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 버튼 러셀 악의 역사 4권 메피스토펠레스
▲제프리 버튼 러셀 ‘악의 역사’ 4권 <메피스토펠레스>.
그리스도인, ‘악’ 설명하고 극복해야 할 필요성과 의무 있어

메피스토펠레스: 근대 세계의 악마
제프리 버튼 러셀 | 김영범 역 | 르네상스 | 546쪽 | 24,000원

종교개혁 시대의 악마

16세기 종교개혁 시대라도, 18세기 계몽운동 이전까지는 사상적으로 중세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것은 악마에 대한 견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과학적 색채를 띄었지만 여전히 신비적인 연금술은 마술 내지는 요술과 혼동되기 십상이었다. ‘마녀’에 대한 믿음도 여전했다.

“수많은 사람이 의심을 받고, 고문을 당하거나 고문의 위협을 당했고, 아마도 십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처형을 당했을 것이다. 이노센트 8세가 칙서 ‘가장 바람직한 것에 관하여’를 발표하자 이러한 광란은 봇물 터지듯 했으며, 그 칙서는 종교재판관 스프렝거와 인스티토리스가 지은 <마녀의 철퇴(Malleus malleficarum, 1486)>라는 책의 서문에 포함되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광란은 17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이 부분은 한글 번역에 없기에 추가했다), (한글판 33쪽).”

“Millions were suspected, tortured, or threatened with torture; probably more than a hundred thousand were executed. Millions were suspected, tortured, or threatened with torture; probably more than a hundred thousand were executed. The craze reached full spate with Innocent VIII's publication of the bull Summis desiderantes affectibus, which was included by the inquisitors Sprenger and Institoris as a preface to their Malleus malleficarum(1486), a book that had enormous influence. The craze continued until the end of the seventeenth century(원서 29-30쪽).”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서로를 악마로 규정했다. 프로테스탄트에게 교황은 적그리스도 그 자체였고, 가톨릭 축귀 의식에서 악령들이 프로테스탄트의 교의를 찬양했다는 보고도 회자되었다.

루터 같은 경우, 누구보다 ‘악마’에게 관심을 쏟았던 종교개혁자였다. 루터는 누구보다도 신의 전적인 전능을 강조했고, 동시에 인간의 ‘노예의지’를 주장했다. 그의 우주 속에서 악은 어느 정도 신의 책임이 될 수 밖에 없다.

신은 악을 의지했지만, 동시에 악에 저항하는 의지를 가진 존재였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루터에게 있어서는 악도 선이다(WA 1.75; 18.708; 31/1.447). 루터는 역설적 표현을 종종 사용했다. 신은 분노이자 사랑이며, 의절이자 은총이며, 율법이자 자비이다. 루터는 말한다.

“하나님은 악마를 거슬러서가 아니라 악마 안에서 그리고 악마를 통해서 선을 행하면서 스스로 악마를 통해 존재한다(WA 15.644; 18.709; 40/3.519), (한글판 46-47쪽).”

“God does good not in spite of Devil but in and through the Devil, and God himself present in the Devil(WA 15.644; 18.709; 40/3.519), (원서 38쪽).”

루터는 강박적으로 신의 전능을 주장하면서 인간의 의지를 종속적으로 주장했고, 개인적 경험에 대한 그의 묘사들은(악마가 난로 뒤에서 소리를 낸다거나 지붕에서 견과류를 던진다거나 악취를 풍긴다거나 등), 그가 강박증에 사로잡혀있다고 볼 수 밖에 없게 한다.

종교개혁 시기는 교리문답서의 시기이기도 한데, 교리문답서들에는 예수만큼 악마가 많이 나온다.

루터만큼 유명한 또 다른 종교개혁자는 칼뱅이다. 칼뱅 역시 신의 전능성을 강조하며 악에 대한 책임도 어느정도 신에게 돌린다. 칼뱅도 루터와 비슷하게 악마의 실제를 인정했지만, 신의 심판을 수행하는 도구 정도로만 여겼다.

많지 않은 칼뱅의 악마 묘사는 중세와 비슷하며, 앞서 서술했듯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가톨릭을 악마의 유혹으로 보았다. 츠빙글리나 뮌처 그리고 재세례파 같은 기타 급진 종교개혁자들도 악마에 대한 이론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다만 1550년 베니스의 시노드에서 이탈리아의 비정통파 재침례교도들은 그런 초자연적 현상이나 존재를 거부했음을 알 수 있다).”

가톨릭은 다시 토미즘을 부활시켰고, 중요한 종교 회의를 열었다. 그것이 바로 트리엔트 공의회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악마의 존재는 기정 사실로써, 실존 여부 자체는 논의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악마로 인해 프로테스탄트를 포함한 이단이 생겨났다고 선포했다.

이 시기의 신비주의 수도사들(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 야코프 뵈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등)은 악마의 실제를 인정하고 각각 고유한 악마와의 싸움에 대해 모두 논했다.

특히 이들은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다 사탄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사탄이 환상 혹은 실제로 나타나, 수도사들은 여러 방식으로 쫓아내기도 했다는 자전적인 이야기가 유행했다.

문학계에서는 중요한 전환이 일어났다. 예를 들어보자.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최초로 악마적인 존재들을 동정적이고 심지어는 그들이 일으킨 반란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제시한 중요한 저작이었다(한글 번역 74쪽).”

“Rabelais's Gargantua et Pantagruel was the first major work to present demonic figures who are both sympathetic and even justified in their rebellion(원서 57쪽).”

<파우스트>는 비록 역사적 재구성은 어렵지만,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구성돼 많은 기독교 문화 속에서 다루어진 캐릭터이다.

파우스트에 대해 본격적으로(판타지와 전설을 가미하여) 다룬 책은 1587년, 요한 스피스의 <요한 파우스트 박사의 연대기>로써, 종종 <파우스트 서>로 알려지기도 했다.

여기서 최초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등장한다. 어원은 아마 부정어 '메' 그리고 빛 '포스, 포토스(주격, 속격)' 사랑하는 자 '필로스'(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등과 같이 헬라식 이름처럼 바꾸기 위해 필로스가 아니라 필레스로 바꾸어)를 합쳐, '빛을 사랑하지 않는 자'를 뜻하려 했을 것이다. 또한 히브리어의 '거짓말장이'를 뜻하는 토펠도 하나의 가능성이있지만, 이름의 불명확성이야말로 근대적인 악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문학작품 속 악마는 신학적 예정론과는 다른 비관적 숙명론이 지배적으로 신의 권능보다 악마의 권능이 두드러지고, 악마의 심리작용에 상당히 집중한다. 중세 연극의 광대여야 했던 악마는 낭만주의적 주인공이 됐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극단적인 익살스런 악마와 깊이 있는 인격의 악마가 동시에 문학에서 대립을 이루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악마는 모호한 유령으로 등장하여 사람들을 속인다. 그리고 악마와 인간의 악은 종종 혼동된다. 예를 들면 <오셀로>에서 이아고의 악은 루시퍼에 준하고, <멕베스>에서 멕베스는 사탄과 동일하다. 인간이 악마화되는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루시퍼와 대중문화
▲고뇌하는 파우스트와 정념으로 그를 유혹해 계약을 맺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의 주역들이다.
두 세계 사이의 악마

17세기에 들어서는, 교조주의적 기독교와 유물론적/이신론적 회의주의가 공존하던 때였다. 그럼에도 대체적으로 회의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버리기보다는 어느 정도는 기독교를 변호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려는 시대였기에, 자연계와 초자연적인 실체들과는 거리를 둔 이신론적 입장이 주류를 이루었다.

예를 들면 영국 성공회는 이미 1550년 퇴마국(the office of exorcist)을 폐쇄했고,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악은 초월적인 실체라기보다 내면적인 심리적인 갈등으로 여겨진다.

존 밀턴의 <실락원>, <복락원>은 실상 너무도 인간적인 악을 악마에게 부여했다고 할 수 있다. 밀턴의 의도는 인간과 사탄의 동일시를 통해 언뜻 매력적이고 영웅적인 면모의 허무함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너, 자유의 후원자처럼 보이는 교활한 위선자여(진규선 번역).”

“And thou, sly hypocrite who now wouldst seem Patron of liberty(실락원 4.957).”

비록 밀턴이 신화적인 사탄의 타락에 대해 묘사했지만, 그의 놀라움은 사탄의 왕국 혹은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해냈다는데 있다. 악마의 존재처럼 지옥은 악, 즉 ‘무’를 선택하는 자들의 것일 뿐이다.

“내가 나는 곳이 곧 지옥이요, 내 자신도 지옥에 있노라(진규선 번역).”

“Which way I flie is Hell; my self am Hell(실락원 4.75).”

밀턴은 루시퍼가 하늘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쫓겨났으나(그리고 인간을 타락시켰으나), 신은 루시퍼를 위해서도 하늘의 복을 준비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탄은 끝내 그 은총을 거부한다. 사탄의 즐거움은 이미 신의 작품을 망치는데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켰고, 신에 대한 승리를 외침으로써 다른 천사들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신이 보내기로 결정했을 때, 또 다시 사탄은 그를 굴복시키려고 한다.

밀턴은 여기서 신학적 입장보다 극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방식을 위해, 사탄의 무지를 전제하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만약 사탄이 패배를 다 알고 있었다면 그 드라마에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밀턴의 이 루시퍼는 18세기 이후 등장할 합리주의에 의해 사라질, 마지막 중세 전통의 사탄이었다.

제프리 버튼 러셀 악의 역사 4권 메피스토펠레스
▲4권 ‘메피스토텔레스’ 영어 원서.
죽어가는 사탄

과학적 사유가 점점 지배적이 될 수록, 많은 유럽인들이 사탄의 존재를 거의 믿지 않게 되었다.

“… 18세기에 벌어진 모든 운동 가운데 유일하게 경건주의만이 성경에 의해 증명된 사탄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지지하였다(한글판 204쪽).”

“among all the movements of the eighteenth century, only Pietism strongly upheld the belief in Satan as attested by the Bible(원서 132쪽).”

계몽주의자들이 기독교의 전통 원죄론에 반대했지만, 리스본 대지진을 겪고 난 뒤 맹목적으로 낙관론을 지지하진 못했다.

그러나 리스본 대지진 이후 원죄론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단지 미신을 멀리하고, 쓸데없는 신학적 사색이나 형이상학적 명제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우주에 내재한 윤리법칙을 따라 살며, 최선을 다해 세계를 개선해나갈 것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볼테르 같은 경우, 밀턴의 작품들을 ‘역겨운 판타지’라고 보았고, 악마의 관념을 고대 이교도들의 혼합이자 원죄 교리를 지지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만 보았다. 데이비드 흄과 같은 이들의 철학적 회의론은 철저히 악마에 대한(그리고 기적 전체에 대한) 믿음의 근간을 흔들었고, 소위 ‘바깥 세계’에 대한 불가지적 입장에 대해서는 칸트 역시 한몫을 했다.

계몽주의자들은 사탄에 대한 믿음을 너무 유치하게 여겨 진지한 논의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앞서 말한 칸트는 오히려, 인간의 보편적인 근본 악을 얘기함으로써 당대의 동료 사상가들을 분노케 했는데, 그 이유는 기존 기독교 원죄 교리를 부활시킨 것(비록 탈신화화했다 할지라도)이나 다름없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계몽주의 사상가들도 ‘악의 문제’에 대해서는 진지했다. 그러나 그들 대다수에게 악의 문제는 신(神)이나 형이상학이 아닌, 인간 간의 문제, 즉 실용적 사안이었다.

이런 분위기에 따라 많은 신학자가 전통적 신학 논의를 버리거나 회피했다. 비록 슐라이어마허처럼 합리주의적으로 다룬 신학자들도 있지만, 그에게도 악마는 하나의 메타포였을 뿐 실제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완전히 사탄이라는 존재는 사람들의 사유 속에서 실제가 되지 않고 사라졌다.

그렇기에 오히려 악마는 전통을 벗어날 수 있었는데, 도무지 정체를 알기 힘든 괴테의 <파우스트> 속 '메피스토펠레스'가 바로 그러한 전형이었다.

“근본적으로 메피스토펠레스는 미분화된 세계가 그대로 인간의 경험에 주어질 때 그 미분화된 세계를 대표하는 자연 영이다(한글판 254-255쪽).”

“He is fundamentally a nature spirit representing the undifferentiated world as it presents itself to human experience(원서 158쪽).”

낭만주의 시대의 악마

혁명의 시기였던 1789-1848년 사이, 악마는 철학이나 신학에서는 거의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되었으며, 다양한 문학의 주제로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구체제가 무너져가는 것을 목도한 시대, 절대 군주인 신에게 도전하는 악마는 그런 측면에서 프로메테우스 같이 악한 면뿐 아니라 선한 면을 양면성을 동시에 지닌 존재로 인식되곤 했다.

예를 들면 윌리엄 블레이크의 <천국과 지옥의 결혼>이라는 작품에서, 사탄은 창조성의 상징으로 나온다(In the Marriage, Stan is the symbol of creativity).

바이런 경의 극시 <카인, Cain: A Mystery>에서 루시퍼는 신의 창조성과 파괴성을 계시하며, 인간에게 혼란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루시퍼가 여호와의 어두운 면을 드러낸다 해도, 루시퍼 역시 악한 존재다.

이 작품 속에서는 신과 악마 둘 다 선과 악을 공유한다. 바이런 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긴장 관계의 대립이 악이고 이 긴장 관계의 화해가 선이라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절대 악 그 자체를 부정했으나, 악 자체에 대한 관심은 많았다. 다만 그가 사탄이나 악마를 다루는 방식에 일관성은 없었다. 그저 중세의 괴물이기도 했고, 압제하는 사회를 상징하기도, 혁명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작 <사탄의 최후(La fin de Satan)>에서 위고는 사탄이 타락하고 우주 전체로부터 거부당함을 알고 괴로움에 소리칠 때, 신은 그에게 구원의 목소리로 응답한다고 썼다. 위고의 신은 우주이며, 사탄은 인간이다. 그리고 우주는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 그것을 깨달을 때 구원을 얻는다.

하지만 갈수록 특히 퇴폐적 낭만주의자들에 의해(보들레르 등), 심미적 유행으로 악마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악마의 그림자

퇴폐주의자들의 악마는 형이상학적, 윤리적, 신학적 사유의 대상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때는 다윈,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등으로 인해 기독교 세계가 거의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으며, 종교 자체가 거부되고 있었다.

선과 악이라는 용어도 사용되지 않기 시작했고, 사회학적으로는 악 대신 폭력을, 심리학에서는 ‘공격성’이라는 말을 선호하게 됐다. 특히 심리학에서는 바로 저 ‘악’을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프로이트는 종교 자체를 신경증적인 것이라 보았고, 악마란 무의식적 충동이 인격화 된 것으로 보았는데, 그것을 그 충동 혹은 억압된 그 욕망을 죽음이나 공포로 보았다.

프로이트의 동료였지만 프로이트와 독립된 사상가는 융이다. 융은 집단 무의식, 혹은 저 먼 곳에서부터 형성된 ‘원형’을 주장했고, 그것으로부터 구조적으로 신화나 종교의 유사성들을 주장했다.

그리고 융은 ‘그림자’라는 말을 썼는데, 이 그림자는 통제 불가능한 무의식이 지닌 힘이자, 어떤 원초적인 심리적인 무엇으로써 개인에게뿐 아니라 집단과 사회 혹은 국가에도 그러한 그림자가 있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원형적인 그림자(융은 이것을 명확하게 제시한 적은 없다)’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이러한 심리학자들의 노력과 평행하게 악을 두고 고민한 가장 영향력있는 문학가는 바로 도스트예프스키이다.

도스트예프스키는 악마의 좌소를 지옥이 아닌 인간의 영혼에 두었다. 그의 작품, <악령>이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결국 온갖 심리적인 묘사 속에서 사랑(그리고 사랑의 신비한 힘)을 악에 대한 승리로 그려낸다고 할 수 있다.

도스트예프스키가 실제로 악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서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악마의 가장 교묘한 책략이라고 한 부분은 보들레르를 포함한 많은 당대의 사람들을 향한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도스트예프스키에게 악/마는 은총/사랑으로 극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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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평가

지금까지 제프리 버튼 러셀의 악의 역사 시리즈에 대해 살펴보았다. 출판 기간으로만 살폈을 때, 이 책은 10년짜리 대기획이었다. 4권 메피스토펠레스의 서문에서 그는, “지난 20년 동안… 이 주제를 탐구하고 숙고했다”고 밝힌다.

비록 조금씩 악에 대한 신학적, 형이상학적, 윤리적 논의로 넘어가긴 했으나, 비교적 역사 속에서 ‘악마’가 어떻게 인식되었는가를 밝히는데 매우 충실한 논의를 펼쳤다고 느껴지는 점에서, 대단히 훌륭한 학자로써의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제프리 버튼 러셀이 서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문제제기로써, 그 어떤 이유에서라도 이 세계에는 ‘이토록 지나친’ 악이 존재하는가이다.

도무지 납득하기 힘든 악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그 현실 앞에, 그는 역사 속에서 악마를 추적했다. 그가 악마를 추적한 이유는, ‘악’을 추적하게 되면 논의가 지나치게 협소해지리라는 우려 때문인 것 같다.

실제로 1권 ‘사탄’의 서문에서 11, 12세기 중세를 연구하다 악의 문제를 접하고, 거기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고대로부터 이를 고민했던, 의인화 된 악인 악마를 다루기로 했다는 식으로 그는 이야기한다. 그래서 종종 ‘악’이라는 신학적, 형이상학적, 윤리적 주제 자체를 다루기도 했다.

두 번째는 그의 분석 속에 드러난 진자 운동이다. 일원론과 이원론이라는 두 가지 설명은 둘 다 부족하면서도 결코 서로 종합할 수 없는 것으로,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음이 그의 책을 통해 드러났다.

적어도 종교 속에서 신의 절대성을 주장할수록 신은 악에 대한 책임있는 존재가 되어야 했고, 신의 도덕성을 주장할수록 악을 다루는 신의 전능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악은 독립된 실체가 되어야 했다. 종교를 벗어난 시대, 특별히 문학이라는 장르에서 악마는 하나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이제 악마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악’은 여전히 존재한다. 적어도 인간 사회는 정의를 어떻게 내리건, 악을 여전히 인식하고 있다. 그 증거가 법률이고 윤리이고 인권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악을 설명하고 악을 극복해야 할 필요성과 의무가 있다. 악마라는 인격체의 존재에 대한 믿음 여부와 별개로, 악마를 통해 결국 설명하고 싶었던 것, 그리고 악마 위에 혹은 악마와 대립하여 존재하는 신을 통해 설명하고 싶었던 바는 지금도 유효할 수 있다. 악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직면한 악이란 너무도 거대하기에, 우리는 이것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고, 허무맹랑한 입장을 내어놓아서도 안 된다. 마지막으로 제프리 버튼 러셀의 경고를 길게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인간이 지닌 악의 원인이 인간의 본성에만 있다고 가정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우리는 극히 소량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고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핵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부모가 오븐 안에 가두어 구워 죽였던 그 아이가 겪은 만큼의 고통을 당할 것이다.

군비 경쟁은 핵전쟁의 기회를 줄일 것이라는 주장은 정치적 수사로 들린다. 이 주장은 해마다 이 세계는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폐기된다.

어느 누구도 고의적으로 핵전쟁을 일으킬 준비는 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우발적인 핵전쟁의 위험성은 믿을 수 없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과 지구를 파괴할 수도 있는 무기의 비축량과 배치는 인간들이 만들었고 인간들이 번복할 수 있는 의도적인 선택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군비 경쟁이라는 악마적인 특징은, ‘대학살을 위한 이러한 준비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고 물으면 더 분명해진다. 어느 개인도, 어느 민족도, 어떤 이념도, 어느 누구도 핵전쟁으로부터 이익을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확히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파괴, 지구상 인간의 생명이 파멸을 예비하도록 힘은 무엇인가? … 온 우주의 파괴를 의도할 수 있는 이러한 힘의 본질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무한정한 파괴 본성은 개별적인 인간의 파괴 본성이 확장된 것이라고 추측한다. 우리들 각각 안에 악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엄청난 수의 개별적인 악을 합쳐도 이 지구의 파멸은 말할 것도 없이 아우슈비츠도 설명되지 않는다.

이 정도 규모의 악은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다르게 보인다. 이것은 더 이상 개인적인 악이 아니라 모종의 집단적인 무의식을 유발하는 개인의 한계를 초월한 악이다(4권 메피스토펠레스 한글판 485-486쪽).”

진규선 목사(서평가, 독일 유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