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5년 7월 5일
본문: 고린도전서 7:18~40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부르신 그곳에서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고린도전서 7장 18-40절]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기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27.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28.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33. 장가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34.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35.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36. 그러므로 만일 누가 자기의 약혼녀에 대한 행동이 합당하지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그 약혼녀의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원하는 대로 하라 그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그들로 결혼하게 하라
37. 그러나 그가 마음을 정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약혼녀를 그대로 두기로 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38. 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
39.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40. 그러나 내 뜻대로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을 지나면서 순서를 조금 바꿔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감사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간에 읽은 책이 있습니다. R. T. 켄달이 쓴 [내일의 기름부음]인데, 오랜만에 참 인상 깊게 읽은 책인 것 같습니다. 켄달은 우리 크리스천이 꿈꾸는 ‘기름부음’에 대하여 어제의 기름부음으로 끝나는 사람과 현재의 기름부음으로 사용되는 사람, 그리고 내일의 기름부음을 기대하는 사람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불행한 것은 우리의 삶이 어제의 기름부음으로 끝나는 것이죠. 여러 가지 증거들이 있지만, 자신에게 주신 은혜와 은사를 잊고 남의 것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기 시작할 때 기름부음이 끝났다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셨으나 어제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순간 그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잊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 다윗을 시기하며 질투에 눈이 멀어 20년간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하나님께서 버리셨지만, 그가 받았던 은혜로 말미암아 20년간 왕의 자리를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직 그가 왕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버림받은 채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기름부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그것을 감당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보았던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날 제자 마가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예수님이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이었다. 제자 마가는 예수님께로 달려가서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겠노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실 따름이었다.
제자 마가는 예수님께 간청했다. “주님, 제발 저에게 십자가를 넘기십시오.”
그런데 주님은 그를 모른 체하시며 십자가를 양어깨로 무척 힘들게 걸쳐 매고 묵묵히 걷기만 하셨다. 제자 마가는 가슴이 아프고 당혹스러웠지만, 끈기 있게 예수님께 십자가를 넘겨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더니 마가에게로 몸을 돌리셨다. 그리고 마가가 예수님을 처음 목격했던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형제여, 이것은 내 십자가란다. 네가 조금 전에 내려놓은 네 십자가는 저기 있지 않느냐? 내 십자가를 져주려고 하기 전에 네 십자가부터 지려무나.”
제자 마가는 뒤로 돌아 예수님이 가리키신 지점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이 버렸던 십자가가 있었다. 그는 얼른 그 십자가를 걸머지고 예수님이 기다리시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놀랍게도 예수님의 어깨에 걸려 있던 십자가가 온데간데없었다.
“주님, 주님의 십자가는 어디로 간 겁니까?”
제자 마가가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은 빙그레 웃으며 대꾸하셨다.
“형제여, 네가 사랑으로 네 십자가를 질 때 바로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다름없단다.”
- 출처 / 페이스북 ‘예화공작소&희망충전소’ -


“생긴 대로 살기!”
고린도전서 말씀을 준비하며 오늘 본문으로 정했던 제목은 본래 ‘생긴 대로 살기’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고상하게 말한다면 오늘의 제목을 ‘부르신 그곳에서’라고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중 전반부의 18~24절의 말씀은 교회가 생긴 이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늘 있었던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상대방이 나와 같기를 원하고 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상대방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이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게 된 부르심의 자리가 다 달랐던 것이죠. 어떤 사람은 이방인인데 부르심을 받고, 어떤 사람은 유대인인데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 둘의 가장 큰 외적 차이는 ‘할례’에 있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이들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에 대하여 감사하기보다는, 이전 사람의 모습 때문에 비교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이죠.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아주 명확하게 말합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우리 신앙도 같습니다. 나와 같은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비난하거나, 나와 같은 신앙의 길을 가도록 인도하는 것을 ‘전도’라고 착각합니다. 굳이 다른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자기 교회로 인도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당신도시가 세워지던 초창기 참 많은 교회가 들어왔습니다. 길거리를 가다가 참 인상적이기도 하고, 조금은 불쾌한 플래카드가 길거리에 붙어 있었습니다.
“우리 목사님 설교 한 번 들어보세요!” 아무래도 개인이 붙여놓은 것 같지는 않고 교회에서 전도의 전략으로 붙여 놓았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 교회에서는 전도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실상은 ‘교회 홍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때,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가 유대인으로서 먼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이방인들을 보는 태도였던 것 같습니다. 유대의 전통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데 자신들과는 조금 다른 듯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방식으로 예수를 믿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좋게 말해서 ‘바람’이지 사실은 ‘독선’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 18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지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18-19.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을 때 여러분이 유대인이었습니까? 그렇다면 유대인이라는 증거를 없애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여러분이 이방인이었습니까? 그렇다면 유대인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유대인인지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또한,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닮아가는 것’과 ‘부러워하는 것’의 구별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앙에서 내가 닮아갈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큰 축복입니다. 하지만 부러워하는 것이 지나쳐 시기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재앙’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늘 자신의 약점이 ‘사도’라 불릴 수 없었다는 것이었죠.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속하지 않았던 것이 복음을 전하는 데 약점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울을 바울로 바꾸셔서 더 크게 쓰셨습니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사역에서 가장 큰 강점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가 예수님을 3번씩이나 부인했던 때의 기억이 늘 간증이 되지 않았을까요? 가는 곳마다 “나도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어요!”라고 말할 때, 연약한 사람들이 참 많은 위로를 받지 않았을까요? 누군가가 가진 것을 부러워하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군가와 비교해서 가지지 않은 것 때문에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누구도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나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가진 세상의 신분이나 육체적 조건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같은 특권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종이라도 주 안에서 자유함을 얻은 사람이요, 자유자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종 된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본문 23-24절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으로 다시 보겠습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간에, 한 때 여러분 모두는 죄악 된 사회에 볼모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몸값으로 어마어마한 금액을 치르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행하던 옛 습관으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친구 여러분, 여러분이 부름 받았던 그 자리에 머무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함께 계십니다. 고상한 자세를 견지하고 하나님 곁에 머무르십시오.”
우리가 부름을 받은 그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니 그 자리를 지켜야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우리를 부르신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죄의 종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어마어마한 값을 치르고 우리를 사셨으니, 우리가 가져야 하는 고상하고 존귀한 형상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 사람이 시키는 대로 죄의 종으로 살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환경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는 말을 메시지 성경에서는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행하던 옛 습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누가 우리를 부리고 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으려고 하는 부자유함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부르신 이유는 이제 죄의 노예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이제 모든 세상의 것에서 자유함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자유하십시오!
부르심은 우리를 부르신 그 자리에서 찾아옵니다. 사도 바울 시대에는 잘못된 자유의 개념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절제함으로 ‘죄’로부터 자유하고자 했던 ‘금욕주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살아간다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금욕적 욕구가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솟아나는 욕망을 무조건 억제한다고 우리의 죄성이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점점 죄의 욕망 가운데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힘으로 금욕적인 삶이 완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금욕적인 것으로 완전을 성취하려는 욕망이 다시 우리를 노예로 만들어가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우리의 욕망을 선한 의지로 바꾸는 것입니다.
돈을 얻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선하게 써야 할지로, 우리 속에 솟아나는 성욕을 결혼의 제도 안에서, 우리가 갖고자 하는 명예욕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도록 말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 역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 있는데, 금욕적인 욕구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자신을 숨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금욕을 위해 독선적이 되거나 위선적이 되는 경향을 가지게 됩니다.
‘독선’은 남을 의식하지 않는 죄고, ‘위선’은 남을 의식하는 죄가 됩니다.

부르심이 가치가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값 주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7장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결혼과 독신 혹은 이혼의 문제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 각자 각자의 상태가 어떠한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상황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결혼과 독신이라는 인간의 제도가 하나님의 법을 앞설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25~40절까지는 ‘처녀들에 대한 교훈’이 나오고 있습니다. 본문 25~26절을 보세요.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주께 받은 계명이 없다는 말은, 이 부분에 대하여 주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적, 혹은 목회적 판단으로 말하는 것인데,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그냥 지내는 것이 좋겠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어느 시대나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기독교 2000년의 역사 가운데 늘 반복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징조, 고통과 환난을 보면 마지막 때가 이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1장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그 시와 때는 사람들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신앙적 태도는, 주어진 삶을 가장 성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가장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문 27~28절이 그런 의미가 아닐까요?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32~34절의 말씀을 보세요.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결혼하지 않는 것이 정상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주의 일을 하는데 결혼하지 않는 것이 도움된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선교지에 나가 있는 선교사 중에 독신으로 사역하는 여자 선교사들이 성공적인 사역을 한다는 것이 통계로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서 남편과 아내의 예를 들었지만, 우리가 만일 어떤 것에 매여 있다면 어떻게 사명자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요즘 우리 집에서도 개를 키우지만 많은 가정에서 개를 키우면서 ‘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저도 개를 예뻐하지만, 개는 개입니다. 그런데 개를 너무 사랑해서 일에 문제가 생기고 사명에 문제가 생긴다면, 개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개에게 붙잡혀 있는 것이죠.
우리가 사는 집을 잘 가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가꾼 정성 때문에 집을 잘 사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자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다 보면 일관된 목회적 관점을 보게 됩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유익’이 되는가를 생각하는 것이죠. 결혼과 이혼의 문제에서도 어떤 율법적인 규제가 아니라, 무엇이 유익한가를 생각하라는 것이죠. 그것이 ‘진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이 목회하고 교회를 돌보는데 결혼을 하는 게 유익할까요?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유익할까요? 이것은 한 가지 정답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톨릭의 신부와 수녀들이 선교지에서 평생을 보내며 헌신할 수 있는 이유는 가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그만큼 돈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신교의 목회자들은 교회에 부임할 때, 결혼하지 않으면 잘 받지 않습니다. 밥해 먹고, 빨래하고, 집안 정리하면서 어떻게 교회를 돌보고 교인들을 돌볼지 말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신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결혼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의 기회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죠. 어떤 면에서 보면 결혼하지 않는 것이 자유하고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지만, 어떤 면에서는 결혼하는 것이 목회에 도움이 됩니다.
저는 목회의 가장 큰 특권이 결혼하고 살아가며 삶을 이야기하고, 자녀들을 키워보며 신앙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만일 가톨릭 신부들이 결혼한 목회자들을 보고 결혼한 것 때문에 자격이 없다고 말하거나, 결혼하지 않은 성직자들을 보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또 하나의 규범에 얽매이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규범’의 문제를 ‘진리’의 문제로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보아야 합니다. 전반부에 언급되었던 ‘할례’의 문제 역시 ‘규범’의 문제이지 진리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진리는 ‘할례’를 받을 때 마음이 새로워졌느냐의 문제이지 형식의 문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결혼’ 제도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인데, 그것이 걸림돌이 된다면 안 된다는 것이죠. 제도가 안전을 담보하는 데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진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가 지은 [성 크리소스톰] 전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크리소스톰은 주교로 있을 때 자신이 관장하는 교구 가운데 외딴곳을 방문했다, 그곳은 워낙 외진 곳인 데다가 오랫동안 사제가 없어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은 곳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사는 믿음이 좋은 한 농부를 뽑아 최선을 다해 교육한 다음 그곳 사제로 세우고 돌아왔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에 돌아온 크리소스톰은 마음이 불안했다.
“내가 자격도 없는 사람을 사제로 앉힌 게 아닌가?”
그래서 그는 다시 그곳에 가서 몰래 예배 시간에 참석해 보기로 했다. 그는 성당 기둥 뒤에 숨어 이 농부 사제가 어떻게 자기 책임을 다하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농부 사제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는 그토록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사제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짧은 설교를 하는 동안 농부 사제의 얼굴은 열정적으로 빛났고,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신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예배가 끝나자 크리스소톰은 제단 앞으로 나아가 농부 사제에게 축복해 달라고 무릎을 꿇었다. 그 농부 사제는 무릎 꿇고 있는 사람이 바로 주교인 것을 알자 깜짝 놀랐다.
“주교님께서 저를 축복해 주셔야 할 텐데, 어찌 저에게 축복해 달라고 하십니까?”
주교가 대답했다.
“나를 축복해 주시오. 나는 당신처럼 그렇게 뜨거운 불과 사랑을 가슴에 안고 예배드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소.”
그러자 그 농부 사제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주교님, 다른 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도 있단 말씀인가요?”
- 출처 / 페이스북 ‘예화공작소&희망충전소’ -

사제의 자격이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자격이 진심을 막지는 못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어디까지 제도를 신뢰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신앙의 본질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금세 율법적 바리새인들이 되기 쉽습니다. 규범대로 살면 쉽습니다. 선과 악을 쉽게 분별하고 쉽게 정죄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를 왜 따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을 먹는 순간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선악을 분별하지만, 그렇게 살 수 없는 무능력은 부끄러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하게 살도록 순종하도록 살도록 부르셨지, 선과 악을 분별하여 판단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말이 무엇인지 참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결혼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할례를 받으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본문 35절의 말씀을 보세요.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결혼에 대하여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는 것은 39절의 말씀입니다.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고린도 교회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에게 권면합니다. 될 수만 있으면 가정을 지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다시 결혼하게 된다면 ‘주 안에서’ 하라고 권면합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신앙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신앙을 지키고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혼자 사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가진 사람이 결혼하게 된다면 주 안에서 가정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 말씀의 결론이 무엇인가요?
우리를 부르신 그곳에서 우리의 사명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 사명을 찾을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감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과 행운을 쫓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랍비 레비가 하루는 길을 걷고 있는데 어떤 사내가 바쁘게 달려가고 있었다. 레비는 사내에게 물었다.
“여보시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시오?”
달리던 사내는 뒤도 안 돌아보며 대답했다.
“행운을 잡으러 갑니다!”
이 말을 들은 랍비가 웃으며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이로구만. 지금 자네의 행운이 자네를 잡으려 부지런히 뒤쫓고 있다구!
그런데 자네가 너무 빨리 가고 있어.”
- 출처 / 페이스북 ‘예화공작소&희망충전소’ -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모습을 보십시오. 거기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잊고, 하나님의 사람도 버리고 ‘과거의 사람’이 되었는지 말입니다. 과거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절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회복되면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기름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보기 원합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위해 여러분들이 사용되고 결단하는 모습 말입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축복, 지금 우리 손에 주어진 사명의 십자가 말입니다.

부르신 곳에 내가 서 있음을 확신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부르심의 자리에 있다는 것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보이는 순간 우리의 살은 늘 ‘best’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내 삶의 모든 주권을 그분에게 양보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께 드린다는 것은 ‘소극적 인생’이 아니라 그분의 인도하심에 내 삶을 온전히 헌신하겠다는 가장 ‘적극적 인생’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