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브뤼헬
▲16세기 플랑드르 화가 브뤼헬의 1598년작 ‘산상설교’.
본문: 요한복음 7장 43-47절

주님의 체포에 관한 장면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포박하려고 계획합니다. 아랫사람 몇 명을 선발하여 주님을 체포해 포박하여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있는 관가로 데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본문을 배경으로 ‘체포의 실패’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손을 댈 수 없었다
주님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애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43-44절)”.

주님을 잡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이 말은 본문의 역사적 상황을 알면 더 이해가 됩니다. 주님을 체포하려는 당시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체포하려는 시도는 매우 규모가 있으면서 계획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체포할 시도를 하다 안 되면 말고” 정도가 아닙니다. 대단히 거대한 체포계획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서로 기득권 세력입니다. 그런데 이 두 파는 부활과 천사 등의 문제에서 서로 다른 교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교리의 차이 때문에 서로 연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합하게 됩니다. 주님을 체포하려는 계획에서는 서로 합하게 됩니다. 주님을 체포하려는 계획이 얼마나 대대적인 것을 보게 만드는 모습입니다. 엄청난 음모가 대대적으로 진행되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주님을 체포하려 했는데, 불가항력적인 힘이 작용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내면에서 작용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손이 묶인 것처럼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2. 말씀에 엄청난 권세가 있었다
주님의 말씀에 특별한 권세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으냐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45-46절)”.

의기양양하게 주님을 체포하러 갔던 하속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을 체포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왜 잡아오지 못하고 왔느냐?”의 말에, 그들은 있는 그대로 경험을 전합니다. 지금까지 이 사람처럼 말한 사람을 처음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팔이 마비된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엄청난 권세가 있었다는 말을 그렇게 했습니다. 이는 하속들이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에 설득을 당하고 빈손으로 돌아와야만 했던 것입니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하속들이 전하는 말은 일반적인 보고가 아닙니다. 그들의 말은 순박한 사람의 숭고한 간증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직접 현장에 가서 주님의 가르침을 들어보니 놀라운 가르침이라는 깨달음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현장에서 주님 가르침의 심오함을 경험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그들은 놀라운 신비와 투명한 순수함을 체험한 것입니다. 갑자기 마음에 울림이 오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하속들의 마음을 은혜로 사로잡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속들은 “이제까지 이 사람처럼 말한 사람은 없없다”고 말하게 됩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의 비범함에 대해 그대로 실토한 것입니다.

3. 미혹된 결과가 아니었다
미혹이 되어서 못 잡아온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47절)”.

“너희도 미혹되었느냐?”는 주님을 체포하러 간 하속들이 빈손으로 온 것을 보고 종교지도자들이 한 말입니다. 아마도 빈손으로 온 하속들을 보면서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미혹(迷惑)되다’를 사전에서 찾으면, 이렇게 나옵니다. “사람이 무엇엔가 마음이 흐려지도록 홀렸다. 사람이 정신이 헷갈리어 갈팡질팡 헤맨다”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하속들이 수준이 낮아서 미혹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속들이 전하는 진한 감동의 경험을 완전히 무시한 것입니다. 그들이 현장에서 직접 했던 놀라운 신비스런 체험을 비웃은 결과입니다.

그런데 하속들의 마음에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당신들이 직접 현장에 가서 들어보시오!”라는 마음의 외침입니다. 주님을 체포하려는 반대자들의 악의는 합리적인 이성(理性)에 반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그런 악의가 유지되는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작금의 이태원 참사에서 보듯 “저런 사람들이 어떻게 국가의 고위 공무원인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책임자들은 압사사고의 간곡한 요청에도 전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젊은이들이 그렇게 많이 희생되어 죽었는데도 미안한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죄송하다”는 사과는커녕 책임만 회피하려는 면피성 발언만 쏟아내느라 바빴습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보면서, 참사를 대하는 고위직들의 인간미 없는 모습이 오버랩되어 마음이 슬펐습니다.

김충렬
▲김충렬 박사.
4. 정리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 중에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트라우마(정신적 상처)로 남는 사건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대개 작은 민초들의 외침을 무시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가는 인생의 길에 주님을 믿음으로 체험하여 놀라운 축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 우리는 주님이 신비한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믿게 하소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엄청난 능력이 있음을 믿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신비를 체험하게 하소서. 부활하신 주님은 아직도 살아계심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축복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충렬 박사
전 한일장신대 교수
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문의: www.kocpt.com
상담: 02-2202-3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