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9월 7일
본문: 빌립보서 3:1~16
설교: 이수영(새문안교회 담임)
제목: 가장 고상한 지식

▲이수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많이 들은 말 중의 하나가 "아는 것이 힘이다"입니다. 오늘날은 지식이 곧 돈이고 권력이라 해야 할 정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가장 고상한 지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 신자들에게 가장 고상한 지식이 무엇인지 가르치기를 먼저 그 교회 안에서 자기의 반대자들이 가르치는 것을 경계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반대자들에 대한 그의 공격은 처음부터 신랄합니다. 본문 2절을 봅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여기서 "개들"이라 한 말은 시골에서 배회하며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굶주린 개떼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썩은 고기도 먹는 청소동물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개들"이란 말로 지칭한 자들은 그를 단순히 따르기만 하면서 그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으로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자들을 훔치는 데 열을 올리는 자들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유대인의 율법을 따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며 그 가르침 때문에 실족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유대파 기독교 선교사들을 경멸적으로 일컬어 한 말입니다.
 "행악하는 자들"이란 무슨 범법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에 의한 구원이라는 교리에 사로잡혀있고 선행을 하는 데 모범적인 삶을 산다고 자부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을 가리켜 행악하는 자들이라 한 것은 그들이 복음을 방해하고 참된 믿음의 이해에 걸림돌을 놓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몸을 상해하는 일"은 육체에 행하는 할례를 빗대서 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적대자들에 관한 말 끝에 할례파들을 언급하고는 참된 할례파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밝힙니다. 본문 3절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한다" 할 때의 "봉사"라는 말로 옮겨진 단어는 사람들에게 하는 봉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 봉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겉으로 율법을 따르는 율법주의에 대비된 내적이고 영적인 예배를 말합니다. 참된 예배는 성령에 힘입어 드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성령의 역사로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 알고 그 지식과 신앙고백 위에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랑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도 자랑할 것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거저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신뢰한다"는 것은 앞선 말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한다"는 것과 완전 대비되는 것입니다. "육체"란 우리의 몸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상태의 모든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것과 죄의 주체를 가리키기도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육체에 행하는 할례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보증이 되지 못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기도 하고, 또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결단과 노력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기도 합니다.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 됨에 있어서 우리의 신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곧 할례파라"는 것은 "우리가 진정한 할례파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참된 할례파는 할례를 육체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곧 성령을 따라 참된 예배를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자랑하고 오직 그만을 신뢰하는 사람이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이며 참 할례파라는 것입니다.
 
일단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도 바울은 이어서 그 말을 뒤집는 듯한 말을 합니다. 본문 4절에서 말하기를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한 것입니다.
 "나도"라고 한 것은 사도 바울에게 적대적이며 경쟁관계에 있던 선교사들이 자기들의 유대교 전통을 자랑하는 데 대하여 사도 바울 또한 그 면에 있어서 조금도 뒤질 것이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3절에서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의 적대자들의 입장과 그들의 기준에서 볼 때 그들만큼 신뢰하고 자랑할 만하지 못해서가 아님을 밝히는 것입니다. 구원 받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것이라는 뜻으로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지 그의 경쟁자들이 갖고 있는 육체에 대한 신뢰 같은 것은 자기에게도 얼마든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예를 본문 5-6절에서 열거합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유대교의 율법과 전통을 엄격하게 준수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제시한 여러 가지 사실은 그가 유대인의 땅이 아닌 이방 땅 길리기아 다소에서 출생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유대인으로서의 순수성과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할 경우에 대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또한 그가 히브리어 성경을 완벽하게 읽고 이해할 수 있음을 밝힘으로써 그의 율법이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베냐민 지파 사람임을 굳이 밝힌 이유는 베냐민 지파가 이스라엘이 남북의 두 왕국으로 갈릴 때 다른 열 지파와는 달리 유다 지파와 함께 끝까지 다윗 왕가에 충성을 바쳤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바울로 불리기 전의 이름이 사울이었던 것도 이스라엘 민족의 첫 왕 사울이 같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라." 함은 사도 바울의 삶이 가장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는 전통을 따랐음을 강조하는 말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6절에서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하는데 1세기의 유대인들은 종종 하나님과 민족에 대한 그들의 열심을 외국의 종교와 법에 어떻게 반대했는가 하는 것으로 판단하곤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낯선 종교집단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하며 박멸하려 했던 사실과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함에 있어서 흠 없었음을 하나님과 민족에 대한 자신의 열심의 증거로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완벽하며 죄가 없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앞선 5절에서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한 것처럼 바리새인의 기준에서 볼 때 어느 바리새인에 못지않게 흠잡을 데 없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자기 자신이 그 어떤 유대인에 못지않음을 내세운 것은 그것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실상 자랑할 것이 못되며 진정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봅니다. 본문 7-9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냥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라고 합니다. 즉 나의 주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하는 지식입니다. 그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상하다"는 말은 최고로 좋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뿐 아니라 그가 나의 주님이심을 아는 지식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 지식의 위대함은 모든 것을 능가한다는 것입니다. 그 지식 앞에서 다른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해로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없어져야 할 것처럼 버려야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8절 끝의 "그리스도를 얻는다"는 말과 9절 첫머리의 "그 안에서 발견된다"는 말은 사실상 같은 뜻입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을 아담 안에 있든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롬5:1-21).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죄와 형벌과 죽음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영생의 약속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음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의인으로 인정받습니다. 그의 의를 덧입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혀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9절입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본문 8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은 자기의 주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그렇게 아는 것은 그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부활의 권능도 경험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의고난과 죽음에도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런 그의 바람을 나타낸 것이 본문 10-11절의 글입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부활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어떤 죽음을 죽을지가 불확실했을 뿐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라는 말은 그의 부활의 방법에 관해서 한 말이 아니고 어떤 죽음을 죽을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처형을 당해 죽든 자연사를 당하든 부활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와 같이 부활에도 이르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사는 부활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셔서 영광스러운 상태에 계신 그리스도와 같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울을 붙잡으셔서 그 목표를 향하게 하셨지만 아직 그 목표에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아직 얻어야 할 것을 잡지 못했고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갈 뿐이었습니다. 그 상태를 말하는 것이 본문 12-14절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사도 바울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하는 것은 그와 논쟁을 벌인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의 믿음이 목표점에 도달했고 완전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확실한 것은 자신의 부족하고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르시고 붙들어주셨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자기를 부르시고 붙들어주신 주님께서 자기에게서 원하시는 일은 아직도 이루어가야 할 앞에 놓인 과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스스로 온전하다고 여기는 자들에 대한 경고와 권면을 잊지 않습니다. 본문 15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앞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한 바울이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이라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온전히 이룬 자들"이란 "성숙하게 생각하며 성숙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스스로 온전히 다 이루었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또는 반어적으로 스스로 온전히 다 이루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한 말로도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이라 한 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건 거짓 교사들이건 사도 바울과 달리 잘못 생각한다면"이란 뜻입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또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그들에게 드러내 보여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잘못 생각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실 것이라고 말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신자들에게 지금까지 걸어온 그 자리에서 같은 방향으로 계속 행진할 것을 권면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그대로 행할 것이라." 한 말의 본뜻은 "질서 있게 걸어라", "훈련받은 대로 걸어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은 빌립보 교회 신자들이 각각 거짓 교사들에게 현혹되어 흔들리지 말고 그에게서 듣고 배운 대로 바르게 행하라는 뜻이기도 하고, 또한 교회 전체가 잘 훈련된 집단으로서 어떤 그릇된 가르침 때문에 나뉘지 말고 하나 됨을 유지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가장 고상한 것, 최고로 좋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아는 것은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일을 했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아는 지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유익했고 자랑스럽던 일들이 다 배설물처럼 여겨지는 근본적 변화가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와 함께하며 그를 닮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참된 할례파들로서 하나 되어 흔들리지 않고 우리가 달려갈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새문안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