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원 점검을 위해 나온 조헤이 담당자들과 일본 헌병들이 애국행진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기차에 오르고 있는 징용 나가는 조선 남자들에게도 따라서 부르라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제일 강력적인 손짓 지휘를 하는 이시가와를 엄마가 보게 되었다.

아버지도 신애도 보았다. 큰아버지는 츳츳 혀를 차며 못된 새끼, 망할 놈의 새끼, 눈살을 찌푸리시고 가래침을 칵 뱉었다. 속울음을 깨문 총알받이 징용군들의 이 악문 군가소리는 8월의 에메랄드 빛 아침 하늘 멀리 멀리 슬픈 장송곡인 양 퍼져나갔다.

엄마를 따라 신애는 눈을 감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꼭 살려주세요. 꼭 우리 아버지를 보호해 주세요. 꼭 집에 돌아오시게 해 주세요. 하나님 제 부탁을 꼭 들어주세요. 하나님 아멘. 예수님 아멘.’ 짧고 진정한 소원이 담긴 어린 소녀다운 순수한 기도였다. 뜨겁고 애달픈 간절한 기도였다. 이제 플랫폼에는 전송 나온 아녀자들만 남고 센닌바리 수건을 머리에 두른 남자들은 모두 기차에 몸을 실은 후였다.

“순희 아부지이, 몸 조심해요오…….”
“금순이 아부지이, 자주 편지 해요오…….”

기차에 대고 두 손을 활활 내저으면서 아낙네들은 목이 터져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최후의 절규. 뭉크의 절규가 이보다 더 처절할까. 센닌바리 수건을 씨름 시합에 나가는 씨름꾼처럼 머리에 두른 남자들은 한 번이라도 더 식구들의 얼굴을 보려고 차창 밖으로 고개를 쑥 빼고 아우성을 쳤다. 신애의 눈엔 흡사 장날 철사 줄로 엮은 닭장에 갇혀 식용으로 팔려가는 닭들의 형국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이윽고 수증기를 내뿜으며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플랫폼에 남은 아낙들은 기차를 따라가며 목이 터져라 악을 악을 썼다. 줄곧 눈을 똥그랗게 뜨고 보고 있었으나 신애는 기차 속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엄마처럼 신애도 알고 있다. 아버지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않은 것은 결코 기침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것을.

기적소리를 길게 끌며 기차는 속력을 내기 시작하였다. 제물포항을 향해 떠난 임시 열차는 이제 그 꼬리마저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헌 짐짝 같은 남자들의 행선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라 잃은 목줄에 매여 끌려가는, 기차에 갇힌 허기진 징용군도 텅 빈 기찻길을 원한에 찬 질퍽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머리에 무명수건 쓴 배고프고 슬픈 아낙네들도. 막연히 남양군도의 어느 섬이라고만 짐작할 뿐, 볼모로 잡힌 서러운 백성이기에 막강한 연합군과 대치하고 있는 열세에 몰린 일본군의 막바지 총알받이로 실려 가고 있다는 것 뿐.

벚나무에 걸린 전등불 아래 신애는 오래도록 서 있었다. 불 켜진 안방 창호지 문에 비친 엄마의 실루엣은 고개 숙이고 바느질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떠난 밤부터 동생들이 잠든 뒤, 엄마는 깨끗이 다림질한 무명수건에 진홍색 실로 센닌바리 수를 놓기 시작했다. 천 사람의 바늘로 뜨는 무운장구가 아닌 홀로 남편의 무사귀환을 위한 애끓는 기도의 수繡를 한 땀 한 땀 뜨는 것이었다.

방으로 들어와 책상 앞에 앉은 신애는 오늘 아침 대문 앞에 놓인 상자 속에서 나온 빨간 표지의 수첩을 응시하고 있다. 가즈오가 놓고 간 것이었다. 아버지의 체포와 징집영장, 징용 출정 등으로 이번 여름 방학은 가혹한 시련의 나날들이었다. 이 빨간 표지의 앙증맞은 수첩은 신애가 센닌바리를 하는 사거리로 나온 가즈오에게 너도 일본 아이라고, 매몰차게 대한 것에 대한 화해의 뜻이 담긴 선물이리라.

기어코 아버지가 징용에 끌려가신 지금 신애는 일본 아이인 가즈오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음에도 그를 아주 미워할 수 없는 마음이기도 하다. 유치원 때부터 쌓인 『소공녀』와 『소공자』를 같이 읽고 나란히 앉아 오르간을 치고 하모니카를 배우면서 유년의 나이테를 더해간 추억은 어떤 지우개로도 지울 수 없는 신애 생의 순백의 한 페이지이므로.

다음 날 아침. 공기는 맑고 상쾌하였다.

신애는 사철나무 울타리에 흩뿌려진 붉은 꽃잎 같은 고추잠자리들을 조심스레 하나씩 하나씩 떼어내었다. 새벽이슬에 망사 같은 날개가 젖은 잠자리들은 꼬리를 파닥거릴 뿐 날개에 힘을 쓰지 못하고 순순히 잡혀주었다. 가즈오와 야마무라(山村)교장의 모습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벌써 산보가 끝났거나, 산보길이 달라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가즈오의 모습이 나타기를 기다리며 신애는 손에 쥔 잠자리들을 사철나무 가지에 한 마리씩 도로 놓아주며 가즈오를 기다리는 초조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잠자리들은 나무 잎사귀에 몸을 찰싹 붙이고 파닥거려 보나 날개에 이슬이 남아 있어 아침 해가 뜨기 전에는 날지 못한다. 한참이나 기다렸는데도 가즈오는 뒤꼭지도 보이지 않는다. 술래로부터 멀리 숨은 듯이.

아침부터 기온은 높고 바람 한 점 없다. 잠이 모자라 눈이 부석한 엄마는 해 뜨겁기 전에 나서야한다고 복숭아를 따기 시작한 과수원으로 나가려고 서둘렀다.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신애를 위해 엄마가 동생들을 데리고 갔다.

모처럼만에 귀찮은 동생들이 없는 조용한 집에 혼자 남은 신애는 닭장에 모이를 주고 살래살래 꼬리치며 졸랑졸랑 따라다니는 평화 밥그릇에 동생들이 먹다 남긴 밥찌꺼기에 멸치를 조금 섞어서 주었다. 토끼 두 마리가 빈 입을 오물거리고 있는 토끼장에 풀을 넣어주고 나서야 신애는 호젓이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어젯밤엔 편지를 쓰지 못하였다.

깊은 밤 엄마가 고개 숙여 한 땀 한 땀, 센닌바리를 수놓는 것처럼 한 줄 한 줄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고 있노라면 신애는 아버지와 마주 앉아 있는 것 같아 신애의 마음은 한결 덜 쓸쓸하고 덜 슬프다. 편지를 쓰노라면 불처럼 이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도 어느 만큼은 잠재울 수 있었다. 하지만 어저께 밤엔 쓸 수가 없었다. 쓰지를 못 하였다.

처음엔 들고양이의 울음소리인가 하였다. 수고양이를 찾는 암고양이의 애절한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나뭇가지 끝으로 양철 챙을 긁는 것 같은 소리가 뒤란에서 들려왔다.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여 신애는 들창문을 조금 열고 캄캄한 밖을 내다보았다.

이지러진 그믐 밤, 오동나무 앞 의자에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벌떡 몸을 일으킨 물체는 엄마였다.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신애는 으악-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갑자기 엄마가 두 주먹으로 배를 마구 쥐어박는다. 아픔도 잊었는지, 미친 여자처럼 배를 마구 난타하다가는 의자 등에다 배를 메어박고 하는, 이상한 행동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계속>

김녕희 작가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국소설문학상·조연현문학상·만우문학상·PEN문학상 등 수상, 단편소설집 <고독한 축제> 등, 장편소설 <에덴의 강>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