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3년 10월 27일 미셀 세르베(Michel Servet) 화형 사건

앙리 2세의 치하에 수많은 개혁자들이 화형 당하던 가운데, 깔뱅이 사역했던 쥬네브에서도 종교적인 문제로 세르베를 화형시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세르베 화형 사건은 쥬네브 개혁 역사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리고 깔뱅이 화형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할지라도 그 어떤 이유에서든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므로, 깔뱅을 가장 난처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배경은 오늘날 오랜 신앙 생활한 신자들조차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삼위일체에 관한 문제로 시작되었다.

세르베는 스페인 아라곤(Aragon)지역의 빌라뉴에바(Villanueva)에서 출생하였으며, 카를 5세의 고해 신부 Juan de Quintana의 시동(侍童)과 비서로 일하면서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를 수학했으며, 1526년에는 뚤루즈(Toulouse)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다. 1529-1530년에는 카를 대제를 돕기 위하여 Quintana 신부와 함께 아우스부르그 회의에 동행한다. 그곳에서 루터의 오른팔인 멜랑흐톤(Melanchthon)을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Quintana와 함께 바젤로 가서 에라스무스를 만난다. 그 후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마틴 부처(Bucer)와 까삐통(Capiton)을 만나며, 그곳에서 히브리어와 신학 그리고 교부 터툴리안과 이레네우스(Irénée)를 공부한다. 그는 꼬란(Coran) 신학도 잘 알고 있었으며, 1531년에 ‘삼위일체 오류에 대하여(De Trinitatis Erroribus)’라는 책을, 그 다음해에는 “삼위일체에 대하여”(De trinitate) 라는 책을 출판함으로써 신학적 논쟁의 불씨를 제공한다.

세르베는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헬라 철학자들의 철학적 사고라고 주장하였으며,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주장함으로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부정하였다. 이 책을 접한 마틴 부처는 세르베의 주장을 강하게 거부하였으며, 당시 로마 가톨릭 지도자들조차도 그의 책을 비난하였다.

결국 1533년에 세르베의 조국인 스페인 종교재판소에서는 궐석 재판으로 세르베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세르베는 그의 고향 빌르누브 출신의 미셀이라는 ‘미셀 드 빌르누브(Michel de Villeneuve)’라는 이름으로 파리 소르본느에서 공부하였으며, 파리에 머물면서 깔뱅을 알게 되지만 적대 관계로 급격히 변하게 된다. 그 후 세르베는 파리를 떠나 리옹(Lyon)으로 가서 Trechsel 형제들의 인쇄소에서 교정일을 하다가, 다시 파리로 와서 의학 공부를 하고 의사가 되어 의사로서 명성도 얻게 된다.

그러다가 그는 점성학과 의술과의 관계에 대한 책도 저술하지만 의학계에서 미움을 받아 파리를 떠나야만 한다. 1538년에 파리를 떠나 리옹 근처인 Charlieu에서 의사직을 하다가 1541년에서부터 1553년까지 비엔느(Vienne)에서 비엔나 주교의 주치의가 된다.

1553년에 세베르는 깔뱅의 <기독교 강요>에 대한 대응으로 로마교회와 개혁교회 모두를 반대하는 ‘기독교의 회복 (la Restitution chrétienne)’이라는 책을 비엔느에서 출판한다. 그는 이 책에서 또 다시 삼위일체는 성경적이지지 않음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지 않음을 주장하였으며, 유아 세례와 이단에 대한 사형 형벌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그러나 세르베는 리옹(Lyon) 근처 비엔느(Vienne)에서 체포되었고, 리옹으로 압송되어 로마 교회로부터 화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그는 용케 탈출하여 깔뱅이 사역하고 있는 쥬네브로 도주하였으며, 그가 없는 가운데 가톨릭 종교 재판에서 화형 선고를 받는다. 이로서 스페인과 프랑스의 가톨릭으로부터도 세르베의 신학이 잘못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당시 깔뱅은 쥬네브 사역 기간 중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세르베가 쥬네브를 찾아온 이유는 세르베 자신의 명성과 박식함으로 쥬네브에서도 충분히 출세할 수 있다는 확신 외에도, 깔뱅을 힘들게 했던 쥬네브의 방종파 지도자들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세르베는 쥬네브로 온 다음날 1553년 8월 13일에 체포되었고, 오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 깔뱅과 계속 신학 논쟁을 하였다. 세르베는 깔뱅과 논쟁 중 논쟁 내용과 관계없이 깔뱅의 인격을 모욕하는 행동을 하기도 하였다.

쥬네브 정부가 자문을 구하기 위해 스위스 다른 연방 지역인 베른, 바젤, 쯔리히, Schaffhausen에 세르베의 신학에 대하여 질의하였을 때, 모두 일관되게 세르베의 사상을 정죄하였지만 책임감 때문에서인지 사형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제네바 시의회는 10월 26일에 3일에 걸친 논의 끝에 만장일치로 화형을 선고하였다. 이 때 칼뱅은 세르베를 찾아가 삼위일체와 신성 모독에 대하여 하나님께 회개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세르베는 이를 거절하였다.

깔뱅은 쥬네브 공화국에 감형을 요청하면서, 적어도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참수형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으나 시의원들은 거절하였다. 세르베는 파렐의 계속된 권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학을 포기하지 않은 채 다음날인 1553년 10월 27일에 샹펠(Champel)의 화형장으로 끌려 간다. 화형에 필요한 짚과 나무가 준비됐고, 세르베는 화형장에 섰다.

파렐은 세르베에게 마지막으로 함께 기도할 것을 요구하자 세르베도 동의하였다. 기도 후 파렐은 세르베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죄 용서를 구하라’고 요청하였지만 세르베는 끝내 거절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이라 외치며 처참히 죽어갔다.

▲화형당하는 세르베 옆에 안타깝게 바라보는 파렐의 모습.

깔뱅은 세르베가 화형으로 죽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형장에 가지도 않았고, 파렐(Farel)은 화형의 끔찍한 장면에 말을 못할 정도의 충격을 받고 깔뱅을 만나지도 않고 곧바로 자신의 사역지 뉴샤뗄(Neuchatel)로 돌아갔다. 이로서 세르베의 죽음은 결국 깔뱅의 생애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을 시킨 유일한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깔뱅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깔뱅이 세르베를 죽게 만든 것처럼 진술한다. 하지만 당시 깔뱅은 독단적으로 세르베를 화형시킬만한 권력도, 영향력을 미칠 위치에도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깔뱅은 1559년에 이르러서야 시민권을 얻기 때문에, 재판에 관여할 자격 없는 외국 체류자에 불과했다. 시민권이 없었기에 투표권도 없었고, 공무원이 될 수도 없었다. 그러한 깔뱅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곳은 오직 교회 회의에서뿐이었는데, 세르베의 재판은 교회 회의가 아닌 시의회가 주관하고 있었다. 더욱 시의회 안에는 깔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에, 깔뱅이 독단적으로 세르베를 화형시킬 아무런 권한을 갖고 있지 않았다.

시의회가 세르베를 정죄하였을 때에도, 깔뱅은 포기하지 않고 세르베가 있는 감옥으로 계속 찾아가 그를 설득하였다. 그리고 세르베가 쥬네브로 오기 전, ‘기독교의 회복’의 글이 출판 직전 원고를 깔뱅에게 미리 보낸 적이 있었다. 그 후 세르베가 체포되었을 때, 깔뱅이 증인으로 나선다면 세르베는 피할 수 없는 위기에 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깔뱅은 “세르베의 신성모독은 분명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정죄의 칼날을 휘두르는 것은 나의 권한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잘못된 사상 때문에 그를 처형하기보다는 가르침을 통해 징계하여야 한다”라 편지를 보내었다.

루터 역시 재세례파 사건 이전까지 “우리는 이단을 힘으로 억눌러서는 안된다. 이단이란 영적인 실체이기에, 참수나 화형, 물에 익사시키는 방법 등으로도 결코 제거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이단을 제거할 수 있다”고 했다. 

만약 세르베가 로마 교회에 의해 화형 당했다면, 수많은 화형 사건들 속에 그냥 잊혀질 수 있었던 사건이었지만, 깔뱅이 사역하던 쥬네브에서 이 사건이 발생한 것은 개신교회에게 주는 나름대로의 교훈이 있다. 마 18:15-17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가 예수님의 가르치심이다. 그리고 깔뱅의 교훈을 따르는 깔뱅의 후예들이라면, 이단 정죄의 남발이 아닌 깔뱅의 신중한 태도를 배워 더이상 실수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할 것이다.

깔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형으로 결말난 이 사건은, 깔뱅의 영적 영향권 아래 있던 쥬네브에서 일어난 사건이기에 깔뱅 역시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세르베가 죽은 지 350주년이 되는 1903년 동일한 날에, 깔뱅의 후예들은 세르베가 화형 당하였던 그 근처에 사죄의 비석을 세운다. 그곳은 그의 이름으로 된 거리rue Michel Servet가 끝나며, Avenue de Beau Séjour가 시작되는 곳인데 비석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세르베를 위한 속죄비가 세워져 있는 곳.

▲1903년 10월 27일 세르베를 위해 세운 속죄비(프랑스 개혁교회 신문사 Réforme 편집장 Jean-Luc MOUTON 제공)

“우리의 큰 종교 개혁가인 깔뱅을 존경하고 감사하는 그의 후손들은 개혁과 복음의 참된 원칙에 따라 양심의 자유에 대하여 거슬려 행한 그 시대의 실수이기도 한 그의 실수를 정죄하면서 이 속죄비를 세운다. 1903년 10월 27일”

▲1908년 파리 14구 시청 앞에 세워진 세르베 동상.

▲프랑스 Annemasse에 세워진 세르베 동상(사진 출처 www.fsd74.org).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