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유튜브 동영상에 어느 목사의 천국 체험기가 떠돈다. 주님께서 2달 반 동안 한국전쟁에 대한 계시를 주셨다고 한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앞으로 두고봐야 할 일이다. 어디 그 뿐인가? 분당 어느 교회에서 한 장로가 한 땅굴 특강이 한반도를 후끈 달궈놓았다. 진실공방이 일어나고 있으니 진실인지 괴담인지는 두고봐야 할 일이다.

J. 레이는 “말은 마음의 초상이다”라고 했다.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에 있는 것이 말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보여주고, 영성을 드러내 준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말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깊이 생각하고 말한다면 저런 말을 할 수 없지.” 그러나 어디 그런가? 천박스럽게 말하고, 거칠게 말하고, 거짓으로 말한다.

우리는 심판받을 생각을 하고 말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 우리가 하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대까지 간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정죄를 받기를 원하지 않으면 입을 단속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공동체를 해치는 악성 종양과 같은 말을 경험한다.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딤후 2:17).” 이상한 게 있다. 사람들은 몸에 나는 악성 종양은 무서워하면서 말이 갖고 있는 독성은 잊고 산다.

세상에는 사랑을 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간하는 자가 있다. 사랑을 구하는 자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덮어준다. 그러나 이간질하는 사람은 허물을 자꾸 들추어내고 거듭 말한다(잠 17:9). 공동체를 지키려면 서로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미하엘 셸레는 소문을 “나를 파괴하는 정체불명의 괴물”로 정의한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 “나쁜 소문은 날아가고, 좋은 소문은 기어간다.” 떠도는 말 때문에 어떤 사람은 죽어가고, 공동체는 병들어간다.

어느 교회에서 한 집사가 담임목사를 찾아가서 말했다. “목사님, 아무개 장로가 담배를 피우는데 목사님께서 알고 계십니까?” 목사님은 “금시초문인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집사가 말했다. “목사님, 장로가 교인들 보는 데서 담배를 피우면 교회에 덕이 안 되지요. 그러므로 다음 주일에는 이 문제를 다루어 주세요.” 목사님은 생각했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 장로에게 이 말을 하라는 것이겠지? 아니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나 보자는 속셈이 깔려 있겠지?’

그래서 목사님은 그 집사에게 말했다. “잘 듣고 알았으니 다음 주일에 정식으로 당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다룰 테니 그리 아세요. 단, 부탁이 있습니다. 그때 집사님이 그 시간에 참석해서 증인이 되어 주셔야 합니다.” 그러자 집사는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목사님, 제가 본 것은 아닙니다. 어느 집사가 내게 말을 해 주어서 들은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목사님,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돌아간 집사는 그 시로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정말 그런가? 그런데 소문이라는 걸 생각해 보라.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얼마든지 ‘왜곡’될 수도 있다. 아니 아예 ‘거짓말’일 수도 있다. 심지어 ‘0%도 없는 일’이 ‘100% 사실’로 둔갑해서 돌아다는 경우도 많이 경험했다.

그래서 몇 가지 원칙을 정하고 싶다. ①들은 소문은 사실과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귀 기울이지 말자. ②직접 보지 않고는 말하지 말자. ③직접 보고 들었더라도, 속사정을 정확히 모르고는 말하지 말자. ④사실일지라도, 덕이 되지 않고 유익하지 않다면 말하지 말자. 그래야 자신도 공동체도 지킬 수 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이민목회를 하던 시절에 소문의 위력을 느끼고 ‘소문 실명제’를 실시한 적이 있다고 한다. 어느 날 운전 중에 뒤쪽 차와 살짝 부딪혔다. 그런데 소문이 나돌았다. “목사님이 사고가 나서 중환자실에 누워 계신다.” 정말 엉뚱한 소문으로 둔갑한 것이다.

그래서 ‘소문 실명제’를 이렇게 시작했다. “당회나 회의에서 의견을 나눌 때, 누가 말한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 누가 말한 것인지 밝히지 않는 소문이나 의견은 믿지도 말고, 듣지도 말자!”

실명을 거론할 수 없는 말이라면 하지 말아야 한다. 소문을 퍼뜨린 사람의 이름을 댈 수 없으면 말하지 말아야 한다. 무슨 말을 하려면 반드시 실명을 대고 말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을 부풀려서 남들을 힘들게 하고 공동체를 병들게 만든다. 어느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느 날 새벽 예배를 마친 후에 목사가 운동복 차림으로 운동을 하려고 나갔다. 우연히 모텔 앞에서, 새벽시장을 보러 나가는 여집사를 만났다. 이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 지나가던 어느 여집사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여집사는 친한 집사를 찾아가서 말했다. “이 집사, 우리 교회 큰일났어.”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일이 생겼어?” 여집사는 곤란해 하면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자기한테만 하는 말인데,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돼. 약속해야 돼? 우리 둘만 알고 기도하자.” 듣고 있는 집사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지 않을 테니까 빨리 말해 봐.”

방문한 여집사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은지 모르겠어. 내가 모텔 앞을 지나가는데 모텔 앞에서 목사님과 어느 여집사가 서 있더라.” 이 말을 들은 여집사는 자기가 친한 여집사에게 찾아가서 말했다. “우리 교회 큰일났다. 누가 우리 목사님하고 어느 여집사하고 새벽에 어느 모텔에서 나왔다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하지?” 이렇게 번져간 유언비어는 목사에게 치명타를 입혔고, 급기야 교인들을 교회에서 하나 둘씩 쫓아내는 사단의 놀잇감이 되고 말았다.

어느 교회에서 한 성도가 목사님에게 말했다. “A라는 일의 처리로 인해 성도들이 힘들어합니다. 성도들이 별로 좋지 않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담임목사가 물었다. “누가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자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줘야 하니까요.” 무심코 던진 돌에 연못의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 사실무근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목회를 어렵게 만들고, 교회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은 사단이 하는 짓이다.

말이란 분별해서 말해야 한다. 말의 품격을 살려야 한다. 명품 언어가 있는가 하면 폐품 언어도 있다. 분별이 안 되는가? 유익한지, 무익한지. 덕이 되는지, 독이 되는지.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이 말이 유익하고 덕이 되는가? 은혜로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살리는 말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