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실종된 언론(言論)의 자유

입력 : 2018.04.15 14:03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언론의 참 모델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심부터 시작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를 시작으로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심문을 받으시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라는 물음을 듣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3-64)"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시면서, 누구를 막론하고 소통을 하셨습니다. 직업이 다르고, 문화 수준의 차이가 있으며, 빈부의 차이와 권력에서 소외되고 힘 없는 어린이, 그리고 장애자와 병든 자들에게 편견 없이 사랑으로 모든 언론을 다스리시며,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손수 해결해 주셨습니다.

어학사전에서 말하는 언론의 뜻은 신문, 잡지, 방송 등을 통해 뉴스나 사실을 알리거나 의견과 논의를 전개하며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을 말합니다. 언론기관이란, 여러 사건이나 현상들에 대해 보도하고, 그에 대해 논평·해설하는 공적 기관을 말합니다.

'언론업'이란 신문사나 방송사, 잡지사 등의 언론 기관에 종사하는 직업을 말합니다. '언론 통제'란 사상의 표현, 보도, 출판의 내용에 대해 국가 등이 공권력으로 규제와 제약을 가하는 일입니다. '제도 언론'이라 함은, 체제에 순응하여 그 체제를 선전하고 옹호하는 언론을 말합니다.

언론은 정보를 제공해 여론을 형성하고 이를 정책 결정기구에 전달함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특히 신문이나 방송과 같은 언론이 여론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막강합니다. 이들은 취사선택을 통해 보도에 특정 관점을 반영하고, 주요 쟁점을 부각시켜 해설하며, 나아가 사설이나 기획기사를 통해 특정 방향으로 여론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특히 언론이 권력이나 특정 세력과 유착할 경우, 여론을 조작하고 민주주의를 저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치권력 혹은 특정세력의 간섭과 영향력에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언론에게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언론은 공정성, 공익성, 객관성, 정확성에 책임을 갖고 국민들에게 사실을 전달하고, 사회적 쟁점에 관한 올바른 해설과 비판을 제공해야 합니다.

언론의 자유에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 의사 표현의 자유, 일반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정보원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정보의 자유(알 권리), 출판물 또는 전자매체에 의해 의사를 표현하고 사실을 전달 할 수 있는 보도의 자유 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론의 자유는 외면적 정신활동의 자유로서, 고립된 개인보다는 인간의 사회적 연대 내지 관계를 중요시합니다. 주권자가 여론을 형성하여 국정에 참여하거나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국민이 공권력을 비판 또는 감시한다는 의미에서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제도입니다.

일제강점기와 6·25 동란의 참혹한 시대에서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성령의 감동으로 담대히 나가서 복음을 전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신껏 힘써 싸웠습니다.

그들은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오직 주님, 그리고 이웃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순교를 거치면서 믿음을 지켰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희생을 감내했습니다.

하지만 물질이 풍부해지고 아쉬울 것 없이 모든 것이 순탄하고 편리해진 이 시대에, 믿음은 점점 퇴색돼 가며, 개인이기주의 때문에 선한 사마리아인을 찾아볼 수 없는 시대로 변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현재 나라에 많은 방송국과 신문사, 그리고 잡지사가 있지만, 국민들에게 제대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힘 있는 권력자들에 의해 '쉬쉬'하는 것으로 일관하며, 사실을 왜곡 보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엉터리 여론조사로 국민들을 기만하고 있으니, 이 시대가 언론 자유의 시대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약 선지자 요나도 이스라엘의 대적인 니느웨에 은혜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요나가 계속해서 만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 계획하심을 깨닫지 못하자,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통해 요나의 오해를 지적하셨습니다.

그에 앞서 불순종하는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삼키게 함으로써 그의 불순종을 일거에 무력화시키기도 하셨습니다. 당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일종의 비상수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암튼 요나는 고난의 현장에서 철저히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을 수행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집중되어 있기는 했지만, 이방 민족들이 완전히 구원의 반열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간 것은, 지나친 배타주의와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을 잘못 해석하고 오직 자신의 생각과 뜻대로 하다가 큰 낭패를 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 주시는 진노를 경험하고, 다시 니느웨 성으로 달려가 "회개하라"고,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알렸습니다. 니느웨성이 망한다는 정보를 확실하게 알림으로, 니느웨 백성이 구원을 얻는 놀라운 사실이 일어났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롯을 통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알렸건만, 그 성 안에 있는 백성들은 듣지 않으므로 참혹한 비극을 초래합니다. 나단은 하나님의 명령을 다윗에게 고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모르고 있다가, 나단 선지자의 충고에 죄를 뉘우치고 철저히 회개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 받는 왕으로 추앙을 받는 놀라운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꼭 알려야 할 때를 놓치고 알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신앙인으로 훗날 징계를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요즘 같은 물질만능이 최고조에 달하는 편리한 시대에, 오히려 신앙인들은 그저 무사안일하게 누군가 자신을 간섭하지 않는 한 그냥 지나갑니다.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일제강점기와 6·25 동란 때조차 불신자들의 억압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했던 믿음의 선배들의 보배로운 믿음을 지키며 지금까지 견뎌온 종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태평스럽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나라의 안보에는 여야가 없으며, 모든 기관과 종교, 그리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하나가 되어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언론인들이 양심을 저버리고 권력 집단에 이끌려 백성에게 알 권리를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면, 그렇게 언론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의 미래는 암울할 뿐입니다.

언론인들의 역할은 참으로 귀합니다. 언론인들은 첫째로 양심을 속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권력의 힘에도 굴하지 않는 소신이 있어야 하고, 백성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가 그들에게 알 권리를 제공하며, 그 들의 참 뜻을 힘 있는 권력자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찰이라는 용기는, 용기가 있어 두려움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두려움을 지그시 참아냄으로써 매일 1g씩 용기가 쌓여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참된 기개는 밖을 향하는 게 아니라, 안으로 자신의 결점을 돌아보는 마음이 진정한 성찰의 용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나라가 시끄럽고, 위기가 곧 닥쳐온다 해도, 과거 믿음의 선배들이 쌓아왔던 용기의 신앙은 어디로 자취를 감춰버리고, 보신주의와 안일무사주의로 오늘날 기독교가 제대로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므로, 예수님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며 예수님에 대한 치욕적 언어들이 난무한 상태로 변하여, 감히 주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을 지경입니다.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청와대 조찬기도회도 좋지만, 나라를 위해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옳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기독교 본연의 사명은 상실되고 마는 것입니다.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까지 당하면서까지 그들은 바르게 외쳤습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는 평신도와 항존직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서로 바르게 소통하며, 하나님의 귀한 말씀 가운데 "예"와 "아니오"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면, 소돔과 고모라 같은 참사를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절대로 권력이 존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도처럼 카스트 제도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예장 총회 헌법에 명시한 대로, 목사는 목사의 사명을 다하고, 장로는 장로서의 직무와 사명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현재 기독교 안에 교회들 마다 권력이라는 암적인 존재로 인하여 편이 갈라지고 서로 불신하며, 하나님의 영광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자신들의 기득권에만 몰두하여 교회로서의 기본 사명마저 잃어져가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기도 합니다.

한국 기독교 내에도 언론사가 참 많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한두 곳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역할을 하는 매체는 없는 거 같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저 돈 벌이 수단으로, 형식적인 면모만 갖춰,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언론인들과 기독교는 양심의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양심을 속이는 신앙인들, 그리고 언론인들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양심을 가지는 주요한 내용으로는 양심상 결정의 자유, 즉 자신의 도덕적 논리적 판단에 따라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확신할 수 있는 자유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는 개인의 마음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제한 될 수 없는 절대적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침묵할 자유도 있습니다. 하지만 언론인과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앙인들은 침묵도 좋지만, 요나처럼 나서서 외쳐야 할 때가 왔습니다.

계속 이런 형태의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기독교의 미래는 암울할 뿐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기독교인들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나서서 죽음을 불사하고 항거하고 외쳤습니다. 그것이 초대교회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본보기가 아닐까요?

남이 나에게 시기와 중상모략을 할 때,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리는 것은 마땅할 수 있지만, 복음을 전하는데 걸림돌이 있다든지, 교회나 노회 총회에 잘못이 있을 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과감히 그 잘못을 지적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마찬가지며, 나라와 백성에게 해를 당하는 일이라면, 마땅히 외쳐야 합니다.

교회의 개혁과 나라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침묵은 오히려 화를 자초하는 단초를 제공할 뿐입니다. "예"와 "아니오"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만이 기독교의 미래를 열어가며 나라와 백성도 위기에서 구할 수 있음을 모든 신앙인들은 깨달아야 합니다.

이효준 은퇴장로(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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