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5)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흩어져 숨어버린 제자들을 찾아다니시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방문하신 목적은 그들을 온전하게 회복시켜 본래의 사명을 되찾을 뿐 아니라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비전을 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은 예수께서 갈릴리 어부로 되돌아간 베드로를 직접 찾아가 만나주시는 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만남을 통하여 베드로는 제자로서의 본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예수께서 그를 위하여 베풀어주신 세 가지 깊은 사랑의 배려가 있습니다.

1. 첫 번째 배려는 베드로의 빈 배를 153마리의 큰 물고기로 채워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6명의 제자들과 함께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결과는 빈 배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닷가에 서 계신 예수께서 그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 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명령에 따라 그물을 던지자 큰 고기 153마리가 잡혔습니다. 빈 배로 돌아오는 그에게 많은 물고기는 너무도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의 배려 속에는 빈 배를 채우는 것 이상의 더 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빈 배로 돌아오던 베드로가 많은 물고기를 잡았던 것은 그날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처음 만나던 날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의하면, 그날도 베드로는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채 빈 배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배를 잠시 빌려 타시고 바닷가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명령대로 베드로가 순종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 일로 베드로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고, 예수께서는 그를 사람 낚는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빈 배로 돌아오는 베드로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게 하여 153마리의 큰 물고기를 잡게 하신 것은 단순히 빈 배를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첫 만남의 그 사건을 기억나게 하시려는 배려가 숨어있습니다. 곧 첫 시간의 고백과 감격,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첫 헌신의 순수한 다짐을 기억나게 하는 사랑의 배려였습니다. 아무 말 없이 직접 행동으로 그것을 재연하여 보여주신 것은 베드로가 스스로 잃어버린 첫 사랑과 첫 믿음을 회복하도록 은밀히 도와주시려는 따뜻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만큼 깊은 사랑으로 베드로를 감싸 안아 주신 것입니다.

2. 두 번째 배려는 숯불에 고기를 구워 따뜻한 아침식사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밤새도록 일에 지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몹시도 시장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위하여 친히 따뜻한 조찬을 마련해 주신 것은 특별한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단순한 식사 마련이라는 배려보다 더 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고기를 구은 '숯불'(헬라어 '안뜨라키아')이란 단어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똑 같은 단어인 '숯불'(안뜨라키아)이 요한복음 18:18에도 나오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실패의 자리였습니다. 베드로에게 그곳은 기억에서조차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피하고 싶은 자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숯불가로 베드로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그곳은 베드로가 생각하는 것처럼 더 이상 실패의 자리가 아닙니다. 실패에 대하여 책망하거나 질책하는 자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피곤과 허기에 지친 베드로에게 따뜻한 아침식사를 마련해 주는 사랑의 배려가 넘치는 자리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베드로의 잘못을 이미 다 용서하셨음을 말없이 전해주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던 그날 밤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뛰쳐나가 심히 통곡하며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였습니다(마 26:75). 그러나 죄책감은 여전히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숯불 주변의 식사자리로 초대하심으로 예수께서는 그 죄책감마저도 용서하여 주신다는 깊은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계신 것입니다.

3. 마지막 배려는 세 번이나 거듭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식사를 마친 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 번이나 거듭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로서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바울과 함께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로서 사도행전의 전반부를 이끈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 역시 사랑의 깊은 배려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있기 전에 베드로는 "오늘밤 너희들이 나를 버리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하면서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라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마 26:33). 그러고 나서 몇 시간이 못 되어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그때 그 고백은 꾸밈이나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기도하지 않은 채 인간적인 의리나 인정에 끌린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닥쳐오자 자신도 모르게 그 순간을 모면해보려고 예수를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부끄러워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며 회개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진심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비록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긴 했어도 그것은 일시적으로 약해진 그의 모습일 뿐 여전히 주님에 대한 사랑은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통하여 다시 한 번 더 베드로의 마음속에 억눌린 채로 남아 있었던 진심을 확인하신 것입니다. 실패자로 서 있었던 베드로는 그런 질문 앞에서 더 이상 사랑한다는 말을 자신 있게 고백할 용기나 의욕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의 배려에 힘입어 베드로는 맨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사랑의 고백을 끄집어 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초대교회의 수장 역할을 위임하신 것입니다.

그렇듯이 부활의 주님께서는 사그라지는 사랑의 불씨도 다시금 살려내시는 분이십니다.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런 사랑의 배려로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사랑을 회복하고 초대교회의 위대한 사역자로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베드로처럼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기준에서 크게 벗어난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첫 믿음을 회복시켜주시며, 실패의 상처를 감싸주시며, 이런 저런 환경과 이유 때문에 제대로 펼쳐 보이지 못한 진심을 끄집어내어 바르게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사랑의 배려로 우리들을 온전하게 회복시키시는 일에 모든 것을 집중하시는 분이십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배려로 회복된 베드로가 위대한 초대교회 사역자로 나서기 전에 먼저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주변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나약한 제자들에게 온 세계와 땅 끝까지 나아가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들과 함께 하실 성령의 능력을 전제하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게 하시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시는 마지막 배려인 셈입니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 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이 칼럼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해당 블로그에서 퍼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