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비우신 그리스도의 사랑 담아
기독교 문화 뿌리, 예수님 삶과 사역
기독교 무관심 또는 반감 가진 이들
미술 작품이 마음 열 기회 제공할 것

이도선
▲이도선,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 73x50.2cm, 캔버스에 혼합재료, 2023.
이도선은 40여 년간 교직에 몸담으면서 창작생활을 줄곧 이어왔다.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의 작업은 대체로 등대, 사람, 깃발, 나무 등 유년의 기억이나 마음 속 풍경을 길어올린 것들이며, 들판과 산을 가로지르는 길들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설렘으로 가득 찬 길이기도 했다.

2015년 교직에서의 퇴임을 계기로 성경의 서사를 조형으로 풀어낸 회화를 선보인 이후, 올해에는 밀알미술관(10. 10-16)에서 ‘성경 속의 풍경’, ‘믿음의 영웅들’, ‘오 예수’를 테마로 한 연작을 발표하였다.

퇴직 이후의 작품을 망라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동안의 작품 추이를 조감할 수 있어 좋았고, 밀도 있는 바탕과 짜임새 있는 구성 등은 그의 작품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이중에서도 눈길을 끈 작품은 ‘오 예수’ 연작 중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이란 작품이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었다고 했으니,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남편이 문제가 있었든지 여인에게 문제가 있었든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분명 일반적인 결혼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한낮에 물을 길으러 온 것만 해도 짐작이 간다. 이러한 사정을 아시고 예수님은 수가성의 여인을 만나셨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서 메시아를 만났다고 알린다.

화면을 보자. 우물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그리스도, 오른쪽에는 사마리아 여인을 배치시키고, 배경에 몇몇 인물들이 낙심한 듯 고개를 숙이거나 주위의 눈치를 보고 있다. 여인은 손을 펴서 그녀의 목마름을 호소하고 있고 예수님은 그에 대한 답을 알려주고 있는 장면이다.

이 주제는 역대 화가들에 의해 애용되어온 소재인 만큼, 이도선은 그림에 새로운 시각을 부여하고자 했다. 사실적 재현을 피하고 기하학적으로 구성한 것이나 인물 표현을 가로세로로 엮어 모자이크처럼 나타낸 것 등은 지금까지 보아온 도상과 다른, 그만의 창의적인 표현법으로 생각된다.

이도선
▲이도선, 달리다 쿰, 소녀여 일어나라, 73x50.2cm, 캔버스에 혼합재료, 2023.
<달리다 쿰, 소녀여 일어나라>는 죽어가는 소녀를 살리는 장면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가버나움 회당의 지도자이자 종교 지도자인 야이로가 예수께 와서 죽기 직전 자신의 외동딸을 고쳐주시기를 간청하는 장면이다. 그리스도는 소녀의 머리에 손을 얹어 치료하고 있다.

예수님 사역 당시에 사마리아인들은 열두 지파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유대교의 주류신앙 밖에 존재했던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사회적·종교적·인종적으로 차별을 당했고, 유대인들에게는 이류 시민으로 지탄을 받았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연루되는 것만으로도 사회적으로 치명적인 공격을 받았다. 화면 후경에 제자들이 웅성거리는 것은 이 사실이 알려지면 자신들에게 이롭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확실히 예수님의 사역 중에 만난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은 축복이었다.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셨고 관리의 딸을 죽음에서 살려주셨으며, 왕의 신하의 병든 아들을 고쳐줌으로써 축복하셨다.

심지어 예수님은 투옥, 고문을 당했을 때조차 가해자에게 어떤 비난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함으로써 그들을 축복하셨다.

제임스 헌터(James D. Hunter)는 이 세상 나라와 다르게 그 분의 나라는 축복하고 짐을 내려놓고 봉사하고 섬기고 치유하고 회복하는 진짜 권력이 무엇인지, 즉 새로운 왕국의 실제적 현존을 제시하셨다고 보았다.

힘의 과시와 권력 추구는 하나님 나라의 일부가 아니며, 그것들을 동원해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기독교 문화의 원형이 성경의 가르침에서 기원한 모델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도선은 죄인들을 섬기는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을 작품 속에 담고자 했다. 만일 예수님이 여론 동태를 살피셨다면, 비탄의 삶에서 구원의 삶으로 바뀐 사마리아 여인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자신을 비우시는 사랑(self-emptying love)’이야말로 구속자의 성정을 보여주는 특징이다.

우리가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미적인 가치’ 또는 ‘지적 욕구’, ‘탁월한 솜씨’ 등 여러 가지 요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에 ‘교육적 가치’를 덧붙이고 싶다.

미술 작품을 잘 감상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배경과 줄거리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려면 미술 작품의 주제가 무엇이고 그림의 독특성은 어떤 것인지, 그것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기독교에 우호적이지 않은 풍토 속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성경의 서사에 기초한 그의 작품이 기독교에 무관심하거나 반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역시 SNS로 지인들에게 정규적으로 작품 이미지를 발송하고 있는데, 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하는 비신자도 밝고 아름다운 화면에 관심을 드러낸다고 한다.

시각적 이미지를 주요한 소통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일반화된 시대에 그림을 손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생명 존중에 기초한 문화 확산을 위해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보는 것이 제일 좋지만, 일과에 쫓기는 사람들에게는 이만한 예술 향유의 기회도 없을 것이다.

서성록 안동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