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버포스 혁명의 시대와 그리스도교
혁명의 시대와 그리스도교

윤영휘 | 홍성사 | 372쪽 | 23,000원

“흔히 노예무역 폐지 운동은 그 지도자인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의 등장으로 시작된 것처럼 서술되지만, 그의 등장 이전부터 일단의 복음주의 정치가들이 모여 노예무역 폐지를 포함한 사회 개혁을 생각하고 있었다.”

노예무역 폐지 운동은 17세기 과학혁명과 이신론, 계몽주의 등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심성 속에서 영향력을 상실하던 그리스도교는 18세기 말부터 사회개혁을 통해 세속화에 적극 대응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그 대표적인 예 중 하나로 바로 이 노예무역 폐지 운동을 꼽는다.

그러면서 “미국에서는 기본적으로 개별 교파 차원의 움직임이었던 데 반해, 영국에서는 국교회 내 복음주의자들이 의회에 진출해 그들의 종교적 동기가 국가 정책으로 연결될 수 있는 통로가 놓였다”며 “이들의 노예무역 폐지 운동은 일면 상반되어 보이는 그리스도교적 가치와 정치적 이익의 최대분모를 현실 정치에서 실현해 가는 방식”이라고 평가했다.

노예무역 폐지 운동이 복음주의 정치가들의 합작품이지만, 윌버포스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1784년 24세의 나이로 잉글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요크셔 지역구 하원의원이 된, 촉망받는 정치가였던 윌버포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회심’을 경험하고, 내적 괴로움의 시간 끝에 1785년 11월, “신을 위해 살려면 세상을 버려야 하며 중간지대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24세에 수상이 되어 20년간 국정을 이끌었던 윌리엄 피트(William Pitt)에게 이 결심을 알렸다. 그러나 정계에서 윌버포스를 잃고 싶지 않았던 피트의 간곡한 만류와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 작사자이자 전직 노예무역선 선장 출신의 복음주의 운동 지도자 존 뉴턴(John Newton)의 권고로 정계에 남았다.

그의 회심이 알려지면서 노예무역 폐지를 염두에 두고 있던 복음주의 운동가들과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게 됐고, 공동전선을 구축했다. 이들은 1787년 5월 22일 ‘런던 노예무역 폐지 협회’를 설립했고, 이 의제를 의회에 가져갈 사람으로 ‘갑작스런 회심으로 유명해진’ 윌버포스를 떠올렸다.

윌버포스
▲윌리엄 윌버포스. ⓒ웨스트민스터 사원 홈페이지
몇 개월간 망설이던 윌버포스는 그해 10월 28일,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앞에 두 가지 커다란 사명을 주셨다. 그것은 노예무역을 폐지하는 것과 이 나라의 관습을 개혁하는 것이다.” 둘은 처음부터 분리될 수 없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목표였다. 윌버포스는 이를 혼자 하지 않고 비슷한 생각과 의무감을 가진 공동체를 통해 진행했는데, 이들이 바로 ‘클래팜 공동체(Clapham Sect)’이다.

당시 노예무역은 어느 정도였을까. 한 연구에 의하면 1514-1866년 사이 약 1,060만명 이상의 주로 서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유럽과 아메리카로 팔려갔다. 노예무역은 중간 판매상인 영국뿐 아니라 공급자인 아프리카, 소비자인 신대륙 모두에게 중요했다. 18세기 노예들이 주로 일하던 서인도제도의 설탕은 큰 인기를 끌었는데, 제당업은 고도로 노동집약적이었기에 노예가 사라질 경우 경제적 손실이 적지 않았다.

노예무역 폐지 운동이 쉽지 않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제도 자체에 있었다. 노예 제도는 인류 역사에서 계속 존재해 왔기에, 당시에는 그것이 문제라는 것 자체가 새로운 생각이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존 뉴턴 역시 회심 후에도 노예무역을 지속할 정도로, 18세기 말까지 회심이 자동적으로 노예제 비판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배경 때문에 수상 피트와 야당 지도자 찰스 폭스가 모두 반대했던 노예무역 폐지 법안의 통과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클래팜 공동체의 낙관적 태도와 달리,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 역시 노예무역 폐지 운동은 인권의 문제를 넘어 ‘국가의 이익’이 걸려 있기에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이에 ‘노예무역에서 선원들의 사망률이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라는 조언을 남겼다고 한다.

워키토키 유럽 클래팜
▲윌버포스의 ‘클래팜 공동체’가 있던 클래팜 교회. 폭격 자국이 선명하다. ⓒ크리스천투데이 DB
웨슬리의 예상대로 법안 통과까지는 20년이 걸렸다. 위처럼 노예제도의 죄악성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지만, 변화 자체에 대한 두려움, 영국민들의 재산권 침해에 대한 우려, 국익에 손해가 되리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농장주와 노예상인들은 압력을 행사했다.

클래팜 공동체는 1789년 5월 제출한 노예무역 폐지 법안 통과 실패로 이를 명확하게 인식했고, 노예무역의 비인도성보다 경제적 비효율성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예무역 폐지 동의안 입법 방식에서도 ‘폐지’ 앞에 ‘점진적’이라는 단어를 삽입했다. 1792년 스코틀랜드 출신 하원의원 헨리 던다스(Henry Dundas)가 제시한 ‘점진적 노예무역 폐지안’은 230대 85로 통과됐다.

하지만 최종적 노예무역 폐지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클래팜 공동체는 계속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1796년 봄 70대 74, 1797년 74대 82, 1798년 83대 87, 1799년 54대 84로 통과에 실패했고, 1804년에는 하원에서 124대 49로 통과됐지만 상원의 벽을 넘지 못했다.

윌버포스와 클래팜 공동체는 악순환의 고리를 ‘대중 여론 동원’을 통해 해결했다. 1792년부터 토머스 클락슨은 영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노예무역 폐지 협회 설립을 돕고, 각 지역 협회 간의 활발한 네트워크를 시도했다. 지역마다 만들어진 청원서가 의회로 접수됐고, 시각적 효과를 더하기 위해 서명서를 계속 연결해 커다란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었다.

이 여론이 전국적으로 폭발한 것이 1806년 11월 선거였다. 윌버포스는 요크셔 지역에서 강력한 적수들을 만났지만, 여론의 거센 반발로 상대 후보마저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지지했다. 이 선거 결과를 바탕으로 20여년만인 1807년 1월, 노예무역 폐지 법안은 283대 16이라는 압도적 표차로 가결되기에 이른다.

윌버포스
▲웨스트민스터 사원 내 윌버포스 동상. ⓒ웨스트민스터 사원 홈페이지
이같은 내용이 담긴 책 <혁명의 시대와 그리스도교>는 ‘18-19세기의 근본적인 도전에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대응했는가?’라는 부제로 저자가 지난해 봄 12주간 홍성강좌에서 했던 서양 근대교회사 강의를 풀어낸 것이다.

책 5장에서는 이후 노예무역 폐지 운동의 성공 요인과 노예무역 폐지 이후 영국이 폈던 해외 노예무역 억제 정책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일반인의 심성에 끼치는 영향력을 상실해 가던 유럽의 그리스도교가 18세기 초중반의 부흥운동으로 수세에서 벗어났다면, 18세기 말 영국 복음주의자 정치가들은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현실 정치의 영역으로 가져가려 노력했다”며 “영국 복음주의자들이 택한 사회 변혁 방법은 악습의 폐지와 국가 도덕성 고양을 위한 개혁 운동이었다”고 밝혔다.

저자는 지난해 봄 홍성강좌 강연에 앞서 “홍성강좌에서는 기존 방식과 교회 안의 시각으로 2천년 교회사를 바라보는 데서 벗어나, 세속 역사 속에서 교회사를 바라보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며 “우리와 달리 서양에서는 세속사와 교회사를 따로 배우지 않는다. 우리는 교회사와 세속사를 그리스도교적 안목으로 통합해 넓은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세속사와 교회사를 넘어, 역사는 하나님이 하신 일, 즉 ‘His-Story’”라고 소개했다.

기자는 지난해 3-6월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30분부터 2시간 동안 진행된 12주 간의 강의 중 10회 참석해 강의 내용을 소개했으나, 정작 가장 중요하고 저자의 주 전공이기도 한 윌버포스와 영국의 노예무역 폐지 운동(5강)에 대해 일정상 듣지 못해 아쉬웠던 차, 1년 4개월여만에 나온 책을 통해 이를 해소할 수 있었다.

윤영휘
▲저자 윤영휘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책에는 이 외에도 강의에서 소개한 과학혁명과 계몽주의, 대각성 운동과 대서양 복음주의 네트워크의 형성, 미국 독립혁명과 정교분리 사회, 프랑스 혁명과 탈그리스도교 사회, 19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과 교회의 변화, 세속화와 그리스도교, 학문, 여성과 청소년과 노동자, 독일과 이탈리아 통일, 선교와 그리스도교의 팽창, 20세기를 향하여: 선교, 제국, 문명 등 18-19세기 역사를 근대사와 교회사를 통합해 제시하고 있다.

저자 윤영휘 교수(경북대)는 “근대라는 시기에 그리스도교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 교회가 존재했던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의 측면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교회사의 사건, 인물, 개념이 갖는 의미를 종합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며 “이 격변의 시기에 그리스도교가 도전에 대응하고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탈(脫)그리스도교적 사회에서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을 갖고 살아가는 의미를 역사적 실례를 통해 고찰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 ‘그리스도교의 역사 시리즈’는 1권 ‘로마와 그리스도교’가 이미 출간됐으며, 앞으로 중세와 종교개혁기, 20세기 현대 등의 강의를 했던 학자들의 집필로 계속 선보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