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동일한 구원

로마가톨릭은 구원에 차별이 있다고 가르친다. 순교자, 성자, 복자(Blessed, 福者) 반열에 든 사람의 구원은 고급스러워, 소위 잉여의(剩餘義, surplus righteousness)까지 있어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데 충당된다고 한다.

반면 성자에게 의를 빌려와야 하거나 아니면 연옥에 가서 담금질(quenching)을 하여 보다 완전한 의를 얻어야 하는 함량 미달의 형편없는 구원도 있다.

이러한 구원의 차별화는 근본적으로 그들의 계급주의(階級注意)에 기인한다. 이 계급주의는 이성주의(rationalism)와 교권주의(clericalism)의 합작품이다.

그들은 ‘구원’뿐 아니라 ‘믿음’과 ‘성직’도 계급화(hierarchism)했고, 내세도 연옥(purgatorium)과 천국으로 계급화했다. 그리고 이러한 계급화는 구원에 교회의 개입을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이와 달리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롬 10:4)의 의(義)만을 힘입어 단번에 구원받고, 단번에 천국에 들어가는 개혁신앙은 인간의 구원 개입을 불허했고, 그 결과 믿음과 구원의 차별화가 원천적으로 봉쇄됐다.

‘단번의 구원’을 믿은 개혁자들이 제일 먼저 타파한 것이 로마가톨릭의 계급주의였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종교개혁의 핵심인 ‘다섯 솔라(The Five Solars)’가 그것에 포문을 열었고, 만인제사장주의(萬人祭司長主義)의 철폐가 그 상징적인 노획물이 됐다.

성도가 차별 없이 하나님의 한 권속이 될 수 있었음은(엡 2:19) 한 피, 한 성령의 세례로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이다(고전 12:13). 이렇게 그리스도 말미암아 한 몸된 지체들에게 구원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개인의 신력(信力)에 의한 차이도, 헬라인(the Greeks), 야만인(the Barbarians, 롬 1:14)이니 하는 인종에 따른 차이도 없다. 오랜 율법적 전통을 가진 유대인도, 본성만을 쫓아 산 짐승 같은 야만인도 모두 ‘동일한 이신칭의(以信稱義, 롬 3:22)’를 얻었고, ‘보편적인 구원(the common salvation, 유 1:3)’을 얻었다.

만일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의만으로 된 것이 아닌 인간의 의가 첨가됐다면, 로마가톨릭의 주장처럼 그 사람이 기여한 의(義)의 정도에 따라 그의 구원의 질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성경에는 구원에 차이를 두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도 있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4-15).”

이것은 ‘구원의 질적 차이’를 말한 것이라기보다는 구원받은 자의 ‘공적(功績)의 차이’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의 동일성’은 구원이 그리스도의 의로만 됐다는 이유 외에, 하나님 주권과 은혜로 됐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구원은 우리가 선악을 행할 줄 알기 전, 아니 우리가 태어나기 전 창세전부터 예정된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은혜로 된 것(엡 1:4-6)”이기에, 구원을 차별지을 우리의 탁월성이나 의는 아예 고려 대상에 포함되지 못한다.

바로 이 점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대해 전혀 자랑할 것이 없게 한다(고전 1:29, 엡 2:9).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훌륭한 신앙을 가졌음에도, 그것이 그의 칭의(稱義)에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나(롬 4:2-3), 성경이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롬 4:9)”운운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동일한 믿음

하나님은 훌륭한 믿음을 보인 자만 구원하고, 보잘 것 없는 빈약한 믿음을 보인 자는 구원하지 않는다거나 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 믿음의 정도(程度)로 구원 여부를 결정짓거나 구원에 차등을 두지 않으신다.

한 마디로 그에게는 ‘구원 얻기에 훌륭한 믿음’, ‘구원 얻기에 빈약한 믿음’의 구분 같은 것은 없다. 그것들은 순전히 인간이 만든 기준이다.

누군가 “화려한 금잔(金盞)으로 물을 떠 마시나 깨어진 쪽박으로 떠 마시나 다 똑같은 물이다”고 했듯, 훌륭한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나 보잘 것 없는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나 구원에는 본질적 차이가 없다.

예수님이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말씀하시면서, 작고 미미한 ‘겨자씨’ 같은 믿음을 들먹인 것도(마 17:20)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냐(행 3:16)’만 따져 물으신다.

만일 주관적인 믿음의 분량(分量)에 따라 구원 여부가 결정된다면, 믿음이 과도한 지위를 부여받고 일종의 공로로 격상된다. 나아가 믿음을 구원을 받아들이는 손으로 간주한 바울과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위배한다.

루터가 처음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주창하며 ‘행위’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믿음’을 강조했을 때, 동시대인들 중에는 ‘믿음’을 행위를 대신한 ‘또 다른 공로’쯤으로 곡해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이를 간파한 루터는 그런 곡해를 불식시키려고 ‘은혜를 인하여’를 첨가하여,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가르쳤다.

다음 성경 구절들은 주관적인 믿음의 분량에 의해 구원이 결정된다는 것처럼 오해될 여지가 있기에,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하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행 14:8-9).”

여기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란 ‘구원받는데 필요한 분량(分量)의 믿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처럼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행 3:1-16)’을 뜻한다.

예수님이 풍랑을 보고 호들갑을 떠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 4:40)?”고 타박한 것은, 그들에게 ‘구원 얻을 믿음이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삶의 위기에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생활 신앙이 부족했다는 의미였다.

예수님의 책망을 받을 만큼 그들의 믿음이 빈약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사랑 받는 제자들이었다. 이는 구원받은 사람도 얼마든지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 신앙’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은, 그것이 인간 내면의 산물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기 때문이다.

‘구원’도 은사이지만,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전적 무능한 인간은 ‘구원’은 물론 ‘믿음’까지도 자력으로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동일한 사랑

성도들이 동일한 믿음, 동일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 모두 차별 없이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구원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하나님 사랑을 언제나 독생자의 구속과 연결지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사랑은 여기 있으니’라고 사랑을 한정지으며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것이 사랑이다(요일 4:10)”라고 못 박는다. 말하자면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것 외 다른 사랑은 없다. 독생자를 영접했다면 하나님 사랑을 받은 것이다”는 말이다.

우리를 구원하기위해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내어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과 그의 전부를 다 내어주신 지고상 사랑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독생자의 사랑을 입어놓고도, 자기는 하나님 사랑을 충분하고 완벽하게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세적인 부와 영광의 수납(受納)에서 비로소 하나님 사랑의 완결을 보려고 한다.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자신들이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구원’은 세상적인 복을 불러오는 기본 베이스(basis)일 뿐, 구원 자체를 지고의 복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구원 받은 것은 지고(至高)의 사랑을 받은 것이고, 하나님 사랑 전부를 받은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받아낼 사랑이 없다. 그가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이미 받은 그 사랑에 더 덮을 것이 없다.

만일 그들의 생각대로 ‘구원’이 세상적인 것들로 덧칠해져야 비로소 완결되고 돋보인다면, 그것은 이미 ‘지고의 복’이 아니다. ‘구원’ 그 자체가 완결된 복이고, 지고(至高)한 복이다.

이 완전하고도 지고한 사랑을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셨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성령이 오신 목적을 오해한다. 그들이 생각하듯, 성령이 오신 가장 큰 목적은 은사나 이적 시여(施與)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오늘도 성령은 그의 성도 곁에 오셔서 “독생자를 주신 것이 하나님 사랑이다” 라고 인치듯이 교훈하신다. 이 성령의 음성을 듣는 자가 복되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