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가 낡은 신발 그리는 것, 흔치 않은 일
하이데거, 게르만 여성 건강성 그렸다 주장
샤피로는 반박하며 도시 노동자 소유 추측

반 고흐 선교사로 일하던 시절 착용한 구두
상처 많은 노동자에서 찾아낸 예수님 얼굴

화가 고흐, 국경 너머 그리스도의 사랑 전해

반 고흐 낡은 구두 한 켤레
▲반 고흐, 한 켤레의 신발(캔버스에 유채, 37.5 x 45cm, 1886, 반고흐 미술관).
오랜 기간 기독 미술계를 지켜온 안동대 미술학과 서성록 교수님께서 ‘한 점의 그림’을 통해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서 교수님은 과거 본지에 ‘명화감상’, ‘렘브란트를 찾아서’ 등을 연재하셨고, <렘브란트의 거룩한 상상력>, <미술관에서 만난 하나님>, <한국의 현대미술> 등을 집필하셨으며 최근 기독 미술 전문가들과 <여섯 개의 시선>을 펴내셨습니다. 여기서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를 분석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성록 교수님은 개혁주의 예술론 연구를 이어오면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초한 미학 연구와 기독교 예술의 공적 역할, 예술 분야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회복하는 운동에 힘을 쏟고 계십니다. -편집자 주

드 라 파이으(de la Faille)가 발간한 ‘반 고흐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é)에 의하면, 고흐는 구두와 나막신 등 신발 그림을 총 8차례에 걸쳐 제작했다.

참고로 ‘카탈로그 레조네’(전작도록)란 화가의 작품뿐만 아니라 삶의 기록까지 일체의 사실을 모은 도록을 말한다. 작가 연구에 필수적인 정보와 사실들을 집대성한 요긴한 자료집인 셈이다.

그 자료집에 따르면, 고흐는 1886년 이전에 농부들의 나막신 작품 두 점을 그린 적이 있다. 그것은 테이블 위에 다른 물건들과 함께 배치한 구도를 취해, 신발 자체만을 모티브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낡은 신발 한 켤레>(1886)는 고흐가 파리에 머물 때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고흐가 왕성하게 동시대적 미술 흐름을 익혀가던 무렵이었으나, 이 작품만큼은 예외적으로 당시의 영향에서 비껴나 있다.

화가가 낡디 낡은 신발을 그리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런 누더기 신발은 그림 모티브로 그다지 탐탁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발은 마구 헤지고 더러워져 있다. 더 기본적으로 신발은 이동을 도와주는 기능적인 도구에 불과할 뿐, 예술가의 눈길을 받을만한 매력적인 요소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화면 왼쪽의 찌그러진 구두는, 그림자가 떠받쳐주지 않았다면 더 보잘것없는 존재로 추락해버렸을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고흐가 이 그림을 왜 그렸을까 하는 문제로 옮겨간다.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구두를 그렸으므로, 그림에는 필시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다.

먼저 이 그림에 주목한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였다. 그는 1930년 암스테르담에서 이 그림을 보고 자신의 저작 《예술작품의 기원》에서 이 구두가 ‘농부 아내의 구두’라고 단정 지었다.

“농부의 아내는 밭에서 구두를 신고 있다. 오직 여기에서 그 구두는 진면목을 보여준다. 농부의 아내가 일하는 동안 구두를 전혀 내려다보지 않고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수록 구두는 더욱 더 충실하게 본래의 모습을 띤다. 그녀는 구두를 신고 서 있다.”

하이데거의 주장에 반론을 편 것은 미국 미술사학자 메이어 샤피로(Meyer Schapiro)였다. 그는 이 그림이 1886년 파리에서 그린 것이고 그림 속의 신발은 화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농부 아내’의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샤피로는 1968년에 발표한 논문 〈개인전 사물로서의 정물화- 하이데거와 반 고흐에 대한 노트(The Still Life as a Object - A Note on Heidegger and Van Gogh)〉에서 만일 그림의 주인공이 농부 아내였다면 축축한 땅에 맞게 나막신을 신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림에서 보듯 발목까지 올라오는 가죽신발로 보아, 이것은 도시 노동자의 신발이었으리라고 추론하였다. 샤피로는 하이데거나 아리안 민족의 ‘농부와 땅과 피’ 신화에 대한 근거를 ‘낡은 구두’에서 찾고 있다며 그를 비판하였다.

샤피로가 그림의 주인공을 찾아준 것은 미술사학자로서 본분을 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예술가가 자신의 낡은 구두를 그림의 주제로 고립시키는 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그 자신의 운명에 대한 관심사를 표출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런데 그런 논의가 우리의 궁금증을 채워주는 것은 아니다. 정작 샤피로조차 제작 경위랄까 그림의 동기까지는 밝히지 못했던 것같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왜 이 그림을 그렸는가 하는 문제를 규명하는 일일 것이다. 즉 이 작품을 통해 고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밝히는 문제가 숙제로 남아 있다.

샤피로는 그의 논문에서 고흐와 관련된 의미 있는 자료를 찾아냈다. 반 고흐가 아를에서 고갱과 방을 같이 쓰고 있었을 때, 고갱과 나눈 대화 내용이 그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그리고 그의 권고에 따라 나는 미래의 직업을 준비하기 위해 신학공부를 시작하였다. 젊은 목사로서 나는 어느 맑은 날 아침 가족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노동자들에게 복음을, 내가 배운 대로가 아니라 내 스스로 이해한 대로 전하기 위해 벨기에로 떠났다. 당신이 보는 이 구두는 그 여행의 수고를 용감하게 견뎌냈다(샤피로, 1968).”

다시 말해 이 구두는 선교사로 일하던 보리나주에서의 삶을 증거하고 있다. 고흐는 광부들과 어울리면서 설교는 물론이고 그들과 고락을 함께했고, 혹시 예기치 못한 사건이라도 발생하면 그들을 치료하고 보살폈다.

탄광에서 발생한 화재, 심하게 화상을 입은 광부, 그들에 대한 헌신적인 보살핌, 그의 사랑으로 광부의 생명을 구한 기억이 그림에 담겨 있는 셈이다.

보리나주 탄광은 칠백 미터 깊이의 지하에 존재하는 미로의 도시이며, 주민 거의 전부가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거기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브뤼셀의 복음전파 단체는 고흐가 자신의 임무를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이행했다는 이유로 직위를 박탈했다. 이로 인해 그가 받았을 충격과 좌절감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 시절을 최고의 장면으로 기억한다. “벨기에를 떠나기 전에 나는 얼굴에 많은 상처를 지닌 그 사람의 존재에서 가시 면류관을 보았다. 마치 부활한 예수의 모습과도 같은 환상이었지(샤피로, 1968).”

고흐의 구두는 단순한 도구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앨범과 같은 것이면서, 동시에 그의 인생 진로를 알려주는 나침반과 같은 것이었다. 그 속에는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보살피며 예수님 말씀을 전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 했던 고흐의 참모습이 아로새져져 있다.

고갱과의 대화에서 보듯, 헤진 구두는 전쟁과도 같았던 탄광촌에서의 시간과 사역자로서의 눈물어린 수고를 말해준다. 비록 자신이 뜻한 대로 성직자의 길을 가지는 못했으나, 그림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일은 계속되었다.

‘화가 고흐’가 있었기에 그가 시대를 뛰어넘고,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알리게 되지 않았나 싶다.

‘낡은 구두’를 둘러싼 논란이 지금까지도 진행중이지만, 작가의 발언만큼 진정성이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게르만 여성의 건강성을 그린 것도, 도시 노동자의 삶을 그린 것도 아니다. 자크 데리다(Jacque Derrida)가 본 것처럼 문화 권력을 놓고 벌이는 쟁투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타츠카사 고데라(Tasukasa Kodera)는 고흐가 화가가 되면서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등졌다는 엄청난 오진을 내리기도 했는데, 오히려 이 작품은 그의 신앙이 화가가 된 이후에도 변함이 없이 연속, 아니 오히려 심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라(고후 6:10)”는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은 고흐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겨갈 수 있는 힘을 성경의 진리에서 얻었다.

이 작품은 예수님의 종으로, 또 복음 전파자로 젊음을 불태웠던 반 고흐의 삶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그림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서성록
▲서성록 교수.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