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균석 목사(한국히브리신학원 학장).

사람의 잣대 안에서는 어두움인 무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어야 할 것들이 많아지도록 쌓아 올리기 때문이다.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의 소망의 목표인 죽여야 할 것을 죽이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잣대이므로, 어두움인 무지를 깨트려서 소멸시키는 믿음의 능력이 필요 없다. 사람의 잣대의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잣대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의 잣대가 존재하고 있는 것조차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잣대를 하나님의 잣대로 알고 믿음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이 없는 믿음을 능력이 있는 믿음으로 알고, 믿음의 모양만을 가지고 의식에 빠져서 종교 행위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믿음의 행위다.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의 믿음 안에서 바라는 소망을 하나하나 이루어 가는 확신을 쌓아올려 가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것인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뀌지 않는 종교 행위로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 믿음의 종국이 불행으로 마무리가 된다면, 이것보다 억울한 일이 또 있겠는가?

또 믿음의 본질은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 안에서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들을, 말씀들이 보여서 증명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히 11:1에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번역을 하였다. 육안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을 믿음의 방편으로 보게 된다는 말로 생각된다. 현재에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루어진 것으로 증거를 삼는다는 말이다. 이 말은 현상적인 의미로 번역된 것이다. 그래서 현실적인 삶 속에서 이 믿음을 여러 형편과 상황에 따라 적용해서 설명하고 있다. “현재는 가난하지만 장래에는 부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현재는 병이 있지만 장래에는 깨끗이 나을 줄로 믿습니다”. 장래 천국에는 가보지 않았지만, 믿음이라는 지남철로 당겨다가 현실 속에서 천국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을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로 말하고 있다. 이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믿음의 본질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왜 믿음의 본질이 아닌 것을 믿음의 본질로 잘못 인식하고 믿음으로 믿고 있었는가?

한글 성경에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오류된 번역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들을 말씀들이 증명을 해서 보여 주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씀인데, 보지 못하는 것들은 무엇이든 본 것과 똑같은 현실의 증거로 나타내어 보여 주는 것으로 믿음을 정의 내리고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의 본체를 듣고 삶 속에 적용하고 익혀갈 때 자라난다. 말씀을 듣고 적용하고 익혀 가는 만큼 믿음이 자란다. 말씀을 적용하지 않으면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다. 내가 직접 죽고 부활하는 체험의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말씀들을 문자로 된 글씨로 알고 읽어 왔지만, 그 말씀들이 언약하신 내용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믿어야 하는 것인지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의심투성이가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이다. 믿음 없이는 읽을 수 없다. 그래서 니체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300독을 하였지만, 끝내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신은 죽었다고 결론을 내지 않던가?

영의 세계는 보이는 세계가 아니다.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은 것이 믿음이다. 영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이 보이지 않지만,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져 가는 것을 믿음으로 볼 수 있도록, 성령의 감동으로 문자화하여 말씀으로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는 혈과 육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잣대인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 곧 그리스도 예수 안의 믿음이다. 무슨 믿음인가? 첫째 시기, 둘째 시기, 셋째 시기인 하나님의 지식의 빛, 근본 의도하신 법, 하늘들, 그리스도를 배움으로 인간의 마음땅인 넷째 시기, 다섯째 시기, 여섯째 시기로 넘겨받고 그 말씀인 법과 하나로 동침을 해서 말씀과 하나하나 상담을 해가면서 마음땅에 본래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인 무지의 무저갱의 얼굴들을 잘라내고 깨트리고 소멸시켜 죽여서, 생명으로 부활이 되어 구원이 성취되고 말씀이 육신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 세워지게 하는 믿음이다.

이 내용은 내면, 곧 영혼이 믿음에 따라 자라나고 살이 쪄 가는 과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혈과 육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내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말씀들이 믿음에 의하여 죽을 것이 죽고 부활되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 이루어진 것을 증거로 보여주게 된다.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까지 한 시기 한 시기를 통과해 가면서 어두움인 무지를 죽이는 것을 반복적으로 익혀 나가는 것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의 믿음을 믿음으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말씀들의 증거다.

믿음은 첫째 시기에서 출발해서 적용하고 익혀가는 과정 속에서 성장해 가면서, 여섯째 시기의 완성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신 것이다. 의인은 믿음을 떠나서는 생명으로 부활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씀이다. 의인이 무엇인가? ‘짜디크( )’인데 ‘마음땅의 어두움인 무지가 믿음을 통해서 산산이 부셔지고 불살라져 재로 남아 있는 자’를 의미한다. 거룩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고, ‘의로운 자는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피조물인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잣대 안에서 믿음으로 어두움인 무지를 잘라내고 소멸시켜서 생명으로 부활해야 할 자들이라는 말씀이다.

죽어야 할 것인 무저갱의 얼굴들을 잘라내고 죽여서 소멸시키지 않고, 다 죽인 것인 양 위장을 하고 의인인 체하면서 하나님의 잣대의 본체인 그리스도 예수께 대항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한 장본인들이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이 아니었던가? 의인인 체 거룩한 체한다고 의인이 되고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종교 행위를 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당시에만 있었다고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지금도 바리새인들이 얼마든지 있으며, 그 중에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장담하지 말라. 의인은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 안에서 어두움인 무지를 죽여서 소멸시키고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일평생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혈과 육의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치는 어두움인 무지를 죽이고 생명으로 부활하는 데에 있다. 그래야 불못에 들어가 어두움인 무지를 태우는 고통을 당하지 않는 의인의 반열에 들어가게 된다.

서균석 목사는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하늘교회(통합) 담임목사 은퇴
한국히브리신학원 학장

문의: 010-3728-0245
홈페이지: http://www.koreahebr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