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늦은 감이 있지만, 헌신의 계절을 지나면서 헌신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헌신이란 개인적으로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땀과 수고를 타인을 위하여 소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수고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때에 이것을 헌신이라고 한다.

필자는 요즘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고 있다. 보통 우리의 헌신은 종합적이고 단체적인 헌신이다. 교회의 대형 행사를 치르면서 한 부분을 맡아 수고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공적인 수고와 헌신이라고 할 수 있다. 공적인 헌신은 보통 공금 혹은 교회 재정으로 한다. 나의 수고가 정해져 있다. 시간도 정해져 있다. 나의 수고를 알아준다. 수고에 대한 열매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 흔쾌히 감당할 수 있다고 본다.

단체로 하는 일에 있어서 한 부분 봉사하고 이름을 내고, 일을 감당하는 것을 헌신이라고 하면 어쩌면 참 쉬울 것이다. 돈으로 하는 일이 헌신이라고 하면 그것처럼 쉬운 일도 없을 것이다. 의료봉사를 간다. 일정기간 단체 행사 속에 한 부분 맡아 하는 일이다. 연합활동 속에서 협력하여 한 부분을 감당하는 일은 대부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헌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이 빠져버린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섬김과 수고와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일들이 줄어들고, 헌신도 갈수록 자신에게 맞추어 편리함과 규격화, 디지털화, 형식화되는 것을 보면서 헌신의 변형(변종)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현지에서 현지목회자들의 요구와 그들을 향한 섬김에 한계를 느낄 때가 많다. 선교 초년기에는 열심이 있었다. 이리 저리 뛰면서 교제의 폭을 넓혀 나가고, 사람을 만나고, 나의 일거리를 찾으면서 헌신을 말하고 있었다. ‘헌신이란 명분 속에 나의 유익을 찾았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요즘 들어서는 게으름이 많이 생겼다. 그래서 300km, 혹은 1,000km 지방사역을 나가는 일들이 얼마나 번거로운가 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8시간 완행 버스를 타고서 가다보면 사지가 비틀리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다시 돌아올 것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지는 것이다. 의자를 뒤로 밀 수도 없는 옛날 버스, 거짓말 같은 현실이 선교지 이다.

24시간 기차를 타고서 러시아 남부 지방을 순회하면 더위와 답답함과 배고픔과 냄새 나는 열차 안이 매우 곤혹스럽다. 한 번이라고 하면 ‘이런 일도 있구나’ 하며 재미가 있을 법하다. 낭만을 이야기하며 추억거리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일이 반복되고, 그렇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횟수가 잦아지면 상황은 달라진다. 헌신한다는 것이 바로 무엇인가를 느끼게 된다.

헌신의 어려움은 무엇인가?

첫째, 재정적인 부담일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교회의 재정으로 인심 쓰듯이 하는 경우가 있다. 공동의 것을 사용하면서 내 것으로 헌신하는 것처럼 말하고 보일 때가 있다. 공적인 것이 아닌, 내가 가진 것으로 교통비와 더불어 현지 교회의 필요를 따라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

둘째, 현지 교회를 방문하여 세미나를 진행하려고 하면 생각보다 준비가 안되어 나의 노력과 기도에 비하여 매우 실망이 되는 것, 상황이 따르지 않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 일을 진행하여야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나도 생각한다. 잘 준비되고 상황이 맞아 떨어지고 좋은 환경이라면 누가 못하겠는가?

실제적인 헌신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일을 하고도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 때, 일을 하고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하는 일, 헌신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인데, 나의 시간과 물질의 헌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을 때에 얼마나 바르게 응답하는가?

나의 자존심과 불편함을 감수하여야 하는 상황에는 어떤가? 요즘처럼 살기 편한 시대에 구시대적인 불편함을 감수하는 일에 얼마나 나를 소비하는가? 여기에 헌신의 수준을 말할 수 있다.

사람을 만나고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어쩌다 한 번씩 만나고 잠깐 식사 대접하고 헤어지면 그 정도는 기쁨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숙박을 비롯하여 하나하나 모두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것도 약 2주 정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섬겨야 한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더 나아가 내 집에 모시고 섬겨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떤가? 그래서 헌신이라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삶이 풍요롭고 선진화 될수록 집에 사람을 초대하는 일이 매우 드문 것 같다. 어쩌다 한번 한국을 방문하면 개인적으로 집에 초대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개인의 사생활이 침해를 받고, 자신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고, 여러 가지로 불편함이 많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 속에 혹은 대중 속에 자신을 두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현지 목회자들이 4-5명씩 찾아온다. 종종 새벽에도 방문하고 늦은 밤에도 방문한다. 처음에는 반가움과 찾아오는 현지 목회자들이 있어서 행복함을 느꼈다. 정성껏 빵과 차를 대접한다. 그것이 반복되고 또 우리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룻밤씩 머물고 갈 때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개인의 삶을 방해받는다는 것이 귀찮고, 나의 삶의 리듬이 깨어지는 것이 싫어지고, 게다가 온통 어지럽히고 질서를 흐트러놓는 것이 은근히 짜증이 나는 것이다. 삶의 안정감을 얻었다는 것인가? 헌신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고, 지극히 기본적인 의무감만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마음을 갖는다.

한국교회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들으면 안심이 된다. 헌신을 말하고 요청하고 희생의 삶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헌신의 삶이 얼마나 따르는가 살펴보면, 이 헌신과 희생의 요청이 지극히 강단용, 혹은 교인들에게는 예배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스친다.

요즘은 목회자들이 사람에 대한 관심(헌신)이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대형교회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렇고, 중형교회는 안정감과 편리함에 빠져서 그렇다. 소형교회는 숫자를 채우기 위한 공적인 관심은 있다. 그러나 진정한 영혼에 대한 관심이나 개인적인 관심은 거의 없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자신의 일에 지장을 받고, 자신의 관심 밖의 분야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기본적인 헌신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 대한 자랑이나 말거리를 내놓는 경우는 흔히 보게 된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관심이 없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여기에서 무슨 헌신이 나올 것인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헌신의 기본은 배려이고, 희생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자신의 것으로 섬기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헌신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목회자로부터 헌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새로워져야 하고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세상은 편리함을 누리는 리모콘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헌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갈수록 헌신은 형식화되고, 공동화 되고 공식화되어 간다. 그래도 보이지 않는 수고와 땀을 흘리는 이들의 헌신 속에 한국교회가 이정도 유지되고 있음에 감사한다.

Sergei(모스크바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