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꽃 향기가 캠퍼스를 진동하던 5월이었다. 여학생들은 청바지를 벗어 던지고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서 빈 벤치에 하릴없이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체크 남방의 긴소매를 폼 나게 걷어 올린 남학생들은 그녀들을 힐끔 거리고 한낮의 태양조차 감미로운 봄과 여름의 길목에서 젊은 열기들은 로맨스를 꿈꾸며 헤매었다.

나는 재호 형이 첫사랑이었다. 그의 손끝이 내 몸 어딘가를, 아주 잠깐 순간적으로 스칠 때조차 심장의 요란한 움직임들이 몸 밖으로 밀려 나올 듯하여 나는 호흡을 다스려야 했다.

축제의 밤 그의 입술이 나의 뺨에 닿았고 곧 떨고 있는 내 입술로 다가왔다.

그가 조심스레 나의 닫혀진 입술을 열고 들어왔을 때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하늘을 보았고 수많은 싸락별들이 요동치듯 몸을 떨며 내 눈 속으로 떨어져 들어왔다.

그러자 밤하늘에 깊은 공동이 생겼고 나는 하염없이 그 속으로 떨어지는 듯한 착각으로 몸을 휘청였다. 어지러워? 그가 두 팔로 나를 깊이 안으며 물었다. 우리 이제 키스했으니까 결혼해야 되는 거네? 내가 몽롱하게 물었고 그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하하하 웃었다.

우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었다. 도서관으로 강의실로 주점으로 카페로…… 종로며 명동으로 한여름의 이상기온으로 사람들이 미칠 듯이 더워하던 7월의 그 날까지 우리는 호흡처럼 붙어 있어야만 인생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했다.

그때쯤 나도 강희에 대해서 이상스런 소문이 정말인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두 명의 남자들과도 이미 헤어졌다고 했다.

“너는 너무 쉽게 남자를 생각하는 거 아니야? 그럼 안되는데……”
“너나 잘하셔.”

강희는 남자 얘기만 나오면 갑자기 싸늘해졌다.

“남자. 다 똑같은 거야. 서로 필요에 의해 만나고 헤어지는 거.”

나는 그때 내 어깨에 기댄 그녀의 머리칼에서 순간 불량스런 냄새를 맡았다. 너무나 짧은 종결을 가진 사랑을 비극적 사랑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제 비극적 사랑의 여주인공역을 맡아야 했다. 그는 연약한 심성에 넘치는 동정심으로 자신의 인생을 이성에 조율시킬 능력을 상실한 무능한 역으로 내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38도의 살인적 무더위로 사람들은 폭발할 것 같은 증오심을 참는 것처럼 그렇게 서로 거리를 두고 간신히 견뎌내고 있었던 여름이었다. 하필 그날 방학 중 두 번 있는 동아리 활동이 있는 날이었다. 나는 더위와 생리통으로 나갈 수 없다고 재호 형에게 전했다. 재호 형은 모임이 끝나는 대로 집 앞으로 오겠다고 했다.

진통제가 먹기 싫어 얼음을 가득 채운 냉커피를 석 잔이나 마셨다. 카페인이 어느 정도 진통 효과를 준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리통은 여느 때보다 참기 힘들었고 카페인 탓에 낮잠도 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가슴이 뛰고 식은땀이 났다. 책도 읽기 힘들었고 누워 있기는 더욱 힘들었다.

그가 오지 않았다. 8시쯤 소나기가 땅을 찍어내듯 굵은 장대로 쏟아졌다. 비가 그치고 창문으로 몇몇의 성긴 별이 반짝이는 시간에도 그가 오지 않았다. 나는 탈진하듯 자리에 쓰러졌고 막 잠이 들려는데 똑똑 그가 창문을 두드렸다. 그는 취해 있었고 나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어……”

모임 후 뒤풀이 자리에서 강희가 형편없이 취해서 길에 쓰러졌다. 그는 나와 친한 강희의 집을 알기 때문에 자기가 데려다 준다고 했다. 강희는 그의 팔에 완전히 매달렸다. 그녀가 땅에 질질 끌렸다. 할 수 없이 그는 그녀를 업었다. 택시를 탔고 내려서 다시 그녀를 업고 걷기 시작했을 때 소나기가 내렸다. 그녀는 그의 목을 그러안고 춥다고 속삭였다. 그녀는 단단하게 일어선 그녀의 유두를 그의 등에 밀착시키면서 그의 목에 뜨거운 입술을 대고 문질렀다. 그녀는 젖어 가슴에 달라붙은 그의 셔츠 속으로 손을 넣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녀를 내려놓으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쳤으나 그녀의 손은 집요하게 그의 가슴을 놓지 않고 더욱 매달렸다.

“재호형, 추워, 추워.”

어둠 속에 소나기…… 인적이 없는 골목길……

“저기에요. 우리 집.” 그는 그녀의 집 앞에 그녀를 내려놓고 달아나듯이 뛰었다.

그러나 돌아보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그만 흐느끼는 그녀의 소리를 외면하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그는 망설였다. 그러나 울고 있는 그녀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다가갔다.

“이강희! 이러지 마, 어서 집으로 들어가.”

그는 단호하게 외치는 듯했으나 그의 뒷말은 그녀의 기습적 입맞춤에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혀가 뱀처럼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없어. 우리 집에 아무도 없어, 엄마는 새벽에 들어와……”

그녀는 그의 혀를 놓지도 않고 재빨리 말했다. 그는 뱀 앞에 허물어져가는 단지 통제력 상실한 수컷에 불과했다.

그는 신부 앞에 고해 성사하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인생에는 ‘왜’라는 질문이 필요 없을 때도 있다. 불가항력. 미숙함이 드러낼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만약 그때 그가 나의 눈을 바라보았다면, 만약 그때 그가 용서해 달라고 그건 실수였다고 말했더라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 우리의 관계가…… 그러나 그는 미안하다고만 말했다. 용서해달라고도 다시 받아들여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갔다.

나에게는 천 년과도 같은 반년의 사랑은 그렇게 떠나갔다. 그 후 그는 강희를 계속 만났고 나는 미친 듯이 소설을 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