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로역정>
▲존 번연 목사의 신앙고백서 <천로역정>을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작품, <천로역정: 천국을 찾아서>.
◈애니메이션의 영향력: 평생에 이르는 캐릭터의 힘

오늘날 애니메이션이 가진 문화적 영향력,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발휘하는 영향력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이 필요치 않다. 굳이 애니메이션 영상 산업이나 캐릭터-완구산업의 규모 등 객관적 지표와 수치를 제시할 필요도 없다.

단지 각각의 개인적 경험만 살펴보더라도, 애니메이션이 어린 영혼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다.

당장 필자만 하더라도 어린 시절 본 영화의 장면들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시절 봤던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아기공룡 둘리> 시리즈 같은 경우는 스토리는 물론 장면과 대사까지 대부분 기억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는 캐리커쳐적 단순화와 색조, 그리고 애니메이션 특유의 역동성이 갖는 힘이라 할 수 있다. 어린 마음에 영화의 복잡하고 디테일한 장면들은 깊게 각인되기 어렵다.

그러나 과장된 동작과 몸짓, 단조로우면서도 화려한 색조, 감정 상태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풍부하면서도 유쾌한 표정을 가진 캐릭터가 주도하는 애니메이션 장면들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마음에 쉽게 각인되고, 그 각인된 기억이 거의 평생 유지된다.

캐릭터 산업은 이런 각인효과를 십분 활용한다. 어린 시절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은 캐릭터는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도 그 매력을 잃지 않는다.

이런 매력은 구매력을 갖춘 성인들이 자신을 위해서나 자녀들을 위해 해당 캐릭터 상품을 재차 구매하게 하는 위력을 발휘한다. 이로 인해 하나의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유소년층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 통상 20-30년 이상의 생명력을 갖게 된다.

문화 선진국들은 ‘제대로 된’ 애니메이션 콘텐츠와 캐릭터 산업을 육성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한국 유소년층에게 정신적-문화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애니메이션들은 대개 미국(디즈니, 픽사, 드림웍스 등)과 일본(스튜디오 지브리, 토에이 애니메이션, 선라이즈 등)에서 제작된 작품들이다.

이들 제작사들은 막강한 자본력, 수십년 이상 축적된 작화 및 스토리텔링 노하우를 무기삼아 전 세계 각국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를 바탕으로 자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와 환상을 심어주며 막대한 양의 캐릭터 상품을 수출한다.

이들에게 애니메이션 제작과 홍보는 단순한 사업이 아니라, 문화의 무기화 혹은 문화 제국주의를 실현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이를 모르는 성인은 거의 없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이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애니메이션이 갖는 매력은 그것이 문화 제국주의의 선봉인 줄 아는 어른들에게마저 호소력을 갖는다.

영화 <천로역정>과 <이웃집 토토로>
▲스튜디오 지브리가 가진 캐릭터 파워를 대표하는 작품, <이웃집 토토로>의 한 장면.

여기서 말하고 싶은 바는 미국의 애니메이션(Animation) 혹은 저패니메이션(Japanimation: 일본 애니메이션을 지칭하는 합성어 -편집자 주)이 문화적 식민지화의 수단이므로 무조건 배격하자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따져볼 때, 애초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와 스토리텔링이 갖는 힘 앞에서 그것을 배격할 수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바는 애니메이션이 갖는 영향력이 결코 어린 시절에 그치지 않고 한 사람의 평생에 이른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로 <천로역정: 천국을 찾아서>와 같은 애니메이션 작품은 크게 환영할만한 일이라 볼 수 있다.

◈애니메이션과 신앙: <이집트 왕자>와 <천로역정>

사실 기독교계, 특히 미국 기독교계는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고 전하는 애니메이션 제작에 많은 공을 들여왔다.

자본력이나 기술력 면에서 디즈니, 픽사 등 대형 업체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기에 작품의 퀄리티 역시 뒤쳐지는 편이긴 하지만, 성경과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가르치는 애니메이션들이 지속적으로 출품되어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예외는 존재한다. 대자본 기획사가 성경이나 신앙 이야기를 주제삼아 작품을 제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드림웍스의 <이집트 왕자(The Prince of Egypt, 1998)>이다.

출애굽 명령을 수행하는 모세의 일대기를 그린 이 작품은 서사 전개나 연출 수준이 기존 디즈니 명작 애니메이션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한스 짐머, 머라이어 캐리, 휘트니 휴스턴 등이 합작한 OST 곡들은 다시 없는 명곡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애니메이션은 항상 한 가지 커다란 과제를 끌어안고 있다. 바로 스토리텔링의 무거움이라는 과제다. 성경과 교회사 자체가 워낙 진중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보니, 기독교 애니메이션의 스토리텔링 역시 어린이들이 접하기에 다소 무거운 감이 없지 않다.

쉽게 예를 들어 기독교 애니메이션으로부터 <토이 스토리>나 <슈렉>, <인크레더블> 시리즈에서 느낄 수 있는 발랄함이나 유쾌함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이 점은 기독교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두고두고 풀어나가야 할 과제라고 볼 수 있다.

영화 <천로역정>과 <이집트 왕자>
▲기독교 신앙을 주제로 다룬 상업용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큰 성공을 거둔 드림웍스의 <이집트 왕자>.

물론 어린이 대상 애니메이션이 무조건 유쾌하기만 하다 해서 인기를 얻는 것은 아니다. 저패니메이션의 경우, 도저히 어린이 대상 애니메이션이라고 보기 어려운 디스토피아적 작품들이 인기를 끌기도 한다.

저패니메이션 역사상 다시없는 명작 취급을 받는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이나 <카우보이 비밥(1998)>의 경우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지만, 실질적으로 그 내용을 보면 애초 성인들을 위한 작품에 가깝다.

미국에서도 <심슨 가족(The Simpsons)>이나 <사우스 파크(South Park)> 같은 사회풍자 블랙코미디 작품들이 유소년층에서도 큰 인기를 얻는 것을 보면, 다루는 주제가 진중하다 해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접근하기 어렵다고만 볼 수는 없을 듯하다. 문제는 그 진중한 내용을 전달하는 서사의 문법과 시각적 연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접근성 면으로 본다면, 금번 개봉한 <천로역정> 애니메이션은 상당한 개선점을 보인다고 평할 수 있다.

사실 존 번연(John Bunyan)이 집필한 <천로역정> 원전은 전체적인 분위기가 매우 장중한 편이다. 이 작품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칼빈주의 신앙을 고수하던 특수침례교회 소속 목회자 번연이 찰스 2세와 영국 국교회의 핍박으로 12년 동안 감옥에 갇힌 동안 집필한 소설 형식의 신앙고백서이다.

당시 영국의 비위생적인 감옥환경을 생각하면, 12년에 이르는 투옥형은 거의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언제 병마에 사로잡혀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쓴 신앙고백서인만큼, <천로역정> 내용이 진중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 <천로역정> 애니메이션은 내용의 진중함을 크게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시각효과나 연출, 캐릭터 설정 측면에서 유소년층에게 비교적 쉽게 수용될 수 있는 방편들을 총동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대적 흐름에 맞춰 어린이들에게 익숙한 3D 애니메이션 방식을 채택한 점이 눈에 띈다.

마귀 캐릭터 역시 과도하게 공포스럽지 않으면서도 그 교활함이 잘 부각되게 표현한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사실 <천로역정>은 영화나 애니메이션 양쪽으로 지금까지 여러 편 제작됐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1978년작 실사 영화이다. 이 작품은 현재 할리우드 인기배우인 리암 니슨의 데뷔작으로 유명하다. 여기에서 그는 전도자 역할을 맡았다.

사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캐릭터는 바로 마귀 캐릭터인데, 그 은근한 공포스러움은 아직까지도 이 작품을 본 적 있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자주 회자되는 편이다.

금번 개봉한 <천로역정> 애니메이션은 마귀 캐릭터가 가졌던 이런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상당 부분 완화시키면서도, 마귀가 가진 교활함 때문에 그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들을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고, 이를 통해 유소년층 관객들에게 영적 전투를 예비할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영화 <천로역정>
▲천국을 향하는 순례자의 일대기를 그린 애니메이션 <천로역정>.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