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옛날에 산비둘기가 살고 있었다. 그는 험악한 숲속에 둥지를 틀었다. 그곳에는 경탄이 외롭게 홀로 서 있는 아름드리나무들 사이에 불안과 함께 살고 있었다.

멀지 않는 곳에는 농부의 집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거기에는 몇 명의 그의 먼 친척이 살고 있었고, 집비둘기도 살고 있었다. 산비둘기는 집비둘기 중의 한 쌍과 자주 만났다. 산비둘기는 농가의 안 마당으로 뻗은 나뭇가지에 앉았다. 두 마리의 집비둘기는 지붕의 꼭대기에 앉았다. 그러나 대화를 주고 받지 못할 만큼 먼 거리는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들은 그 당시 그들의 상황에 대해, 무엇을 먹고 사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산비둘기가 말했다.

"지금까지 나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게 생계를 꾸려왔죠. 이것이 내가 세상을 겪었던 방식이지요."
집비둘기는 그 이야기를 세심하게 듣고 난 후, 자신의 깃털을 세우고 우쭐대며 유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산비둘기에게 대답했다.

"우리가 사는 방식은 아주 다르지요. 말하자면, 우리들에게는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부유한 농부가 있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는 안전하지요.

추수할 때가 오면, 나와 남편 중에, 하나가 지붕위에 앉아 농부를 지켜봅니다. 그때 농부는 마차에 하나 가득 실은 곡식을 연달아 창고에 운반합니다. 농부가 많은 양의 곡식을 운반하여 내가 셀 수 없을 만큼 쌓이게 되면, 나는 충분히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을 비축했다는 것을 알지요. 나는 이것을 경험을 통해 압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난 다음, 자기만족에 빠져 옆에 앉아 있는 남편을 돌아보았다. 그것은 마치 "여보, 우리 둘은 잘 공급받고 있죠? 그렇죠?"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산비둘기는 집으로 돌아왔고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삶이 오랫동안 안전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틀림없이 기쁘다는 생각으로 그는 갑자기 충격을 받은 것이다.

반면에 공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감히 말하기가 어려운 불확실한 상태를 살아가는 것, 그것은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은 산비둘기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는 혼잣말로 말했다.

"그래, 너는 이곳 저곳 안전한 곳에 저장할 수 있는 비축 식량을 끌어 모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 최선일 거야."

다음 날 아침, 산비둘기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끌어 모으고 비축하는 데 너무 바쁜 나머지 먹을 시간도 없었고 만족하게 먹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한 양을 끌어모으고 비축하는 것이 그에게 허락되지 않을 운명인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가 작은 양을 끌어 모아, 이곳저곳의 안전한 장소에 숨겨놓을 때마다, 막상 그가 그것을 찾으러 그곳을 가보면 사라지고 없었으니까.

그러는 동안, 생계에 대한 본질적인 변화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예전처럼 매일 먹을 것을 찾으러 다녔다. 아니, 오히려 그는 조금 더 적게 먹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는 모으기 원했기 때문이고, 먹을 만한 충분한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예전처럼 충분히 공급되었을텐데 말이다.

슬프다! 그러나 산비둘기는 큰 변화를 겪었다. 그는 실제적인 필요로 고통당하는 일이 없었으나 미래의 필요에 대한 '생각'을 얻게 되었다. 그는 마음의 평온을 잃었다. 그는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염려를 얻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 산비둘기는 염려하기 시작했다. 그의 깃털은 형형색색의 화려한 색깔을 잃었다. 그의 비상은 가벼움을 상실했다. 풍부함을 끌어 모으려는 무익한 시도로 그의 모든 날들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의 꿈은 상상의 무능한 계획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진실로, 그 꿈은 마치 산비둘기가 유복한 비둘기를 질투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매일 먹을 것을 찾으러 다녔고 충분히 먹었지만, 말하자면, 배부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로 인해 그는 오랫동안 배고팠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사냥꾼도 빠지게 할 수 없는 덫에 빠지고 만 것이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자유로운 자만이 '생각 속에서' 자기 자신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혼잣말로 말했다.

"내가 매일 먹을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을 얻는다면, 정말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지. 이건 정말로 맞는 말이야. 그러나 내가 끌어모으길 바라는 큰 비축식량을 한 번에 먹을 수는 없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건 잔뜩 먹다 지쳐버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나를 의지했던 이 불확실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은 유쾌한 일이야."

그는 또 혼잣말로 말했다. "아마 집비둘기는 자신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아주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들의 속마음에는 아마도 내가 지금까지는 자유로웠던 많은 염려들을 갖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나는 머릿속에서 미래의 안전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도 없어. 아, 나는 왜 가난한 산비둘기로 태어났을까? 왜 나는 저 유복한 비둘기 중에 하나가 되지 못했을까!"

따라서 그는 자신이 어떻게 걱정으로 괴로워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가 자신의 생각에서 염려를 몰아내고 마음의 쉼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하게 합리적으로 판단한 것은 아니어도, 자기 자신에 대해 합리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염려가 타당했노라고 자신을 설득하는 모양새였다. 그는 말했다.

"결국, 나는 비합리적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아. 아니, 나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 게 아니라고. 내가 부유한 농부가 되기를 요구한 것도 아니고, 나는 다만 저 유복한 비둘기 중에 하나와 같이 되기를 바랄 뿐인데."

마침내, 그는 용케 어떤 계획을 생각해냈다. 어느 날 그는 날아가서 농부의 지붕 꼭대기에 있는 집비둘기 사이에 앉았다. 그때 그는 두 마리의 집비둘기가 날아 들어간 곳이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그도 역시 그곳으로 날아 들어갔다. 왜냐하면 확실히 창고가 거기에 있어야 하니까.

그러나 농부가 저녁에 왔고 비둘기장의 문들 닫을 때, 그는 바로 낯선 비둘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산비둘기만이 다음 날까지 홀로 작은 상자에 갇히게 되었고, 그는 결국 죽고 말았다. 따라서 그는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염려로부터 구원받은 것이다.

슬프다! 염려하는 산비둘기는 염려의 덫에 자기 자신을 빠지게 했을 뿐 아니라 비둘기장에 자기 자신을 빠지게 하여 죽음에 이른 것이다.

산비둘기가 자기가 산비둘기인 것에 만족했다면, 그가 공중의 새인 것에 만족했다면, 그는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고 하늘의 아버지께서 그를 먹이셨을텐데. 불확실한 상태에서 그는 자기가 속한 곳에 남아 있었을텐데.

그곳은 외롭게 홀로 서 있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산비둘기가 지저귀는 목소리의 구슬픔과 잘 조화를 이루는 곳이었다. 그때 그는 오늘날 목사들이 주일날 설교했던 그 새가 되었을텐데. 그는 복음의 말씀을 반복하며 말한다.

"공중의 새를 보십시오! 그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당신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그를 먹어주기 때문이지요."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