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급자족하며 집중할 수 있는 화가 공동체 꿈꾸며 그려
동료 화가들 향한 기대, 강렬하고 뜨거운 화풍으로 표현
하나님 말씀과 은총 받아들이는 마음에 귀 기울인 소망
‘광기의’ 반 고흐? 주만간산식 해석, 그는 ‘성경적’ 화가

반 고흐 해바라기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캔버스에 유채, 73 x 92.1cm, 1888년, 런던 내셔날 갤러리)’.

빈센트 반 고흐는 1888년 2월 남부의 빛을 쫓아 프로방스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반 고흐는 자신의 회화를 성숙시켜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그는 먼저 작은 집을 빌려 노란색으로 단장한 후, 해바라기 꽃 그림으로 장식하였다. 이 작품은 <해바라기> 연작 가운데 하나로, 반 고흐에게 ‘태양의 화가’라는 호칭을 안겨준 작품이다.

<해바라기>는 색채, 특히 노란색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그림이다. 그림을 그리기 며칠 전에는 작열하는 남부의 태양을 동생 테오가 직접 와서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표시했다.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했지만 나는 태양의 빛줄기를 보며 노란색, 옅은 유황색과 레몬옐로, 금빛이란 말이 생각났을 뿐이다. 얼마나 노란색이 아름답던지”(1888년 8,13일)
반 고흐에게 노랑은 무엇보다 희망, 기쁨과 설렘을 반영하는 색이다.

그가 사용한 원색은 생경하지 않고, 우아하고 매력적이다. 대상에 대한 공감에 기초한 정서를 바탕으로 리드미컬한 붓놀림과 순도 높은 색채를 접목시켰다.

노란색은 처음에는 남부 아를의 햇살에서 시작되었지만, 해바라기에서도 역시 그것에서 받은 감동은 전혀 반감되지 않았다.

<해바라기>는 특별한 의도를 지니고 제작된 것이다. 고흐는 이전부터 화가 공동체를 꿈꾸고 있었다. 화상의 도움 없이 자급자족하면서 예술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소망했던 것이다.

“12명의 라파엘 전파와 비슷한 성격을 띠는 인상파 화가들의 공동체 결성은 꼭 실현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화가들이 공동체에 일정 분량의 그림을 제공하고 그에 따른 손실뿐 아니라 이익도 공동으로 소유한다면, 서로의 생활을 보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화상들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1888년 6월)

구체적으로 그는 피사로, 고갱, 베르나르와 같은 화가들과 아를에 화가 공동체를 건립하려고 했다. 혼자 사용하기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넓은 공간을 프로방스의 중심가에 임대한 것은 예술가들을 초대해 당시 브르타뉴의 퐁타방(Pont-Aven)에 설립된 화가공동체와 유사한 것을 조직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첫 시도로 폴 고갱(Paul Gauguin)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를 위해 <해바라기>를 제작한 것이다.

“나도 마르세유 사람들이 부야베스 생선수프를 먹는 것처럼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어. 지금 내가 커다란 해바라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놀라지는 않겠지. … 고갱과 함께 살게 된다고 생각하니 아틀리에를 장식하고 싶어졌거든. 오직 커다란 해바라기로만 말이다.”

그림은 동료 화가에 대한 기대와 설렘의 감정을 담고 있어 강렬하고 뜨겁다. 그림에는 우정과 환대와 같은 감정이 실려 있는 셈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그림을 그리고 싶다. … 사람들이 내 작품에 대하여 ‘그는 철저하게 느끼고 있구나, 민감하고 다정하게 느끼고 있구나’ 하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진척 숙달되고 있다. … 이것이 바로 그런 모든 소리를 듣는다 해도 분노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바탕을 둔 나의 큰 뜻이자 희망이다.”

세밀한 감정은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었다. 고흐는 산책을 하면서 주위 것들의 독특한 표정과 자세를 발견할 줄 아는 안목을 지닌 사람이었다.

가지 잘린 버드나무 행렬에서는 구빈원에 줄지어 있는 사람들을, 어린 옥수수는 너무나 순수하고 유연해서 잠든 아이의 표정을 보는 것같은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길섶의 짓밟힌 풀은 빈민가의 주민들을, 눈 내린 밭의 양배추는 이른 아침에 온수와 석탄을 파는 작은 상점 앞에 서 있는 낡은 숄을 뒤집어쓴 여인들을 연상할 정도로 그는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사물들은 때때로 무언가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니며, 모든 자연이 말하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래서 “볼 눈이 있고 들을 귀가 있으며, 파악할 마음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연이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듣게 하신다”고 했다.

예술은 조셉 콘라드(Joseph Conrad)가 말했듯이 그 자체가 선물인 우리 존재의 일부에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술가처럼 우리의 은사를 고백할 능력이 부족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창조적 대리인을 통해 우리 존재의 자질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게 된다.

H. R. 그레츠(H. R. Graetz)의 말처럼, 해바라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태양 같고 혹은 빛 같은 것들은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 동생 테오와 고갱, 베르나르, 그리고 그가 친밀감을 느꼈던 사람들에 대한 호의를 상징한다.

네덜란드의 목사이자 시인 엘리자 로릴라드(Eliza Laurillard)는 반 고흐의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이 시인(엘리자 로릴라드)이 ‘여호와 하나님은 해(시 84:11)’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이다. 우리는 태양 빛이 우리의 가정과 정원에서 생명과 풍성함을 가져오듯, 그것이 우리의 영혼과 가슴에 비추기를 소원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 마음은 빛줄기의 조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부단히 위대한 빛을 향하면서 해바라기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로릴라드의 말은 고흐의 해바라기 작품에 담긴 의미를 잘 기술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은총을 받아들이는 마음에 귀를 기울 수 있도록 하는 소망을 담고 있다.

그의 인생 자체가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목회자의 꿈에서 고흐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빚진 자의 마음 때문이란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이 세상에 빚과 의무를 지고 있다. 나는 30년간이나 이 땅 위를 걸어오지 않았나! 여기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림의 형식을 빌려 어떤 기억을 남기고 싶다. 이런저런 유파에 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진정으로 표현하는 그림을 남기고 싶다. 그것이 나의 목표다.”(1883. 8. 4-8일)

반 고흐를 ‘광기의 화가’로 치부해 버리는 사람을 볼 수 있지만, 이는 주마간산(走馬看山)식 시각에 불과하다. 그는 누구보다 성경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았고, 사람과 자연에 대해 속깊은 이해력을 지닌 화가였다.

<해바라기>는 하나님에 향한 기대감과 인간에 대한 신뢰감을 나타낸 역작 중의 한 점이다.

서성록
▲서성록 교수.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