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교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로,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떠나가시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자 불안해하며 근심하였다. 예수께서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요 13:23)고 하셨다. 이에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고, 예수께서는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 13:36)고 하셨다. 그러면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고 하시며 본문 말씀을 전해주셨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제자들이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 준다.

둘째로, 예수가 누구이신가를 선언한 내용이다. 예수께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심은 복음의 핵심이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요한복음 다른 곳에서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는 것”(요 10:10)이라고 말씀하셨다. 풍성한 생명을 얻는 방법은 하나님께로 나가는 것인데,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야만 가능하다.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이시다. 하나님께 나가는 길은 창조 때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길이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막혀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가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 되신다는 것은 십자가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의 해결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나갈 수가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 점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베드로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전한 설교 내용 속에 잘 요약되어 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 없음이라”(행 4:12) 예수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the only way)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되시는 예수께서는 또한 진리가 되신다. 헬라어로 ‘알레테이아’인 진리는 히브리어로는 ‘에메트’이다. 히브리어 ‘에메트’의 기본적 의미는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시켜준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것을 ‘가치관’이라고 부른다. 가치관으로 흔히 꼽히는 것은 돈, 지위, 명예, 건강, 가족, 사랑하는 사람, 친구 등이다. 모두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소중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마지막까지 우리를 지켜줄 본질적인 가치는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세상을 살면서는 유용한 것들이지만,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무두 다 버리고 가야 할 것들이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죽음을 뛰어 넘어 마지막까지 우리를 지켜줄 진리는 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까지 우리를 지켜줄 진리이시다.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이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히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진리가 되시는 예수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우리는 외적 신분으로는 자유인일 수 있다. 그러나 죽음과 죄의 문제, 미래의 불확실성과 그것에 따르는 불안감,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충족되지 않는 영적 갈증 등은 우리들을 얽매이는 요소들이다. 진리의 말씀되시는 예수께서는 우리들을 그런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주시는 예수는 삶의 목표요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바라보며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히 12:2). 다른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적으로 낡고 없어지지만, 예수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끝까지 우리를 지켜주시며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진리이시다. 우리는 절대 신뢰를 갖고 믿음으로 예수를 바라보며 끝까지 따라가야 한다.

길과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생명이 되신다. 헬라어로 생명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비오스’로서 생물학적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조에’로서 영원한 생명이다. 전자는 살아 숨쉬는 목숨으로서의 생명이고, 후자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거듭난 부활의 생명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이 두 생명을 ‘겉사람’과 ‘속사람’으로 구분하기도 했다(고후 4:16). 예수께서 말씀하신 생명은 ‘비오스’로서의 생명이 아니고, 죽음을 뛰어넘는 ‘조에’로서의 생명 곧 영원한 부활의 거듭난 생명이다.

예수께서 자신을 ‘생명’(조에)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들에게 거듭난 ‘조에’ 생명을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라는 뜻이다. 거듭난 생명의 소유자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목적을 바르게 알 수 있고, 참된 보람과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 거듭난 생명과 함께 주어지는 삶의 원동력이 기쁨과 감격이다. 그러므로 참 생명의 소유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격으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며, 어떤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미래의 희망과 비전을 가꾸며 살아간다.

살아 있는 생명의 특징은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이다. 겉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낡지만, 거듭난 생명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면서 성장과 성숙을 이어간다. 영적 영양분만 제대로 공급한다면, 생명의 성장은 멈추지 않고 지속된다. 부모는 다른 어느 것보다 자녀의 성장을 즐거워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 성장과 성숙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며 우선적으로 바라시는 기대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정체성으로 제시하신 길과 진리와 생명, 이 셋은 서로 구별되는 세 요소가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역할을 하시는가를 설명해준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고, 진리의 말씀으로 삶의 바른 목표와 방향을 설정해 주셨으며,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며 날마다 새롭게 성장시켜주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주시는 분이시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구약신학회 회장,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