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구 장로(바른구원관선교회).

5월 16일자 본지에 실린 필자의 글 “구원파와 칼비니즘은 얼마나 다른가”에 대한 한 목사님(예장 합동)의 반론에 응답합니다.

1. 반론: “장로님께서 칼빈주의는 인간의 책임을 무시하고,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고 하셨는데, 일반적으로 이러한 말씀은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의견입니다. 제가 알기로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은 칼빈주의를 가장 잘 반영한 문서로 알고 있는데, 어떤 근거로 칼빈주의는 인간의 책임을 무시하고,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고 하신 것인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응답: 칼뱅은 빌립보서 2장 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해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를 근거로 성화의 행위는 인간이 자유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일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주장이 성경에 일치함을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구원은 하나님께서 sole worker로 이루어 가시는 것으로 인간이 copartner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Book II Ch 3, 12 p.262).

It is strange that this should have proved a stumbling block to so many writers, otherwise respectable. The Apostle says not that the grace of God labored with him so as to make him a copartner in the labour. He rather transfers the whole merit of labour the grace alone by thus modifying his first expression " It was not I,” says he “ that labored, but the grace of God that was present with me.

사도 바울이 자기가 일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가 일하였다고 기록한 것은, 바울 사도의 겸비함의 발로이지 자신은 전혀 한 일이 없다고 기록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빌 2장 12절과 13절을 함께 묵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성령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므로 성령에 복종하여 행함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인간을 copartner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12절 말씀은 구원은 칼빈신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 번 믿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믿고 거듭나서 말씀에 순종하는 성화의 삶에 진력함으로써 이루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칼비니즘과는 반대로 성경은 신자의 자유를 인정하고 그 자유로 육욕을 좇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예장을 포함하여 전 세계 복음주의 교단들이 헌법에 신조로 규정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신조는 구원이 성도의 의지 및 행위에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보장됨을 주장하는 칼비니즘의 구조적 결함을, ‘은혜의 자리’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해결합니다. 신조 제17장 1(성도 견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으시고 그의 영으로 효력 있게 부르시며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자리’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떨어져 버릴 수 없고 그 안에서 확실히 끝까지 견디며 영원히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기록하지만, 곧 뒤를 이어 제18장(은혜와 구원의 확실성에 관하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성실하게 그를 사랑하고 그의 앞에서 모든 선한 양심에 따라서 행동하기를 노력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있어서도 그들이 ‘은혜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제17장 1에 제18장을 결합하면,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구별한 자들은 ‘은혜의 자리’로부터 떨어져 버릴 수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성실하게 그를 사랑하고 그의 앞에서 모든 선한 양심에 따라서 행동하기를 노력하는 사람”이 그러한 ‘은혜의 자리’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화에 노력하는 사람만이 ‘은혜의 자리’에 있음으로 해서 끝까지 견디어 영원한 구원을 얻을 것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웨민신조는 칼빈의 은혜 일변도의 견인론과는 다르게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성경에 일치하는 바른구원관을 가르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반론: “옥한흠 목사님도 구원파와 같은 입장의 구원관을 가진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한 번 받은 구원이 영원하고 취소되지 않는다는 칼빈주의 구원관은, 옥한흠 목사님 뿐만 아니라 한국의 장로교 목사님들은 거의 대부분 그렇게 믿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옥한흠 목사님의 교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 장로교회의 신학이 그러한 것이겠죠.”

응답: 예수교 장로교회의 헌법은 9장(신조)에서 “너희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믿고 의지하여 본받으며 하나님의 나타내신 뜻을 복종하여 겸손하고 거룩하게 행하라 하셨으니 그리스도를 믿고 복종하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번구원 영원구원론은 결코 장로교회의 구원론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한 번 믿었더라도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행함이 없게 되면 구원에서 탈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회개하고 다시 성화에 진력한다면 구원을 이루어 갈 수 있겠지요. 성화란 완성의 개념이 아니고 진행형의 개념임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성화에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구원 여부는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지요.

저는 글을 읽는 목사님들이 7년 전 옥한흠 목사님처럼 회개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씁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한 번 구원 영원구원론’을 가르치고 설교해 온 목사님들의 회개야말로, 한국교회의 신자들이 살고 한국교회가 살고 한국 사회가 정화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타락의 책임을 먼저 교회의 지도자, 즉 목사와 장로들에게, 특히 말씀을 맡은 목사들에게 물을 것임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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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성공을 주는 온전한 복음> 저자 김병구 장로(바른구원관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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