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얼마 전에 안동에서 젊은 부부의 끔찍한 살인극이 벌어졌다. 어느 날 남편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중이었다. 방 안에서 아내가 하는 말이 들렸다. 경제력이 없는 남편을 무시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분노를 절제하지 못한 남편은 쇠로 된 부지깽이를 들고 방으로 뛰어들어 아내를 무차별 폭행했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아내는 숨을 거두었다.

부부가 이 정도라니? 가슴 아픈 현실이다. 한편 넓은 마음으로 동정표를 던져본다. 얼마나 살기가 팍팍하고 힘들었으면 남편에게 그렇게까지 말했을까? 남자로서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는 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힘든 일인데, 먹고 사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일하고 싶어도 일할 곳에 없는 오늘 우리네 현실이 원망스럽다.

그러나 그렇게 동정표를 던지는 것으로 끝나기에는 너무 씁쓸한 게 많다. 30대 초반이었기에 혈기를 참기 어려웠을까? 그래도 순간적인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그건 동물적인 삶이 아닐까? 더구나 아무리 속상해도 부부가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무지막지한 폭행을 휘두를 수 있단 말인가? 내 목숨이 아닐지라도 생명은 소중한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경시할 수 있단 말인가?

아내의 무시하는 말, 그건 너무나 무서운 비수였다. 인간이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싶은 자존심. 그런데 그 자존심이 짓밟혔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짓밟는 말을 자주 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는 상관없다.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자기 속풀이에만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그렇게 남의 자존심을 짓밟는 말 한 마디는 한 사람의 인생을 무참히 짓밟아 놓고 만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 달 전에 있었던 압구정동 어느 아파트 경비원의 분신자살도 우리네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53살의 나이에 아파트 경비원을 하던 분이 있다. 어느 날 자신의 몸에 인화물질을 뿌린 뒤 불을 붙였다. 전신 3도 화상을 입었다. 한 달간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났다. 피부 이식을 하는 과정에서 패혈증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50대의 젊은 나이에. 가족들도 있는데. 그런데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평소에 입주민들이 비인격적인 대우를 해 왔다고 한다. 자존심도 상하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분신 직전에도 한 입주민이 욕설과 폭언을 퍼부었다고 한다.

얼마나 속상했으면 그렇게 했을까? 사람을 얼마나 무시하고 자존심을 짓밟았으면 죽음을 선택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말이란 자기가 하고 싶다고, 기분 내키는 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상대방을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알아야 하는데.

아무리 속상해도 그렇다. 극단적인 선택은 조심해야 한다. 죽음을 생각하기 전에 이것 저것 생각해 봐야 하지 않는가? 가족을 생각하고, 자녀들이 입을 상처도 생각해야 한다. 자기 목숨이라고 함부로 다룰 수는 없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이다. 가족들의 몫이기도 한다.

주민 폭언에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했다. 짓밟힌 자존심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살아가는 걸 보자. 직장생활 하면서 자존심 상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심지어 목회를 하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힌다. 어떻게 자존심을 다 챙기면서 살 수 있겠는가? 적당하게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때때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건 바로 사람들의 평가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들이 나에게 뭐라고 말하는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니 남들의 말에 민감하다. 사람들이 하는 말에 의해 내 기분과 감정이 움직인다. 그러나 자신에게 좀 더 정직해야 한다. 자신에게 좀 더 집중해야 한다. 옳은 길이라면, 바른 길이라면 의연히 자기 길을 갈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의 평가보다 자기 소신이 중요하다. 더구나 하나님이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

삶의 태도를 조금만 바꿔보면 수치심과 자부심이 달라진다. 수치를 느낄 수 있는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에도 달리 반응할 수 있다. 높은 자리에 있어야만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위치에 있어야만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찮은 일을 하면서도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적 직업관을 갖고 살아서는 안 된다. 직업에 귀천이 있나? ‘사’자 들어가야만 좋은 직업은 아니다. 남들이 무시하는 직업을 가졌을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그러니 사명감을 갖고 자기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다 주인이 될 수는 없다. 종이 싫다고 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순 없다. 주인은 주인으로, 종은 종으로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자기 할 일을 잘 감당하면 된다. 맡은 일에 충실한 것으로 자부심을 갖고 보람을 맛보며 살아야 한다.

때로는 분통 터지는 일도 겪는다. 자존심 상하고 속상한 일도 자주 경험한다. 그렇더라도 웃음으로 받아넘기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지는 못할지라도 속상한 감정을 삼키며 살아간다. 그래야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으니까. 자아실현은 그런 험난한 고비를 넘겨야 하니까. 그렇게 해야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니까.

인터넷 자료로 분신경비원 장례식장 빈소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 거기에 어느 교회 조기가 버젓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십자가 위패가 세워져 있었다. ‘아니, 저럴 수가….’ 그리스도인인데 왜 저렇게 해야만 했단 말인가? 예수님은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예수님의 마음으로 접근했더라면 결단코 저렇게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을 텐데.

사람들은 안타까움을 갖고 도와주려고 이래저래 애를 쓴다. 그런데 사람들의 동정과 위로를 넘어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봐야 한다. 과연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