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 목사(하나로교회).

○본문 배경 설명    

본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놓고 바울이 말씀을 가르친 내용의 일부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라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가장 중심이 되는 문제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지 못하는 문제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연합했어도 모래알처럼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한 이런 교인들에게 바울은 본문 첫 부분에서 옛날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신령한 공동체를 이루었어도 죄를 지어 망하게 된 사실을 들어서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는 구원을 맛보았으나 광야에서 우상을 섬김으로 결국 멸망하고 만 이 사실을 실례로 삼아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도 돌이키라!’ 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죄란 ‘우상숭배’입니다. 14절에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합니다. 이들의 우상숭배란? 이방 신전을 드나들면서 예배하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제물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아 교회를 형성했어도 예수를 믿기 전에 했던 행위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우상을 섬기다가 망한 사실을 거울로 삼아서 ‘너희도 스스로 판단해보라!’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우상을 섬기다가 망한 사실을 거울로 삼아서 판단해보라는 것은 고린도교회를 바로 지적하는 설교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앞 구절에서 말한 것을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2절에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구름은 하나님께서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이고, 바다는 홍해 바다를 무사히 건넌 사실을 말합니다. 광야로 지날 때 하나님께서 구름을 덮어서 뜨거운 햇빛을 가려 지켜주셨고, 바다 물이 덮치려 할 때도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세례”라고 합니다. 홍해를 건너고 광야의 구름기둥은 오늘날 물세례와 같습니다(레 14:8; 출 40:34). 

구약 성도들이 세례를 받아서 신령한 공동체가 되었어도 광야에서 멸망당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적 상황에서 우리 같으면 이걸 놓고 무엇을 저울질 합니까? ‘이 사람들이 구원받았나, 안 받았나’ 이렇게 저울질 하지요? 세례를 받아서 교회를 이루었어도 멸망당한 이 사실을 ‘거울로 삼아라!’ 하고 6절에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긴장을 늦추지 않게 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심각성은 광야 이스라엘의 죄와 같다는 데에 있습니다. 멸망당할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구원의 공동체로 노예적 삶에서 구출을 받았으나 여전히 거룩함, 구별함이 없고 불신자와 같은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도 그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통치가 있어도 그 통치를 받아서 살지 아니하고 여전히 옛날에 하던 방식 그대로를 취하고 자기방식대로 살아갑니다. 그것을 14절에서 “우상숭배”라고 표현합니다. “우상숭배에서 멀리 하라!” 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우상숭배가 무엇이라고요? 과거에 다니던 신전을 드나들면서 그들과 함께 앉아서 식탁의 음식을 먹고 마십니다. 바울이 지금 고린도 교인들이 우상 신전을 드나들면서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과 대비하여 그리스도의 성찬을 가르칩니다. 16절을 다같이 보지요. 

“(16)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고린도 교인들이 이 말씀을 잘 배워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배교하고 나가는 교회라면 이 사도가 한 말을 유념하여 듣고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 16절에 “잔”이란? 성찬의 포도주인데, 유월절 식사 때에 네 번의 잔을 마시는데 그 중에 네 번째 잔이 ‘축복의 잔’입니다. 성찬의 잔은 바로 이 네 번째 잔인 ‘축복의 잔’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 공로를 덧입어 죄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죄에서 자유롭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없지요? 사람의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죄에서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잔치할 일이지요?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죄에서 자유한 자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성찬의 잔과 빵에 참여한 자는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 것이 아니냐?’ 하고 반문합니다. 결국 교회가 형성된 근본을 지적하는 것인데, 교회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피, 어린양으로 피를 흘린 사실에 근거하여 연합된 것이 교회입니다. 

바울이 지금 불신자들의 신전에 드나들면서 그들의 식탁을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버리지 못하는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피 흘림에 참여한, 거룩한 성찬 식탁에 참여한 너희들이 맞느냐? 맞다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것이고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올라 주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다!’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너희들이 교회이다,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하는 이 말은 하나님의 진노를 경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 바울의 설교를 듣고 하늘에도 올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로 명확히 구별하지 않으면, ‘고린도교회 너희도 광야 이스라엘 교회 같이 망한 꼴을 당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러니까 축복이면서 경고이지요? 교회는 그런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공동체입니다. 

마치 불교인처럼 절에 이름을 올려놓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절에 가서 복을 빌면 복을 받고, 교회생활이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이름을 올려놓고 여유가 있으면 교회 출석을 해서 교회를 이루고 그러면서 내가 하고 싶은 거는 마음껏 하고 그러면 천당에 가는 이런 공동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그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면서 육체의 기회로 삼는 교회는 멸망당할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에 속한 성도, 이런 우리는 좀 더 긴장을 가지고 주님의 가르침을 배울 필요가 있지요? 오늘 교회를 이루는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무엇인지 좀 더 상고하고 깨달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한 몸’

바울이 17절에 말한 것을 보겠습니다. 다같이 17절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여기 “한 떡”은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말하지요? “한 떡에 참여함”은 ‘그리스도에 참여한다’는 거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합니다. 떡이 가리키는, 성찬의 떡은 그리스도를 가리키지요? 이 떡이 가리키는 그리스도를 믿고 떡이 상징하는 뜻이 무엇인지 알아서 믿음으로 참여하면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분과 연합됩니다. 그분과 연합되니까 신자 상호간에도 긴밀하게 연합됩니다. 이것을 ‘한 몸’이라고 표현합니다. 마치 우리 육체의 몸처럼 유기적으로 연합을 이루어서 존재하고, 또 그리스도와 같이 활동하고 자라기도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한 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다 참여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성찬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성찬을 잘못 행하거나 그 뜻을 잘 모르고 행하거나 안 하거나 하면 한 몸이라고 할 수 없지요? 한 몸이라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합당한 성찬이 없는 교회는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장 바로 앞에 11장을 보면 고린도교회는 성찬을 잘못 행하여 병든 자도 생겼고 죽은 사람도 많았습니다(30절). 속히 돌이키지 않으면 큰 징계를 받을 꺼죠? 

합당한 성찬이 없는 교회는 반드시 죽음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라는 말을 붙일 때 반드시 ‘한 몸’, ‘그리스도의 몸’일 때만 붙일 수 있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데도 교회라는 말을 붙인다면 이는 종교단체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가 빠지면 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봐라!’ 하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찬에서 잘 나타납니다. 

○‘한 몸’, 태초에 시작하심

‘그리스도와의 연합’, ‘한 몸’, 이것을 잘 생각해야 할 텐데, 본래 하나님께서 최초에 사람을 만드실 때 ‘연합’을 전제하고 만드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창 2:24) 이때 한 몸이라고 한 것은 단지 오늘 가정처럼 부부가 한 몸이라고 하는 말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당시는 가정이면서 ‘교회’입니다. 두 몸이나 둘 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생의 목표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 몸’이라고 합니다. 두 몸이지만 생의 목표가 같고 또 그 목표를 이루는 방식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하는 것 때문에 한 몸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 생의 목표가 다르거나 혹은 같을지라도 이루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면 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삶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그 방식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각자 활동하지만 그 활동하는 목표나 방법은 똑같습니다. 마치 우리 몸이 한 몸에 붙어 있는 손인데, 이 몸에 붙어서 긴밀하게 조화를 이루듯이 남편과 아내도 긴밀한 관계와 조화를 이루므로 ‘한 몸’이라고 합니다. 서로 자기들 둘만 죽고 살지 못해가지고 한 몸이라고 하는 것은 이건 틀린 말입니다. 

따라서 혼인 서약을 하고 혼인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뜻을 준행하는 한 정신 안에 매입니다. 단지 제도를 따라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고, 그 서약 안에 매여서 하나님의 뜻을 준행한다는 점에서, 그런 정신이 그 안에 같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특히 오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 긴밀히 연합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단지 사람끼리 한 몸 정도가 아니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룹니다. 그러니까 가정에 부부가 한 몸을 이룬다는 한 몸과는 훨씬 다르지요? 

이 일을 주님께서 태초부터 벌써 시작하셨습니다.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 벌써 아담 한 사람을 대표로 세우시고 그 아래에 오고 오는 모든 인류가 신령하게 연합하여 주님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