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욱 연애는 다큐다
▲ⓒ사진 박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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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남자든 여자든 가릴 것 없이 지혜는 중요하지만, 특히 여성에게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남자보다 연약해서 자주 피해를 입기 때문에 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성의 인권이나 위상이 높아진 어떤 사회에서도 여성들은 아직 약자이다. 참된 존중과 공생의 의지가 부족하면 외적인 조건이 아무리 올라가도 근본적인 평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여성에게는 자신을 위한 지혜가 필요하다. 여전히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남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여러가지 지혜가 필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꼭 알아야 할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눈을 보고 말하는 기술이다. 이것은 물론 단순히 대화할 때 눈을 쳐다봐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중요한 이야기일수록 반드시 직접 얼굴을 보면서 하라는 뜻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요즘 남녀 사이에서 많이 벌어지는데, 그중 심각한 것이 데이트 폭력이다. 말이 폭력이지 살인 피해자도 연간 세 자릿수를 넘기고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남성의 악한 의도나 우발적 화풀이에서 비롯되지만, 여성들도 너무 상대를 쉽게 보지 않았나 싶을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뉴스나 르포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문자로 이별 통보를 한 것에 격분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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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약이 오르면 거칠어지고 앞뒤 분간을 못한다. 또한 거절당하는 것을 잘 참지 못한다. 그래서 여자가 만나 주지 않고 피하거나 무조건 거절하면 분을 이기지 못해 판단력과 자제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렇게 휘발유처럼 변한 사람에게 작은 불꽃을 던지면 그는 이성을 잃고 만다.

어쩌면 폭력으로 비극을 초래한 남자들 중 어떤 사람은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만나 진짜 마음 속 이야기를 듣고 싶었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랑했다는 말, 잘 가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얻고 싶었을 수도 있다.

처음부터 괴물은 없다. 그 사실이 폭력이나 상해라는 범죄에 정상참작이 되는 것은 아니라 해도 말이다.

여자가 중대한 이야기를 문자로 툭 던지고 슬슬 피하며 벌레 보듯 하고, 스스로 세운 원칙과 자기 입장만을 내세우면, 약이 오른 남자는 소유욕과 상실감이 너무 커져 어떻게든 직접 만나야겠다는 생각, 어떻게든 갖겠다는 생각만이 커지게 된다. 끝내는 '내가 가지지 못할 바에는 아무도 가질 수 없게 하겠다'는 눈먼 애증으로 괴물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일단 싫으면 단 1분도 마주하기 싫고 끔찍할 수 있겠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는 제대로 만나 얼굴을 보고 눈을 마주치며 잘 설득하고 사정을 말한 뒤에 진심으로 안아주고 보내면 훨씬 잘 포기하고 이해한다. 더는 방법이 없음을 직접 확인하고 돌아설 시간과 기회를 주는 것은 한때나마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마지막 배려이다.

어느 영화인가 드라마에서, 아이들과 애들 엄마를 미국에 보내놓고 끼니를 거르며 죽도록 일한 기러기 아빠에게 이제 따로 살자고 아내가 전화로 통보하는 장면이 있었다.

미국에서 살아 보니 좋고, 아이들도 계속 그곳 시민권자로 살게 하고 싶은데, 한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영어 한 마디 모르는 남편이 부담스럽다. 눈에서 멀어지니 마음에서도 멀어져, 미안하지만 이젠 돌아가도 살을 섞고 다시 살 자신이 없다.

그런데 현지에서 남은 인생을 잘 이끌어 줄 사람이 관심을 보이고, 자신도 일을 찾아 이제는 삶에 찌든 초라한 남편에게서 독립할 능력이 생기니 마음이 떠나버린 것이다. 내 일도 아니었지만, 가장으로서 만일 저런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면 최고로 비참하겠구나 싶었다.

일어날 가능성 없는 일은 공감하기 어려운 법이다. 누군가의 실화였을 그 상황이 더욱 서글프게 느껴지는 것은, 그 무미건조한 이별 통보가 전화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보면서 말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긴다. 그것을 말하는 사람도 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는 것은 상대방의 존재감을 뭉개는 것이며, 정말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므로 상대를 더욱 자극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 놓인 남자에게 침착함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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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여자는 군대에 간 남친을 두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으면서, 그것을 편지나 문자로 통보하는 여자다. 물론 제대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군에서 고생하는 외롭고 불안한 남자에게 너무 가혹한 짐이다.

편지로는 암시만 주고, 직접 면회라도 가서 손을 잡고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예전에는 애인의 변심으로 탈영하는 군인이 꽤 있었다.

아이가 다쳤거나 아이를 잃어버렸더라도, 지혜로운 아내는 빗길 고속도로를 운전해 달려오는 남편에게 전화로 불쑥 알리지 않는다. 큰 일을 간단한 정보로 알게 되면 걱정은 커지고 온갖 부정적 상상력이 증폭해 훨씬 나쁜 시나리오를 쓰게 되는 법이다.

연인 사이의 좋지 않은 이야기를 간단한 말이나 문자로 접하면 그 순간 모든 것은 엉망이 된다. 지금까지의 일들이 다 거짓인 것 같고, 처음부터 속이려던 것으로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

심각한 상황이라도 직접 만나면 마음이 풀린다. 중대하고 위험하게 발전될 가능성이 있는 일일수록 만나서 처리하는 것이 좋다. 실패한 연애라 해도 자기가 벌인 일에는 즐거움과 함께 책임과 대가도 따르는 법이다. 모든 일에 무조건 만나라는 게 아니다. 어떤 경우는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지혜롭게 판단해 피해나 부작용을 최소화하라는 뜻이다.

아무리 잘못된 사랑도 일단락을 짓고 넘어가야 한다. 자꾸 회피하면 평생 원한을 품은 사람들의 추적과 악소문과 험담에 시달리고, 삶의 영역은 점점 좁아질 것이다. 이는 오뉴월 서리를 맞을 수 있는 남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말을 직접 대면해 눈을 보며 말하는 것은 연인이기 전에 인간에 대한 예의이다. 사랑은 존중이다. 끝날 때 끝나더라도 존중받았다는 느낌이면, 상대방도 눈물을 닦고 돌아서서 자기 길로 간다. 그렇게 지혜로운 사랑은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릴 수 있다.

김재욱 작가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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