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칭의’, 값싸고 손쉬운 구원과 교회 부흥 위한 동기일 뿐?

입력 : 2017.06.08 23:24

[이경섭 칼럼] 르네상스와 이신칭의

이경섭 응답하라 개혁신학
▲이경섭 목사.
스콜라주의(Scholasticism)와 르네상스(Renaissance)는 기독교를 이성주의와 인본주의로 오염시킨 원흉이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지만, 종교개혁의 단초가 되게 했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었습니다. 아니러니하게도 성경의 신적 권위를 공격한 인문주의가 성경적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의 단초가 됐고, 순수 원전으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 운동이 순수 성경주의에로의 회귀를 도왔습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는, 성경을 이성적으로만 분석하려는 태도를 지양하고 초자연적 은총에 의한 신앙 곧 이신칭의 교리의 재발견 같은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루터(Martin Luther)의 이신칭의(以信稱義) 재발견은 순전히 하나님 은혜의 경륜이었지만, 시대정신 인문주의에도 일정 부분 빚졌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위협하던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쓰나미를 종교개혁의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이 점에서 루터만큼 '위기가 기회'라는 속담을 실감나게 한 경우는 없습니다. 루터뿐이겠습니까? 르네상스가 없었다면 종교개혁도 없었다고 할 만큼, 인문주의는 당대의 개혁자들에게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에게는 성경 연구의 기반을 구축해 주었으며. 칼빈(John Calvin)에게는 신학적 사고의 틀과 표현 방식을 제공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인문주의가 신본주의 신학을 구현하는 도구가 됐습니다.

칼빈의 대표작 <기독교 강요>가 인문학적 관점을 차용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는 인문주의에서 단순히 학문의 방식만 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벌이 꽃에서 당분을 빨아 고영양의 꿀로 토해내듯, 칼빈(John Calvin)은 당대로부터 섭렵한 인문학적 지식을 신본주의 신학으로 재창출해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 인문주의는 극복해야 할 대상인 동시에 유용화(to utilize)의 대상이었습니다.

르네상스가 갖다 준 또 하나의 사조가 분화(differentiation)였습니다. 주지하듯 중세는 포괄적 개념이 지배하던 시기였는데, 르네상스가 분화 개념을 동시대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교회가 종교, 정치, 예술, 문화 등 제 영역을 지배해야 한다고 보았던 중세의 제정일치(Theocracy) 시대에, 분화 개념은 분명 교회에 대한 심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도 도도히 흐르는 르네상스의 물결을 거스를 수 없었고, 점차 그 영향권 아래 들어갔습니다.

물론 중세의 제정일치(Theocracy) 개념은 그 이상과는 달리 실현 불가한 개념이라는 인식이 사람들 뇌리에 이미 파고들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유한된 교회의 능력으로 제반 영역을 다 커버한다는 것은 사실상 버거운 일이었고, 실제로 그런 버거움이 많은 오류들과 미신들을 양산했습니다. 지구는 둥글다고 주장한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를 종교재판에 회부한 일, 저 유명한 마녀 사냥(witch-hunting), 퇴마술(退魔術)과 구타에 의존한 정신 치료의 부작용 등은 다 제정일치의 부유물들이었습니다.

르네상스의 분화 사상은 기존의 왜곡된 포괄적 하나님 주권 사상을 수정시켰고, 교회는 본연의 임무인 신앙과 신학 외 여타 영역들을 교회로부터 독립시켰습니다. 이 시기 종교개혁과 함께 자연과학, 예술, 문학 등이 활발한 발달을 이룬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특히 교황의 권위 아래 있던 국가들의 정치적 독립은 괄목할 만 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하나님(교회)의 통치는 형식상의 독점으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제 영역이 교회의 장악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한다고 하나님 주권이 훼손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학습시켰습니다. 중세시대의 영주 통치가 중앙의 황제 통치를 더 효율적이고 공고하게 했듯, 분화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더욱 효율적이게 했습니다.

이 분화(differentiation)는 후에 정치는 정치에 맡기고 종교는 종교에 맡기자는 칼빈(John Calvin)의 이중 정부론과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의 영역 주권(territorial sovereignty)사상의 단초가 되고, 20세기에 이르러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의 기폭제가 된 분업화, 지방자치의 단초가 됩니다.

분화(differentiation)는 신학에도 동일하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이성의 영역과 초자연적인 신앙 영역을 구분 짓고, 쌍방이 서로를 인정해 주려는 풍토가 생겨나게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중세의 뜨거운 감자였던 칭의(중생) 교리에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대세였던 신인협력적 칭의론 외에, 칭의를 신성불가침의 하나님 고유 영역으로 돌리자는 논의의 단초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인간 생명의 창조가 하나님의 고유 영역이듯, 영적 출생인 중생(칭의)도 하나님의 고유 영역이어야 한다는 논리렸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돌리라(마 22:21)"는 성경의 지원도 논리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르네상스의 낙관적 인간론이 신인협력적 구원론을 확산시켰다면, 르네상스의 분권 사상은 칭의를 신성불가침의 하나님의 고유 영역에 돌리게 했습니다(르네상스가 누구의 손에 들렸느냐에 따라 그 결과도 이렇게 달랐습니다).

칭의를 사람이 손대는 것은, 마치 웃사가 신성한 법궤를 만진 것처럼(대상 13:10) 저주받을 짓거리로 간주됐습니다. 루터(Martin Luther)가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된다고 부르짖었던 배후에는, 복음적 확신 외에 칭의가 신성불가침의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라는 확신이 자리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갈 3:10)"라는 말씀대로, 칭의에 간여하다가는 저주에 떨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이신칭의를 발견하기 전에는 율법의 의를 이루지 못한 데 대한 두려움이 루터를 사로잡았다면, 후에는 신성불가침의 이신칭의에 감히 손댈까 하는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칭의유보론에 유독 경계심을 갖는 것도 이런 두려움에서 연유합니다.

이처럼 칭의의 신성불가침은 복음과 더불어 칭의의 확신에 이르는 한 근간이 됩니다. 종교개혁 당시 일부 개혁자들이 칭의와 윤리의 변증법에 휘둘려 의의 확신을 담보 받지 못한 것과 대조됩니다.

의아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종교개혁자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 부처(Martin Butzer, 1491-1551) 그리고 이후 일부 경건주의적인 청교도들에게 그러한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곧잘 '하나님이 구원올 예정하신 사람은 거룩한 삶올 산다- 나는 거룩한 삶을 산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이 구원하도록 예정한 사람이다'는 3단 논법을 구원 확증을 위한 변증법으로 차용했기에, 칭의의 확신은 저당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했듯 루터나 칼빈은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그들과 달리 칭의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는데, 이는 3단 논법에 휘둘리지 않고 칭의가 오직 하나님의 고유 영역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 그대로 참된 중생자일지라도 훌륭한 행동이 따르지 않을 수 있고, 거짓된 신자일지라도 좋은 행실이 따를 수 있음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다음의 길리안 에반스(Gillian R. Evan)의 말은, 종교개혁 당시 인문주의가 개혁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잘 나타냅니다.

"인문주의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던 츠빙글리는 기독교의 칭의를 도덕과 연결짓게 하여 칭의가 반드시 도덕적 결과(도덕적 중생)를 낳는다는 입장을 견지했고, 부처의 경우에도 루터의 칭의에 관한 신학을 이와 유사하게 수정했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칼빈은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1559년판 <기독교 강요>에서 가장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는 칼빈의 칭의 신학은, 칭의와 성화 사이의 관계에 대한 뛰어난 기독론적 해석을 통해 이 문제에 관해 개혁파 신학을 인문주의와 분리시키고 있다. 그의 해석에 의해 도덕적 칭의에 관련된 인문주의적 관념이, 인간의 값없이 받는 칭의와 이에 따라 선행을 수행해야 하는 의무 사이의 연결이 제외되고 있다."

또 르네상스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성(理性)의 한계를 인정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성을 숭상하는 인문주의가 이성(理性)의 한계를 인정했다는 것이 의아하게 들릴지 모르나, 이성의 과신으로 생긴 부작용들이 이성 숭상을 깨뜨리는 반면교사 역할을 했습니다. 크게는 플라톤으로부터 스콜라주의에 이르기까지 이성이 분수를 넘어 영적 세계까지 넘본 것에서부터, 사소하게는 "바늘 위에 천사가 몇이나 앉을 수 있는가"라는 우스꽝스러운 논쟁과 성경 숫자에 대한 알레고리칼한 해석(형이상학적인 숫자 놀음)까지 다양했습니다.

그 결과,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이성주의가 상처를 입는 것이 아닌, 이성주의의 자존이라는 것을 르네상스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러한 이성의 한계에 대한 인정은, 성경의 계시관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곧 계시를 하나님의 주권에 두는 계시 존중사상을 낳았고, 이전에 간과됐던 성경 구절들을 새롭게 주목하게 됐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마지막으로 르네상스가 갖다 준 또 하나의 선물은 신본주의의 회복이었습니다. 중세의 신본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개성의 매몰 위에 세워진 전제적이고 폐쇄적인 신본주의였습니다. 인간의 가치를 주목하는 휴머니즘인 르네상스로부터 교회는 신본주의는 인간의 가치가 존중되는 터전 위에서 구현돼야 한다는 것을 시사받았고,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고귀한 인간상(창 1:27)에 재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가치관 회복은, 결코 신본주의를 훼손하는 것이 아님도 학습시켜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다(막 2:27)"고 하신 말씀은, 인간은 율법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인간 가치의 재인식을 촉구한 것이었지,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라는 신본주의의 훼손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교수가 개혁주의 교육학을 '인간 중심의 교육'이라고 정의한 것도, 루터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 개념도, 결코 신본주의에 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신본주의란 결코 인간에 대한 무시와 억압 위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 개인의 자유에 의해 침해당하지도 않을 뿐더러, 인간의 자유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억압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종교개혁의 유산인 이신칭의를 보존하려는 것도 신본주의의 발로에서입니다. 칭의는 신성불가침의 하나님 고유의 권한이며, 동시에 인간을 위하여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 곧 휴머니즘적인 신본주의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재차 말하지만 우리가 이신칭의를 고수하려는 것은, 칭의유보자들의 비아냥처럼 값싸고 손쉬운 구원에 '홀릭'돼서도, 사람들의 비유를 맞춰 교회부흥을 도모하려는 동기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요 6:40)",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연구위원,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이신칭의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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