개월은 아프리카에서 난민들을 위한 선교사역 6개월은 미국에서 문서사역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저를 많이 보고싶어하고 저도 아이들이 많이 그리워요.

2. 르완다에 처음 갔을 때 현지상황은?

제가 상상했던 것 보다 더 무서운 곳이었어요. 밤에 르완다에 버스를 타고 도착했는데 무서워서 버스에서 내릴 수조차 없었어요. 그렇게 40일간 르완다 전국의 취재와 자이르 고마 그리고 탄자니아의 후투족 난민촌을 취재했어요.
전쟁은 후투족이 투치족을 학살하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어요. 세 달 동안 100만 명 이상을 죽였거든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된 일인지 학살을 시작한 후투족이 투치족에게 전쟁에서 지고 말았어요.

고아가 된 투치족 어린이들이 전쟁에 나서서 싸웠어요. 12살-13살 많은 어린이들이 군인이었어요. 신발도 없어요. 다 떨어진 옷을 입고 AK소총을 둘러맨 많은 어린이들의 눈빛에는 살기가 넘치고 있었어요.
많은 어린이들이 전쟁의 충격으로 눈동자가 풀리고 나이도 이름도 기억을 못하는 정신 이상자들이 됐어요. 많은 고아들이 먹을 것을 찾아 길거리의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어요.
어떤 어린이는 손가락 다섯 개가 모두 잘렸어요. 후투족들이 들이닥쳐 후투족 아버지에게 칼을 들려주고 투치족 아내와 자녀들을 다 죽이라고 했어요. 아버지가 칼로 아내와 아이들을 죽여야 했어요. 이런 얘기 끝도 없어요. 살인을 시작한 후투족 250만 명이 전쟁에 지고 보복이 두려워 자이르 고마워 탄자니아 응가라 지역으로 피난 갔어요. 세계 언론은 후투족을 살인집단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제게 큰 부르심을 주셨어요. 살인과 약탈,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 그래서 유엔직원들과 3-40리밖에 사무실을 만들고 난민촌 출입을 잘 못하는 그 곳에서 내가 그들과 먹고 잘 수만 있으면 거기는 황금 어장이었어요.

어느 비오는 날 배낭을 메고 난민촌을 걷고 있는데 많은 어린이들이 따라 다녔어요.여섯 살쯤 난 어린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까 춤을 추는 거예요. 덩실덩실… 외국인이 머리를 쓰다듬어 준데 좋아서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면서요.
그 수많은 어린이들이 저의 발걸음을 르완다 선교사가 되게 했어요…지난 8년간…지금까지

3. 개척당시 힘들었던 점?

르완다의 전쟁상황, 난민촌 등 위험지역이었다는 것이 힘든 상황이겠지만 사역적으로는 르완다 사람들의 이상한(?)성격(전쟁으로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니만큼 오해하고, 루머 좋아하고, 서로 싸우고, 종족간에 시기하고) 때문에 힘이 들었습니다.

특히 두 종족간에 문제를 잘 타고 가야 했습니다. 후투족을 돕던 여러 신부들이 투치군인들에게 키갈리에서 저격을 당하기도 했으니까요. 저도 후투족을 많이 도와 주었구요. 심지어 감옥에 있는 사람들도 몰래 도와 주었어요.
여러 사람을 르완다에서 도망가게 했는데 르완다 정보부가 알고는 정부부장이 직접 찾아와서 르완다 위해서 좋은 일도 많이 했지만 그런 건 삼가해달라고 하고 가기도 했습니다.

난민촌 선교를 위해서는 반군 때문에 위험한 지역, 차도 없는 지역을 지나가는 트럭을 얻어 타고 다니며 그렇게 다녀야 했어요. 그래서 괜히 서럽기도 했어요. 또 도와주고 싶은 사람 많은데 도울 수 없을 때 마음이 어려웠어요. 전쟁으로 상처투성이인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그 사정 들어주다 보면 속에서 쓴 물이 올라오곤 했어요. 위장병이 생길 정도로.
도와 줘도 고마운 줄 모르는 사람들도 힘들었어요. 사람이 사람을 도와주고 감사하다는 소리를 못 듣는 게 그렇게 피곤한 일 인줄 몰랐어요.


4.지금까지 어떤 사역들이 진행되었습니까?

르완다에서는 △고아원을 설립 50명의 어린이 기르고 △27개의 유치원에서 4천 명의 어린이가 계속하여 입학하고 졸업 (2001년 9월 9개 더 개원) 현재는 36개 유치원에서 5300명 어린이 길러요.△어린이들을 위한 장학사업 (50명)△피그미족을 위한 생활개선 사역 (학교 및 농장)△르완다 신학교 및 간호대학 (건축 중) 2002년 9월 개교 등이 계속되고 있고요.
우간다에서는 △기술대학과 신학대학 및 의과대학 건축을 위해 계속 건축중이며△지금 성전과 교실 8동의 건축을 마치고 초등학교(400명)를 운영중
탄자니아에서는 △95년 난민촌에 난민촌 신학교를 설립하고 150명의 신학생 양성/ 대중집회/ 난민촌 합동 세례 침례식을 거행하였고△97년 르완다 난민들이 강제로 귀환한 이후에는 부룬디 난민촌(20만명)에서 집회를 계속하고 있음.△빅토리아 호수의 섬 선교(의료선교/의료선 제작 예정)가 추진되고 이번 여름 이후에는 부룬디와 콩고로 선교지가 확장됩니다.

5. 작년에도 아프리카 지역에서 선교대회를 개최했다고 들었습니다. 선교대회 성과는 어느 정도였나요?

2001년 7월 9일부터 8월 4일까지“2001 르완다 복음화 대성회”를 개최했어요. 주제는 “그리스도의 나라 르완다”였고, 사랑, 평화, 용서, 화해에 대하여 가르쳤어요.
72명의 선교 단원들이 한국. 미국, 유럽에서 참가했어요. (김의환 목사님 칼빈대 총장, /미국 구세군교회 서군국 장희동 사령관등 어른부터 대학생 단원)

선교대회 통해서 르완다 전국 교회가 온전히 일치되는 기적이 일어났어요.

△르완다 전국교회가 구국기도회를 열었어요. (2001년 7월 9일- 7월 15일)△르완다 전국의 11개 도(프리팩쳐)에서 복음화 성회가 열렸어요. 이때는 각 도에서 250명-300명의 지도자가 4박 5일간의 지도자 세미나에 참가했어요.(전국 3000명) 대중집회에서는 프리팩쳐에 따라 5천명, 또는 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집회에 참여했어요.△키갈리에서는 전국 복음화 대성회가 열렸어요.(7월 23- 7월 29일) 이때는 1천명의 키갈리 지도자 세미나가 다시 열렸어요. 키갈리 스타디움에서 1만 5천명의 주민이 모인 가운데 집회가 열렸어요. △르완다에 있는 콩고난민촌에서 집회(1만 6천명 상대)가 있었어요.

르완다 역사상 처음 있는 집회였다고 르완다 정부와 교회가 좋아했고, 콩고, 부룬디 사람들도 제발 자기네 나라에서도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무튼 중앙 아프리카 전체에 미친 영향력이 대단했어요.

5. 어린이 선교를 하시는 이유와 선교대회 개최 취지에 대해?

어린이들을 위해 사역을 하면서도 그 이유를 대라니 참 어려운 질문이네요. 잘 모르겠어요. 왜 그런지 그냥 제 눈에는 어린이들만 보여요. 르완다 사람들만 보이구요.
제가 어린이 선교사역으로 시작해서 올해는“2002 르완다 전국 어린이 대성회”와 “중앙 아프리카 복음화 대성회”를 열어요.

르완다 난민사역은 지난 8년간의 젊음을 드린 사역이에요. 많이 희생했고 최선을 다해서 사역했어요. 거저 받은 것 그들에게 거저 퍼주었어요. 그런데도 르완다 정세나 평화 정착에나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저의 사역의 무력함을 보았어요. 유치원 4천명하면 큰 사역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도 르완다 그 조그마한 나라의 변화에 영향력이 없었어요.

그래서 온 나라를 뒤집을 만한 사건을 만들기로 했어요. 르완다의 정치인, 군인들, 교계 지도자들이 깜짝 놀랄 일을 한국교회가 하기로 생각했어요.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난 우리의 경험으로 그들을 위로 할 수 있습니다.

제 소원은 이 지역 사람들이 좀 깜짝 놀래서 깨어나 정말 싸움 좀 그만하고 사이 좋게 사는 나라, 서로 평화 하는 나라를 이루는 거예요.

부룬디는 1962년에 독립하여 지금까지 내전을 계속하는데 그 동안 50만 명이 죽었어요. 콩고는 지금도 내전중인데 제가 선교하는 콩고의 동부지역에서는 지난 3년간 내전을 피해 밀림으로 피난했던 양민들이 굶어죽고 병들어 죽고 유엔의 통계만 220만 명이 죽었어요….
이런 큰 집회가 아니고서는 그들의 관심을 주님께로 돌릴 수가 없어요.

6.선교대회를 준비하는데 어려운 점은?

교회마다, 성도마다 관심이 다 다르니까,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이 선교대회에 관심을 갖는 성도들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아요. 그리고 선교를 하는데 매너리즘에 빠져있어요. 모두가 주체가 되려는 것도 연합 사업을 어렵게 하는 점이에요. 무분별한 비판자들도 큰 걸림돌이에요. 자기들은 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비판하는 일이 있거든요. 선교는 열매로 말하는 거겠지요.

르완다 교회를 일치하게 하는 일도 어려웠어요. 전쟁 때는 교회간에 목사까지 죽이고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그 연합이 이루어지고 우리 단원들도 연합이 이루어졌어요.
아무튼 저는 한국교회가 연합으로 선교를 해야 소모하지 않는 효과적인 선교를 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교파가 다 다른 목사와 성도들이 모여 한 가지 일을 한마음으로 이루어 낼 것입니다. 글로벌 시대. 네트웍 시대의 선교 모델이라고 생각해요.

경제적인 것도 어려운 점이긴 하지만 참으로 놀라운 방법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이번 달에 45만 달러를 만들어야했어요. 불가능한 일인데 언제나 그랬듯 하나님은 꼭 이루셨습니다. 이미 티셔츠 25만장(40피트 컨테이너 세 개)이 수송되었고. 성경 2만 권이 주문되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가르친 복음성가 11곡이 르완다 말로 불려져(오페라 캘리포니아 유스 콰이어) CD로 출판되었어요. 1만개는 테이프로 르완다의 선생과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전달 되요. 이거 굉장한 일이에요. 르완다의 모든 차량과 운전사들에게 테이프를 무료로 줄거예요. 그러면 매일 차에서 틀어놓고 다닐테니까요. 한국 어린이들이 부른 르완다 찬양집. 신나잖아요.

7.르완다의 어린이들은 지금?

르완다는 10대 빈국중 하나. 그 어린이들의 어려움은 어떻게 말로 할 수도 없어요.
산골에서 맨발로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먹을 것 제대로 못 먹고…밤마다 기침에 시달리고 말라리아에 걸려도 약 하나 살 돈이 없고 알코올 한 방울이면 나을 상처에서 고름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등록금을 못 내면 무정한 선생님은 집으로 가라고 하고.

피그미족들은 너무 돈이 없어서 일년에 2달러 정도의 등록금과 교복(10달러)을 살 수 없어 학교는 생각도 안해요.
이런 가난이 싫어서 많은 어린이들이 집을 뛰쳐나왔어요. 키갈리 거리에는 많은 어린이들이 있어요. 멀쩡한 대낮에도 우유병을 코에 처박고 있어요. 본드를 하는 중이에요. 아무거나 먹어도 맛이 있고 그래야 밤에 편안하게 잘 수 있다고 해요. 정부에서도 대책이 없어요.

8. 아프리카에서 축구는 인기 있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이 축구예요. 비닐을 주워다 모아서 끈으로 둥그렇게 묶으면 공이 되니까요. 그래서 어린이들이 축구를 좋아해요. 어려서부터 했으니까 몸이 유연해서 잘해요.
아마 월드컵이 끝난 뒤라 할렐루야 팀 경기에 많은 사람이 모일 거예요. 일곱 경기를 하니까 할렐루야 팀 덕분에 최소한 10만 명의 사람이 모여요. 그때 주님을 소개할 거예요.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할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