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 선교사는 1859년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와 어머니 엘리자베스(Elizabeth)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언더우드의 가정은 당시 영국 런던에서는 부러움을 사던 가정이었다. 그런데 자녀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던 어머니가 언더우드가 4세일 때 갑자기 병사하고 말았다. 여기에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았고 얼마 뒤 사업이 망해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이 때 아버지는 곧바로 교회에 찾아가 하나님께 기도하던 중, “사업과 자녀들의 문제는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러던 중 아들 언더우드와 형이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비록 프랑스가 천주교 국가로 교리는 약간 달랐지만 신앙생활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사업에 실패했던 아버지는 열심히 노력하여 새로운 사업을 개척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1872년 가족을 이끌고 미국 뉴더르함에 정착하였다. 넷째 아들인 언더우드는 해스브룩학원을 거쳐서 1877년 뉴욕대학에 진학하였으며, 1881년 화란 개혁파신학교에 진학하여 3년간 신학을 공부하였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1884년 11월에 네덜란드개혁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12월 16일 여행용 대형 가방 하나, 타자기 한 대, 대형 카메라 하나가 전부인 짐을 가지고 일본으로 가는 상선에 몸을 실었다. 때마침 요코하마에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헵번을 비롯해서 낙스 선교사, 이수정 등의 영접을 받았고, 1885년 1월 25일 헵번 선교사의 숙소에 얼마 동안 합숙하면서 이수정으로부터 한글을 배우고 조선에 입국할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서를 한 아름 안고 요코하마를 떠나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와 함께 인천에 상륙했다. 인천 대불호텔에서 2일간 머물렀다가 서울로 들어왔으며, 언더우드 선교사는 서울에 입성한지 사흘 만인 4월 10일부터 바로 알렌이 원장으로 있는 광혜원에 자리를 잡고 광혜원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있는 조선 청년들에게 화학과 과학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의 입국 목적은 교육 사업이었기에 1886년 시내 정동 자신의 집에 ‘번개비’로 별명이 붙은 김규식이라는 6살 된 고아 1명을 모아 놓고 고아원 겸 예수학당(현, 경신중고등학교)을 개설하였다. 언더우드는 1887년 9월 정동에 있는 자신의 사랑채에서 14명을 모아 놓고 최초의 정동장로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때 14명의 교인들이 모였는데 그 중심에는 서상륜의 역할이 컸다. 서상륜은 의주 청년으로서 만주 고려문을 드나들면서 홍삼장사를 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장티푸스에 걸려 생명의 위독을 느끼자 한족(漢族)들의 도움으로 영구에 있는 미선병원에 입원하여 헌터 의료선교사의 진료로 병이 낫게 되었다. 이 일이 감사해서 헌터 선교사가 전도할 때 그 자리에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을 하고, 1879년 세례를 받고 로스 선교사와 협력하면서 영구에서 심양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로스가 번역하고 있던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번역하는 데 협력하여 1882년에 완료했다. 그 감격을 잊을 수가 없어서 고향 의주지방에 전하고자 복음서를 소지하고 잠입하려다가 고려문에 있는 별정소에서 검문에 걸리고 말았다. 이 일로 얼마 동안 별정소에 구금되었지만 다행히 고향 친구가 별정소에 근무하고 있어 그의 도움으로 빠져나와 의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 소식이 의주의 관헌에게 들어갔고 그를 체포하려는 소식이 들리자 동생 서경조와 함께 황해도 장연 소래에 피신하였다. 이곳에서 전도하여 1883년 최초로 자생적 소래교회를 설립하는 데 공을 세웠다. 서상륜은 언더우드가 서울에 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언더우드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14명이 모여 역사적인 조선의 모교회라는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1915년에는 경신학당 대학부를 서울 YMCA에서 개교하였으며, 1916년 연희동에 19만평을 매입하여 연희전문학교를 건축하고, 그곳에서 오늘의 대 연세대학교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몸이 연약하여 1916년 귀국, 고향에서 58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유언에 따라 1999년 시신을 양화진에 안장하고 언더우드의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그의 장남인 원한경(H. H. Underwood)이 연희전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일제 말엽에 추방을 당하여 일시 귀국을 하였다. 해방이 되자 원한경 부부는 연희전문학교 재건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죄우익 갈등으로 그의 부인이 대학생에게 피살되었으며, 그의 남편은 6.25 전쟁 중 부산에서 개교하여 학장으로 재직하다가 1951년 과로로 부산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3세인 원일한(H. G. Underwood 3세)은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였다. 해방이 되자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학에서 얼마동안 봉사하다가 제대 후 연희대학교 수학교수로 활동하면서 새문안교회로 장로로 재직하다가 2004년에 삶을 마감하였다. 역시 아버지가 묻혀 있는 양화진에 안장하였다. 그의 동생 원요한(J. T. Underwood)은 광주호남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귀국하였으며, 그의 유언대로 1994년 그도 할아버지가 있는 양화진에 안장을 함으로 양화진에서 언더우드 가(家6)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처럼 한국 교육계에 크게 공을 세웠던 언더우드 가(家)에 대해서 더 알기를 원하는 독자들은 연세대학교 구내에 언더우드 기념역사관에 가면 이들의 모든 삶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