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구원자”(soter)였다.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을 선택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자”였다. 이러한 구약의 용어는 신약에서 나사렛 예수에게 적용된다. “구세주” 칭호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나사렛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되었을 때에 그를 높이기 위하여 사용된다. 신약에서 사용된 “구세주”(soter)라는 용어는 예수의 지상에서의 구원 사역의 완성과 승천을 증언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예수는 “구세주”이다.

1. 구약의 사용

1) 시편 기자의 사용: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

시편 저자는 하나님에게 “구원자”라는 칭호를 붙인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시편 저자는 성전입장 의식문(儀式文)에서 성소에 계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를 노래한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시 24:3-4)이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시 24:5). 이 시에 있어서 저자는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하나님은 구원자, 구주이시다.

탄원시편 저자는 여호와와 교제하는 가운데, 즉 여호와의 전에 머무는 가운데 자신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여기서 저자는 하나님을 “나의 구원”이라고 노래한다. 하나님은 “구원자”이시다. 시편 35편 탄원시의 저자 다윗은 자기가 까닭 없이 고발당했다고 느꼈다. 질병이 그런 고발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10절, 13-25절 참조). 사람들은 질병이 있으면 숨은 죄가 있는 것이므로 이 죄를 재판에서 밝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시 35:1-2). 저자는 탄원하면서도 거듭 하나님의 개입을 신뢰하기에 이른다.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시 35:3). 여기서 저자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구원”이라고 호칭한다. 하나님은 “구원자”이시다.

시편에서 기도자 다윗은 적들에 둘러싸여 있다. 사람들이 지위를 부러워하고 그를 비방하며, 우정에도 불구하고 위선적이다.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시 62:4). 기도자 다윗은 이러한 상황에서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의 구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1-2). 적에게 공격을 당하는 기도자는 스스로를 이미 기울어져서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담에 견준다. 이러한 불안한 상황에서 기도자는 하나님만이 자기의 반석이시요 구원이라고 확신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며 노래하고 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5:5-6).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 즉 “구원자”이시다.

전쟁의 참화를 겪은 하나님의 백성 아삽이 노래하는 시는 민족의 탄원시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민족의 아픔을 탄원한다: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시 79:1). 기도자는 열조의 죄를 기억하면서 탄원한다: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시 79:8). 그리고 하나님에게 다가오는 세대들과 자신들을 위하여 탄원하고 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 79:9). 여기서 여호와는 “구원의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이다.

2) 이사야의 사용: 하나님은 “나의 구원”

이사야는 그의 책 11장에서 앗수르 왕국에 의한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예언 후에, 메시아의 평화로운 왕국을 예언한다. 이사야는 그의 책 12장에서 그의 백성을 향한 진노 후에 그의 백성을 향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찬양하고 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사야는 그의 책 17장에 다메섹(시리아)과 북왕국 이스라엘의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면서 이스라엘 멸망의 이유를 말한다: “이는 네가 자기의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자기의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않은 까닭이라.”(사 17:10). 여호와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칭송되고 있다.

3) 예레미아의 사용: 하나님은 “환난 때의 구원자”

예언자 예레미아는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 땅에 내린 가뭄 재앙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탄원의 기도를 드린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곤란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같이 하시나이까”(렘 14:8). 그가 재앙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탄원의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소망이며 “곤란한 때의 구원자”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4) 미가의 사용: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

남왕국 유대에서 활동한 예언자 미가는 부패한 유대 백성에 대하여 탄식하고 저들의 불법과 불의를 고발하면서 자기 신앙의 정체성을 선언하고 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 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미 7:7). 미가는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칭송하고 있다.

5) 하박국의 사용: 하나님은 “나의 구원의 하나님”

예언자 하박국은 바벨론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여야 한다는 것과, 이로써 무서운 곤경의 시기가 이스라엘에게 곧 닥칠 것을 알고 있다. 이로 인하여 하박국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하박국은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하바국은 그가 지은 시편(합 3장)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8). 하나님은 하박국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구약과 유대교에서 구주라는 칭호는 백성의 구원자라는 뜻이다. 헬레니즘에서는 신들, 영웅들, 그리고 통치자들이 구원자이다(Cullmann, The Christology of New Testament, 219). 그러나 하나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시다.

II. 신약

“주”(kyrios)라는 칭호처럼 “구원자”(soter)라는 칭호는 신약에서 나사렛 예수의 지상적 사역의 완성과 그의 승귀 속에서 “메시아” 확증을 전제하고 있다(Cullmann, the Christology of New Testament, 241). 나사렛 예수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자이시며, 구주 그리스도시다.

1.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자

마태에 의하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네가 잉태하게 될 것이고, 그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명한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자”(soter)이다. 마태는 여기서 이사야 7장 14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를 인용하고 있다(마 1:23). 예수는 임마누엘이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예수가 임마누엘이라고 불린 것은 마태복음밖에 없다.

누가에 의하면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 예수의 탄생 소식을 전한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여기서 예수는 “구주” “그리스도 주”라고 불리고 있다. 누가는 여기서 “구주”(soter)를 “그리스도 주”라고 해석하고 있다. “구주”란 단어는 당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신들이나 인간들, 그리고 물론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도 붙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 중 한 사람이 아니고 그들과 유사한 한 사람도 아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와 주로서, 이러한 칭호가 붙는 것이 정당한 유일한 사람이다(해설과 관주 성경전서, 독일성서공회편, 신약전서 131).

베드로와 사도들이 예루살렘 유대인의 공회에 붙들려 가서 대제사장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의 도를 증거하지 못하도록 위협을 받자, 이들 앞에서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하고 예수가 부활하시고 임금과 구주인 것을 증언한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 5:30-31). 여기서 예수는 “구주”로 선언되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 보낸 서신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영원 전부터 예정되었으나 그리스도 예수가 세상에 오심으로 비로소 계시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예수는 “구주, 그리스도”로 호칭되고 있다. 그리스도이신 구주는 십자가로써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영생을 가져다 주신 분이시다.

바울은 디도에게 보낸 서신에서 신자의 모범적 행동의 필요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하신 은혜에 근거한다고 증언한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 예수는 “하나님, 구주, 그리스도”라고 호칭되고 있다. 여기서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과 동격인 “구주”와 “그리스도”로 증언되고 있다.

2. 주(kyrios)에 대한 보충어로써 “구주”(救主, soter).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보낸 서신에서 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서 행하는 것을 한탄하고 경계하면서 성도는 천국의 시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서 통치하고 계시며 우리를 “구원하는 자”이시다.

베드로는 초대교회에 보낸 그의 서신의 서두에서 예수 앞에 “구주” “그리스도”라는 존칭을 붙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후 1:1). 여기서 예수는 “구주” “그리스도”로 호칭되고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는 길을 기술하면서 예수 앞에 “구주”라는 존칭, 뒤에 “그리스도”라는 존칭을 붙이고 있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 1:11). 여기서 “구주”는 “주”에 대한 보충어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구주”란 “주”라는 용어의 구체적인 설명이다.

베드로는 초대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고자 하는 거짓 선생들을 경고하면서, 성도들이 자신을 거짓 교리와 잘못된 삶으로부터 지켜야 함을 피력하고 있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벧후 2:20). 여기서도 구주를 주라는 칭호를 보완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 재림의 확실성을 증언하면서 재림에 관한 예수의 말씀을 환기시키고 있다: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벧후 3:2). 여기서 “주 되신 구주”라는 존칭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고 있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의 결론에서 주의 강림을 기다리며 성경의 말씀에 굳건히 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성장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여기서도 예수는 앞에  “주 곧 구주” 존칭이 붙고 후에, “그리스도”라는 존칭으로 호칭되고 있다.

결론: 구원자로서의 예수의 탁월성

나사렛 예수는 단지 종교사적 인물(부처, 공자, 마호메트 등)과 동등하게 끝날 수 없는 탁월성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자신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종교적인 구원자들을 심판하시고 통일하신다. 그는 여러 종교 교주 가운데 속하는 한 구원자(a savior)가 아니라, 유일한 구원자(the Savior)이다. 나사렛 예수는 한국의 민속 신앙 정감록이 기대하는 정도령이나 대중 불교가 기대하는 미륵불 등 모든 종교적 구원자를 넘어서는 구원의 실체다. 그는 역사상 나타난 모든 종교적 구원자 위에 뛰어난 유일한 구원자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